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1. 제1차 개혁
  • 3) 제1차 개혁의 내용
  • (5) 경제제도의 개혁

(5) 경제제도의 개혁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여러 가지 개혁 중 아마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경제제도의 개혁이었을 것이다. 갑오경장 초기 정부의 재정은 전정·군정·환곡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말미암아 궁핍하였을 뿐 아니라 개항 이후 무역을 통한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침탈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개항에 따른 각종 비용과 근대적 문물의 수용 및 제도개편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취약한 전근대적 재정구조의 체질을 개선하고 ‘편민이국’·‘부국강병’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작업이 아니었다.

우선 군국기무처는 종래의 복잡한 재정기구를 度支衙門으로 일원화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신설된 탁지아문이 “전국 재정의 量計·출납과 조세·국채 및 화폐 등 일절 事宜를 總轄하고 각 지방 재무를 감독하는” 권한을 갖도록 함과 아울러 宮內府·宗伯府·宗親府에 소속된 “각 사의 종전 應入錢穀은 탁지아문으로 하여금 전관케 하며 일체의 應用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酌發케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을 일원화하였던 것이다.

이어 “아직 上下되지 않은 各 貢價의 實數를 査明, 탁지아문 國債局에 부하여 限年 배급케 할 것”과 “國舅房의 祭需價米는 이미 탁지아문에서의 예에 의하여 상하하고 있으므로 종전의 太常寺에서 享品을 封送하던 것을 영구히 정지할 것”, 그리고 “궁내부에 進供會社를 別置하여 종전의 어용물품을 수용 진배하되 매월 말에 시가에 따라 核算 出給할 것” 등의 의안을 결의하여 탁지아문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재정을 운영하였던 왕실의 재정권을 모두 부정하였다. 또한 “紅蔘 一款은 탁지아문으로 永付하되 條規를 另定할 것”, “前 鑛務監理 李容翊을 監理로 還差하여 咸鏡道 鑛務를 董督케 하되 징수한 세금은 3개월마다 공무아문으로 呈寄하여 탁지아문으로 전부토록 할 것”, 그리고 “外方進貢의 規는 일체 혁파하되 각 지방에서 應貢해야 할 物價를 탁지아문에서 妥籌 收入, 궁내부로 이송하여 貿辦 進排할 것” 등의 의안을 채택함으로써 홍삼·금광·외방진공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탁지아문으로 이관해 버렸다. 이 같은 국왕 및 왕실의 독립적인 재정운영권 박탈조치로 말미암아 군주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 결과 국왕은 궁내부 산하의 진공회사로부터 화폐로 월봉을 지급받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경제 및 재정제도를 재편하기에 앞서 군국기무처는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의 재정실태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각 司의 錢穀과 未捧數, 各 宮·司·營의 䆃掌田畓·堤堰·柴場 및 收稅各目, 그리고 각 도 상납 가운데 官逋·吏逋, 轉運署 설치 후 三南稅米의 봉납 여부 등을 조사·보고토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와 아울러 “아직 上下하지 않은 각 관리 祿料의 實數를 査明, 탁지아문 國債局에 부하여 限年 배급케 할 것”이라 하여 탁지아문으로 하여금 산하의 국채국을 통해 관리의 월봉 지급문제와 각종 부채를 청산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군국기무처는 “일체의 상납하는 대소 米太·木布는 모두 代錢으로 마련하고 은행을 설립, 公錢을 획급하여 미곡을 貿遷케 함으로써 근본을 넉넉하게 하며 原錢을 定期를 어기지 말고 탁지아문으로 상납하되 代錢을 다시 상세히 酌量할 것”이라 하여, 金納制의 실시와 함께 근대적 은행제도 설립을 서둘렀다. 좀더 구체적으로, 종래의 물납세를 금납제로 고친 다음 은행을 설립하여 농민들의 생산물을 화폐와 교환케 하고, 그 자본을 정부의 공금에서 제공하고 업무의 진행에 따라 탁지아문이 원금을 회수하려 했다. 그러나 미곡 무역행위가 은행 본래의 기능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국기무처는 결국 금납제 업무를 맡아 볼 米商會社를 농상아문의 주도아래 급히 설치하도록 조처하기에 이르렀다.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경제제도 개혁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은본위제에 입각한 근대적 화폐제도의 수립이었다. 8월 11일에 군국기무처는 “신식화폐와 구화폐의 兌換法에 관한 조례를 제정할 것”을 의결하는 동시에<新式貨幣章程>을 발포하였다. 이 장정에 의하면, 신식화폐는 1냥 및 5냥 銀, 2錢 5分 白銅, 5분 적동, 1분 황동 등 4종 5등급으로 나누며, 5냥 은을 본위화로 하고 그 나머지를 보조화로 삼았다.

<신식화폐장정>의 초안은 1891년에 이미 안경수를 위시한 개화파관료들이 공포한 바 있는<신식화폐조례>였다. 그러나 이 조례는 화폐제조권을 일본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한 청국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신식화폐장정>중 “신식화폐를 많이 주조하기에 앞서 잠시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다. 다만, 본국화폐와 同質·同量·同價인 것만 통행을 허한다”는 제7조는<신식화폐조례>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규정이었다. 이 조항에서 논급된 외국화폐가 다름 아닌 일본화폐였고, 신식화폐는 실제로 충분히 주조되지 못하여 그 절대량이 부족하였다.422)元裕漢,<典圜局攷>(≪歷史學報≫27, 1968), 83쪽.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이 화폐개혁은 일본화폐가 조선내에 광범위하게 침투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조·일 양국간의 화폐제도를 통일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경제를 일본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예속시키는 데 기여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화폐개혁은 갑오경장 중 일본측이 확보했던 중요한 경제적 이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화폐제도의 개혁과 아울러 군국기무처는 度量衡의 전국적인 통일을 도모하였다. 종전에 工曹 관할사항이었던 도량형에 관한 업무를 내무아문으로 이관하고, “내무아문에서 新式丈尺·斗斛·秤衡을 頒發, 힘써 획일케 함으로써 문란의 폐를 막을 것”을 의결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추진된 군국기무처의 경제제도 개혁은 거시적으로 볼 때 그다지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즉, 군국기무처는 토지소유권의 재분배 또한 양전에 기초한 지세체제의 근본적 개편 따위는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지세가 면제되었거나 가벼웠던 궁방토 내지 역둔토 등에 지세를 약간 더 부과하는 조치를 취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또한 갑오경장 벽두에 驛遞局·전신국·철도국·광산국·燈樁局·건축국 등으로 구성된 공무아문과 農桑局·공상국·산림국·獎勵局 등을 구비한 농상무아문을 신설함으로써 근대적 상공업을 일으킬 의욕을 드러냈지만 본격적인 산업화에 필요한 의안을 입안·제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또한 개혁 추진에 필요한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국내의 자본을 발굴·활용하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계획을 논의했으나 이것마저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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