•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1. 제1차 개혁
  • 3) 제1차 개혁의 내용
  • (2) 동학 ‘비도’에 대한 대책

(2) 동학 ‘비도’에 대한 대책

군국기무처가 개혁사업을 추진하는 동안 6월 11일의 전주화약을 계기로 일단 자진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이 반일·반개화의 기치하에 재궐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중의 동향에 민감했던 군국기무처는 처음에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개혁안을 채택함으로써 민심을 수습코자 하였다. 그러나 9월초에 이르러 삼남에서 반일 민중운동이 재연하자 이번에는 이 운동을 진압할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군국기무처 의안 중 20여 건은 바로 재기한 동학농민군(의병)의 회유 내지 진압에 관련된 것이었다.

군국기무처는 갑오경장 초두에 일련의 평등주의적인 사회제도개혁을 선언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즉, 7월 30일에 채택된 “문벌·반상의 등급을 劈破하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選用할 것”, “寡女의 재가는 귀천을 無論하고 그 자유에 맡길 것”, “공사 노비의 典을 일절 혁파하며 人口의 판매를 금할 것”과 같은 의안과 8월 2일에 채택된 “驛人·倡優·皮工의 면천을 허할 것” 등 일련의 혁명적 개혁안들은 양반 이외의 모든 신분계층과 부녀대중으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얻으려는 대원군∼김홍집정권의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개혁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8월 15일에는 그 동안 민씨척족정권내에서 권력을 농단하여 ‘罔上虐民’하거나 궁중 질서를 문란케 한 자, 또는 지방관으로서 민중의 착취를 자행하여 제1차 동학농민봉기를 유발시킨 대표적인 책임자로서 전 宣惠廳 당상 閔泳駿, 민비 측근의 巫女 眞靈君(金昌烈母), 그리고 전 삼도통제사 閔炯植 등 3인을 지목하고, 그들의 엄단(誅戮)을 국왕에게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국왕은 진령군의 처벌건은 긍정하되, 민영준·민형식 등은 이미 7월 24일에 遠惡島로 안치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誅戮刑을 가하려 하지 않았다. 군국기무처는 국왕의 미온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8월 16일 진령군을 조속히 체포·처벌할 것과 兩閔을 엄벌에 처하는 건에 관한 국왕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들은 이미 도망하였으며 갑오경장 기간 실형에 처해진 일이 없다.408)민영준은 7월 23일의 정변 직후 평양을 거쳐 香港으로 망명하였다가 1895년 9월 말에야 귀국하였다(鄭喬,≪大韓季年史≫上, 國史編纂委員會, 1957, 89쪽;黃玹,≪梅泉野錄≫, 146쪽;≪東學亂記錄≫上, 47·60쪽 참조).
민형식은 갑오경장 초에 잠적했다가 1895년 6월 1일에야 自現·就囚하였다. 그후 그는 동년 8월 17일에 내려진 국왕의 특사로 민영준 등 다른 민씨 및 친민계 ‘죄인’ 24명과 더불어 방송되었다(≪官報≫, 개국 504년 5월 13일;≪東學亂記錄≫上, 61쪽 참조).
따라서 이들의 처벌을 논한 군국기무처 의안은 다분히 민심수습을 겨냥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조치 이외에 군국기무처는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 전에 ‘原情’ 형식으로 제시했던 폐정개혁요구409)韓㳓劤,≪東學亂 起因에 관한 硏究≫(서울大 出版部, 1971), 72∼204쪽 참조.에 응하는 경제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민심을 무마하고 民擾의 재발·확산을 방지하려 했다. 이러한 내용의 의안은 모두 15건 이상인데 이를 분류·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臟吏의 律은 舊典을 신념하여 엄중히 懲辦하되 原臟은 入官할 것”과 “각 도 상납 중 官逋·吏逋를 급히 該 道伯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구별하여 보고하고 정부조처를 기다리도록 할 것” 등의 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중앙정부 관리들의 공금횡령과 지방관들의 상납금 착복을 엄금하고 그들이 이미 횡령·포탈한 것은 국고에 회수하는 조치를 강구하였다.

이러한 시책의 연장으로 지방관 혹은 鄕豪(豪右)들이 평민의 재산을 불법으로 침탈하는 폐단을 엄금하고, 과거 10년간 지방관 혹은 호우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점탈당하거나 헐값으로 강매당한 田地·삼림 및 가옥 등 재산의 경우 그 피해자가 불법 점탈 내지 강매한 사실에 관해서는 문서와 증인으로써 이를 증명하기만 하면 원상복구를 해준다는 구제책도 강구하였다.

둘째, 田稅제도의 문란과 잡세의 남징 등에 기인한 민폐를 시정코자 하였다. 그 구체적 조치로써, 군국기무처는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난 지역내의 해변과 山郡邑의 結價를 재조정할 것과 지방의 관아 및 군영에서 무시로 거둬들인 損補錢·鹽硝代錢·歲儀 등 명목의 잡세와 잡공, 궁중 각사가 징수해 오던 藥債·筆債·鋪陳債·求請錢·罰例錢·戶長債 등 명목의 잡세, 그리고 京邸吏·營邸吏가 징수해 온 邸債 등을 모두 혁파키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관청에서 공전 지출을 過限한 경우 그 결손을 메우기 위해 民貸를 하는 폐와 지방의 영·읍 관아에서 민간으로부터 관수용품을 구입할 때 그 가격을 일방적으로 하향조절하여 구매하는 따위의 폐단도 엄금하였다.

셋째, 還穀제도의 폐해를 교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각도 환곡 중 移貿·加作 등의 명목은 영원히 혁파할 것”이라 하여 환곡제도의 운영상 이무·가작 등 명목으로 자행되던 모리행위를 근절함과 동시에 “備荒穀을 응급히 籌辦해야 하는 바 民으로 하여금 社倉을 설립토록 하여 米租를 축적하고 정기 출납케 하는 가장 좋은 제도이므로 정부에서 조례를 제정, 각 州縣에 반급하여 준행하는 데 편하도록 할 것”이라 하여 민간주도의 사창제를 도입·실시함으로써 현행 환곡제를 혁파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410)탁지부대신 魚允中의 발의로 1895년 7월 18일에 ‘社還條例’(전 19조)가 제정·발포되었다(≪韓末近代法令資料集≫1, 466∼468쪽 참조).

군국기무처는 민심무마책의 일환으로써 이상과 같은 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취함과 아울러 민요가 일어날 조짐이 있는 지방에 宣諭使를 파견하여 정부의 개화정책을 홍보하고, 또 “日兵이 각 지방에 留駐하는 것은 청병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어서 조금도 악의가 없다”고 하면서 일본군의 국토유린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적인 선유는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따라서 9월초부터 삼남지방의 민중들간에 반일 ‘義旅’(의병)411)1894년 가을에 재기한 동학농민군이 ‘義兵’이라고 자칭한 사실은 1895년 11월 12일에 내려진 국왕의 교지 중, “近日 匪徒滋擾 是無前之變 抗拒君命 而稱曰義兵…”이란 문구로써 알 수 있다(≪高宗實錄≫, 고종 30년 9월 26일).
전봉준도 공초에서 자기가 거느린 군대를 ‘義旅’라 칭하였다.
韓國學文獻硏究所 編,≪東學思想資料集≫1(亞細亞文化社, 1979), 319쪽.
柳永益,≪東學農民蜂起와 甲午更張≫(一潮閣), 1998), 1∼28 및 178∼205쪽 참조.
를 조직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 개화정권을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에 당황한 군국기무처는 다음 9월 3일을 기해 ‘萎民’(몹쓸 백성)에 대해 무력행사까지도 불사한다는 새로운 대책을 수립하여 이를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즉, 삼남지방 각처에 위민이 날로 거칠어지고 騷訛가 날로 심해졌으므로 그 지역에 삼남 都宣撫使를 특파하여 우선 위민을 효유·귀화시키되, 그들의 귀화가 불가능한 경우 후속적으로 파견되는 군대로써 탄압한다는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의 양면정책을 건의한 것이다. 이것은 9월 3일 이후 군국기무처 의원들이 동학의병과 적대적인 긴장관계에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군국기무처의 동학 위민 진무방안에 대해 국왕의 재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정부측의 준비 부족으로 이 방책은 곧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국기무처는 9월 23일에 이르러 동학 위민에 대해 ‘恩威兼行’토록 하되, 구체적으로는 의정부로 하여금 선탄압·후선유라는 우선순위로써 삼남의 위민을 진압할 것을 건의하면서 아울러 의정부·탁지아문·군무아문과 각 영으로 하여금 이에 필요한 구체적인 動兵조치를 서두를 것을 촉구하였다.

이 의안이 채택되고 이에 대해 국왕의 윤허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위민에 대해 효과적인 진압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10월초에 이르러서는 동학 ‘匪徒’가 경기도 竹山·安城 등지에까지 출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놀란 군국기무처는 10월 7일에 이 지방에 유능한 지방관을 파선하여 그로 하여금 비도를 帶兵·剿捕케 하는 대책을 강구하였다. 아울러 羅州·淳昌·洪州·安義 등 4읍의 守宰가 중앙정부의 지원도 없이 그 지역의 ‘匪類’를 招訓하는 데 성공한 사례를 거론·장려하고 그 수재들에게 인근 각 읍의 비도를 剿撫하는 일까지 위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같이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0월 7일 이후 동학 위민을 비도 혹은 비류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해 剿討 위주의 탄압책으로 임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의안은 군국기무처의 거의 마지막 회의일인 10월 17일에도 되풀이 거론·채택되고 있었다.

이상으로써 군국기무처 의안 가운데 민중, 특히 동학 위민·비도의 움직임에 관련된 의안들을 살펴보았다.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애당초 대대적인 정치·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대다수 민중의 지지와 호응을 획득할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상외로 9월초부터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반일·반개화의 슬로건을 내세운 동학농민의 의병전쟁이 전개되자 이에 당황한 의원들은 동학의병을 위민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해 일면 회유·일면 탄압의 ‘恩威兼行’ 정책을 택하기로 결의하였다가 급기야 의병의 기세가 치열해진 9월말에 이르러서 선탄압·후선유책으로 대처하려 하였다. 그후 10월초에 이르러 동학의병의 기세가 더욱 높아져 그들이 경기도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군국기무처는 동학 위민을 비도·비류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해 무력으로 탄압할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정부가 10월 19일에 兩湖巡撫營을 설치하고 申正熙를 道巡撫使에 임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군국기무처의 동학의병 진압책이 발의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정부군은 일본으로부터 특파된 ‘동학당정토군’과 합세하여 11월 9일부터 본격적인 동학의병 진압전쟁에 돌입함으로써 근대사상 초유의 외세를 낀 대규모 동족상잔이 빚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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