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1. 제1차 개혁
  • 3) 제1차 개혁의 내용
  • (3) 정치·행정제도의 개혁

(3) 정치·행정제도의 개혁

군국기무처 관제안의 거의 전부와 의정안의 약 ⅓에 해당하는 50여 건은 조선왕조의 정치·행정제도 개혁에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제1차 갑오경장의 중점은 바로 이 정치·행정제도의 개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군국기무처는 7월 30일에 “本朝의 成憲을 謹稽하고 각국의 通例를 參互하여”412)≪高宗實錄≫및≪日省錄≫, 고종 30년 6월 28일. 궁내부관제와 의정부 및 8아문의 관제를 제정하고, 이어서 이에 부수하는 각종 장정과 의안을 의결함으로써 새로운 정치·행정체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그런데≪經國大典≫에 기초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통치체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 최고정무기관인 의정부와 행정기관인 6조가 있어서 정책결정 및 통치기능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통치·행정기구는 봉건적 家産국가의 유제로서 근대국가의 조직으로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불합리성 내지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국왕 및 왕족의 奉戴·扶持를 목적으로 하는 궁중부서가 東班 京官職의 4할을 차지할 정도로 비대하며, 또 이들에 관한 행정업무가 일반 대민행정과 분리되어 있지 않아 행정이 비효율적이었다.413)千寬宇,<甲午更張과 近代化>(≪思想界≫2-9, 1954), 24쪽.

둘째, 국왕에 대한 자문 내지 諫諍을 하는 기관인 言官 三司(홍문관·사헌부·사간원), 국왕의 製撰·記錄·修學 등을 담당하는 학술·교육기관(홍문관·춘추관·성균관·경연), 行刑을 담당한 三法司(의금부·형조·한성부), 재정을 담당한 호조와 선혜청, 그리고 군사행정기관인 병조·훈련원·선전관청 등이 국왕의 직속기관으로 병립하여 상호간에 상하 명령체계가 불분명하고 또 각부서간의 소관사항이 중복되어 비능률적인 폐단이 있었다.414)金雲泰,≪朝鮮王朝行政史:近世篇≫(一潮閣, 1981), 65∼114·222∼240쪽. 특히 왕조 초창기부터 의정부의 기능이 약했기 때문에 임금이 유약하거나 무능한 경우 중앙관료기구들이 경쟁적으로 난립하여 통치와 행정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었다.

셋째, 六曹直啓制를 택한 조선왕조에서는 실제로 대민행정을 6조가 분장하고 있었는데, 이 6조는 점차로 복잡·다기해진 근대국가의 다양한 업무를 관장·처리하기에는 그 기구가 부족·부적합하였다. 따라서 1881년 이후 조선정부는 각종의 근대적 기구, 예컨대 統理機務衙門(1881), 統理軍國事務衙門과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1882), 博文局(1883), 轉運署(1883), 機器局(1883), 濟衆院(1885), 內務府(1885)와 그 산하의 典圜局(1885), 商理局(1886), 種牧局(1886), 育英公院(1886), 電郵總局(1887), 鑛務局(1887) 등을 무원칙·임기응변적으로 첨설하여 환경변화에 응급 대처하고 있었다. 이 역시 행정의 무질서와 비능률성을 더욱 심화시켰다.415)이들 기구에 관해서는 다음이 참고된다.
全海宗,<統理機務衙門 設置의 經緯에 대하여>(≪歷史學報≫17·18합집, 1962).
Young Ick Lew, “An Analysis of the Reform Documents of the Kabo Reform Movement, 1894”, Journal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No. 40, 1974.
李光麟,<統理機務衙門의 組織과 機能>(≪學術院論文集(人文·社會科學篇)≫26, 1987).
田美蘭,<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關한 硏究>(≪梨大史苑≫24·25합집, 1990).
韓哲昊,<統理軍國事務衙門(1882∼1884)의 組織과 運營>(≪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下, 一潮閣, 1994).
―――,<閔氏戚族政權期(1885∼1894) 內務府의 組織과 機能>(≪韓國史硏究≫90, 1995).
―――,<閔氏戚族政權期(1885∼1894) 內務府 官僚 硏究>(≪아시아문화≫12, 1996>).
殷丁泰,<高宗親政 이후 政治体制 改革과 政治勢力의 動向>(≪韓國史論≫40, 서울대 국사학과, 1998).

군국기무처는 종래의 통치·행정제도에 일대 개혁의 메스를 가하여 중앙의 모든 정치·행정기구를 궁내부-의정부-8아문체제로 재정비하되, 잡다한 궁중부서를 신설된 궁내부 산하로 통합하여 의정부와 분리시키고, 의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킨 다음 그 산하의 6조를 8아문으로 늘리고 이들 아문에 행정권을 배분하였다. 따라서 종래의 언관삼사, 삼법사,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경연 등 기관은 폐지 내지 개편되었다. 그리고 1881년 이후 남설된 여러 근대적 기구는 8아문의 하나 혹은 그 예하의 국으로 개편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중앙통치·행정조직은 1885년 이후 천황제하의 일본 궁내부-내각 중심 체제와 유사하게 변혁된 것이다.

군국기무처는 이렇게 의정부와 8아문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반면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고 동시에 臣民의 對정부 권한도 감소시킴으로써 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행정체제 수립을 기도한 셈이다.

첫째, 왕권을 제약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오늘의 事勢를 돌아 보건대 대군주 폐하가 백관을 親率하고 날마다 外殿에 나아가 萬機를 親裁한 연후에 王政을 들 수 있고 朝著를 맑게 할 수 있다”라 하여 국왕이 매일 외전에 나와 대신들과 더불어 친재할 것을 의결함으로써 일단 군주제를 옹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국왕이 적극적으로 정무처리에 앞장설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군국기무처는 국왕의 전제군주로서의 고유권한을 잠식·제약하고 있었다. 우선 일본식 궁내부제도를 도입하여 궁중의 잡다한 기구를 궁내부 산하의 府(宗正府·宗伯府)·院·司·署·殿·宮 등으로 개편하여 체계화·간소화하였다. 또 이들 궁내부 소속 관원의 수를 감축하는 한편 “궁내부의 대소 관원은 各府衙門官을 겸할 수 없으며 각부아문의 대소 관원도 궁내부관을 겸할 수 없을 것”이라 하여 궁중 및 부중 관리간의 상호겸직을 금함으로써 궁내부와 의정부의 사무를 분리하였다.

다음으로 국왕의 전통적인 인사권·재정권·군사권 등을 박탈하거나 축소시켰다. 구체적으로<文官授任式>을 제정하여 勅任官(2품) 이상의 관리는 총리대신, 각 아문대신, (의정부)贊成 및 都憲의 추천에 따라 국왕이 임명하되, 칙임관(3∼6품), 判任官(7∼9품)의 임명은 총리대신 및 각 아문대신의 재량에 맡김으로써 종래 국왕이 행사했던 인사권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였다. “궁내부 각 사의 종전 應入錢穀을 度支衙門이 전관하고 그 一切應用을 탁지아문이 酌發한다”라는 원칙 아래 종래 각 궁이 가지고 있던 田畓·堤堰·柴場 등으로부터의 수세권을 탁지아문이 인수하였다. 또 종래의 外方進供之規를 혁파하여 어용물품은 필요에 따라 탁지아문이 궁중에 별설한 進供會社를 통하여 조달케 하고, 왕실의 전매품이었던 홍삼에 관한 사무를 탁지아문이 관장토록 함으로써 종래 국왕 및 궁중이 향유하던 재정권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종래 국왕의 動兵權을 상징하던 宣傳官廳을 폐지하고 그 대신 신설된 軍務衙門으로 하여금 모든 군사행정을 통할케 함으로써 국왕의 군사 통제권도 약화시켰다. 또 나아가 承政院을 폐지하고 그 대신 궁내부 내에 承宣院을 신설하여 이를 의정부의 산하기구로 격하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의안은 아마도 국왕의 반대로 인하여 10월 19일 회의에서 취소되었다.

이렇게 갑오경장을 통해 군권이 침식된 결과 전제군주였던 국왕은 이제 사실상 입헌군주제하에서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왕과 같이 그 지위와 권한이 약화되었다. 이렇게 허약해진 조선의 국왕 고종은 외국인의 눈에 ‘유급 자동인형(salaried automaton)’416)Isabella B.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Seoul:Yonsei University Press, 1970;초판, 1898), p.261.으로 비춰지기까지 하였다.

둘째, 군국기무처는 종래 유명무실했던 의정부를 중앙통치의 중추기구로 만들고, 의정부 및 그 산하 8아문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우선 의정부의 기능을 ‘總百官 平庶政 經邦國’이라고 규정하고, 그 밑에 군국기무처·都察院·會計審査局, 銓考局·중추원·기로소 등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 혹은 도태된 曾經顯職 관리의 우대기구를 직속시킴으로써 이를 중앙의 최고 관부로 격상시켰다.

앞에서 논급한 군국기무처와 의정부 관할하에 놓이게 된 기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찰원은 종래 사헌부의 기능과 유사한 기능을 담당한 부서로서, “내외 백관의 臧否·功過를 규찰하여 정부에 告明하고 상벌을 公行”하는 일이 그 주요 직무였다. 그러나 도찰원의 都憲(총 5명)은 칙임관(종2품 이상의 관리) 임명시에 총리대신·각 아문대신과 더불어 그 후보자를 추천할 권한이 있고, 會計審査局과 紀功局(혹칭 忠勳局)을 관할하는 권한이 있으며, 또 법무아문에서 새로이 제정하는 律例의 초고를 그것이 군국기무처에 제출되기 전에 검토·평론하는 권한, 그리고 사직·獻策 이외의 목적으로 쓰여진 상소문을 그것이 국왕에게 봉정되기 전에 미리 심사하여 그 내용의 사실 부합 여부를 판별·확인하는 권한 등을 갖고 있었다.

둘째, 중추원(혹칭 散班院)은 ‘文武蔭資憲 이상 無實職人’으로서 更張으로 인하여 산질된 자를 수용하여 “顧問에 對備”하고 “酌量 給俸하여 후일의 取用을 기다리게 하거나 혹은 달리 區處”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된 기구로서 도태될 고관들의 관직대기소 내지 자문기관이었다.

셋째, 전고국은 “관리 이력 및 實學의 薦書를 관장한다” 혹은 “각 府衙에서 보낸 바 選擧人의 考試를 관장한다”라 하여 과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새로운 방식으로 관리임용시험을 주관하게 된 기구였다.417)≪韓末近代法令資料集≫1, 4∼6쪽.

의정부와 더불어 그 중요성이 높아진 8아문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직권이 분수되었다.

內務衙門:지방인민의 制治事務 總管

外務衙門:交涉通商事務와 公使·領事 等官의 감독 관장

度支衙門:전국 재정의 量計·출납과 조세·국채 및 화폐 등 일체 事宜의 總轄, 각 지방재무 감독

法務衙門:사법·행정경찰·赦宥 관리, 고등법원 이하 각 지방재판 감독

學務衙門:국내 교육·學務 등의 행정 관장

工務衙門:국내 일체의 工作·營繕사무 관장

軍務衙門:전국 육해군정 統割, 군인·군속 감독, 管內 諸部 관장

農商衙門:농업·상무·예술·漁獵·種牧·광산·지질 및 영업회사 등의 일체 사무 관장(≪韓末近代法令資料集≫1, 6∼13쪽).

군국기무처는 이렇게 중앙의 의정부와 8아문에 실권을 집중시킨 다음 이들 기구의 원활한 운용을 위하여 근대적인 일본식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때 시도된 관료제 개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科文取士는 朝家의 定制에 관계되어서 虛文으로써는 어려우므로 實才를 수용하는 科擧法을 上裁를 거쳐 변통한 뒤 選擧條例를 특별히 정할 것”이라 하여 유서깊은 과거제도를 폐지한 다음 문관의 임용을 위해<選擧條例>를, 그리고 무관의 선용을 위해서는<武官條例>를 제정토록 하였다.418)≪韓末近代法令資料集≫1, 33∼34쪽. 또한 종래 관리의 임용과정에서 강조되었던 署經과 親避之規 등의 절차를 폐지하였다.

둘째로, 종래 18등급으로 나뉘어졌던 관등 품계를 12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또 일본식의 칙임관·주임관·판임관 등으로 3분하였다. 그리고 각 관등에 상응하는 官秩과 月俸을 정하였다.

셋째로,<官員服務紀律>과<官員懲戒例>등 관리의 엄격한 공무집행 및 관기확립을 기하는 관제를 제정하고,419)≪韓末近代法令資料集≫1, 56∼59쪽. 관리와 兵弁은 간편한 제복(公服)을 착용토록 정하며, 또 公文式 용지의 양식을 통일하는 등 근대 서양과 일본에서 통용된 능률적인 행정처리양식을 도입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군국기무처는 중앙집권화와 행정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정부와 8아문을 중앙정부의 실질적인 집권기구이자 제도개혁의 추진기구로 만들었던 것이다. 군국기무처가 단행한 파격적인 정치·행정제도의 개혁에 따라 국왕의 권한은 약화된 반면 총리대신·각 아문 대신·찬성·도헌 등의 권한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갑오경장 당시 군국기무처의 총재 및 의원들이 이러한 중직들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이 같은 제도개혁을 연관시켜 살펴볼 때, 군국기무처가 실시한 정치·행정제도상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군국기무처 의원 자신들의 권한 확대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갑오경장 때 채택된 관제안과 의안 등에는 총리대신과 각 아문 대신, 찬성과 도헌, 내무대신과 경무사 등 사이의 명령체계 내지 상하관계를 명시한 규정이 없었다. 각 아문대신·將臣·경무사가 군국기무처 의원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하는 의안이 채택되었고, 또 칙임관 및 지방관을 임명함에 있어 총리대신이 각 아문대신·찬성 및 도헌과 협의하여 公擧토록 한 규정이 만들어진 점으로 미루어 갑오경장 기간에 집권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일종의 집단지도제를 유지·지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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