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2. 제2차 개혁
  • 1) 제2차 개혁의 배경
  • (1) 항일운동의 탄압

(1) 항일운동의 탄압

주한미국공사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한 이노우에공사는 청일전쟁 발발 후 혼란에 빠져 있던 조선정부에 대해 내정개혁이란 명목하에 고압적인 간섭을 시도했다. 이노우에공사가 1894년 10월말부터 1895년 4월초까지 서울에서 펼쳤던 對韓 간섭정치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방해가 되는 조선민중의 항일운동을 억압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정개혁의 미명하에 일본정부의 조선 보호국화 정책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이노우에공사는 그의 부임 전에 호남과 호서에서 궐기한 항일동학의병을 진압하고, 대원군과 이준용 등이 청일개전 후부터 서울에서 비밀리에 추진해 온 일련의 반일 정치음모를 적발·처리하는 것을 초미의 급무로 삼았다.

원래 1894년 5월초에 全琫準·金開南 등 동학 南接의 지도하에 봉기했던 제1차 동학농민군은 6월 11일의 전주화약을 계기로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10월 중순에 그들은 일본의 명분없는 침략을 묵과할 수 없어 ‘忠君愛國之心’으로써 義旅(의병)를 조직하여 다시 궐기하였던 것이다.441)國史編纂委員會 編,≪東學亂記錄≫下(1959), 529쪽.
信夫淸三郞 著, 藤村道生 校訂,≪(增補)日淸戰爭≫(東京:南窓社, 1970), 20쪽.
韓㳓劤,≪東學과 農民蜂起≫(一潮閣, 1983), 143∼144쪽.
이 때 동학교문의 정통세력인 崔時亨·孫秉熙 등 北接도 항일전열에 가세함으로써 11월초 論山에는 남·북접군을 합친 동학농민군 10만 명이 결집되어 서울진공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이래 최대규모의 항일의병으로서, 당시 요동·산동반도에서 청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중대한 위협세력임에 틀림없었다.

이노우에공사가 부임하기 전부터 이미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위험시해 왔던 일본의 대본영은 그의 부임과 동시에 동학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이 목적을 위해 10월말에 後備步兵 제19대대를 출동시켰다. 이 ‘東學黨征討軍’은 그전에 이미 파견되어 있던 군대와 합세함과 동시에 조선정부에서 10월 19일에 발족시킨 兩湖巡撫營 휘하의 관군 3천 2백여 명의 지원을 받아 동학의병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전을 벌이게 되었다.442)李瑄根,≪韓國史:現代篇≫(乙酉文化社, 1963), 365∼367쪽.
金正明 編,≪朝鮮駐箚軍歷史≫(東京:巖南堂, 1967), 19쪽.
具良根,<東學農民軍の第二次蜂起と日本軍の部署>(≪新韓學報≫18, 1976), 96∼107쪽 등 참조.

무쓰외무대신은 동학의병의 군사활동이 일본의 대청 전쟁수행에 중대한 차질을 가져올 수 있는 위협 요소임을 간파하고, 10월 31일자로 이노우에공사에게 동학의병의 조기진압을 지령하였다. 이노우에공사는 일본군이 무단히 조선에서 군사활동을 펼칠 경우 관계 열강이 간섭할 것을 우려하여, 우선 동학의병의 움직임을 예의 관찰하면서 조선정부측에서 먼저 자기에게 동학의병의 진압을 요청해 올 것을 기다렸다. 때마침 동학의병이 論山에서 북진을 개시한 다음날인 11월 8일에 조선정부의 총리대신 김홍집, 외무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 등 3대신이 일본공사관을 찾아와 이노우에에게 일본군으로써 동학농민군을 진압해 줄 것을 의뢰했다.443)≪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477, 53∼57쪽;문서번호 495, 134∼135쪽. 이노우에공사는 이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 다음날부터 일본군 남부병참사령관 이토오 스케요시(伊藤祐義) 중좌를 독려하여 동학의병 진압작전을 개시하였다.

일본군과 조선의 관군으로 구성된 東學征討軍은 한편으로는 水原·龍仁·可興 등지로부터 3로로 나누어서 南原을 향하여 일제히 진격함으로써 동학의병이 동북방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해군의 츠쿠바(筑波)艦 등을 출동시켜 남해를 초계하면서 조선의 左水營軍과 합동하여 동학의병이 남해 도서로 도망하는 길을 차단·봉쇄하였다. 다시 말하면, 동학정토군은 동학의병을 호남과 호서내에 압축·포위하여 일망타진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측의 조직적 공격을 받은 동학의병은 11월 18∼19일간의 木川 細城山전투와 11월 22일부터 12월 7일까지 公州부근의 전투 등에서 일본군 및 관군의 연합군에게 연패한 끝에 결국 퇴산하고 말았다. 牛金峙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의 고배를 마신 동학의병의 총수 전봉준은 잠시 淳昌으로 후퇴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차 12월 24일 그곳 토착인의 밀고로 생포되었다. 한편 12월 24일에 泰仁에서 관군에 의해 체포된 김개남은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거치지도 않은 채 처형되었다. 이처럼 동학의병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호남·호서지역 동학의병의 항일전쟁은 중지되었다. 조선정부는 1895년 1월 22일을 기해 巡撫營을 철파함으로써 4개월만에 동학의병에 대한 진압작전을 일단락지었다.

이노우에공사가 총지휘한 이 ‘동학토벌’작전이야말로 일본이 청일전쟁 중에 조선에서 벌인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일본군은-야마가타가 1897년 모스크바회담에서 인정한 바와 같이-수천 명의 애국적인 동학농민군을 살상함으로써 한국 민중의 깊은 원한을 샀다.444)≪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488, 833쪽.
李瑄根, 앞의 책, 379∼381쪽.

부임 직후 이노우에공사가 다룬 두 번째 급무는 불과 3개월 전에 오오토리공사가 ‘섭정’직에 앉혀 놓은 대원군과 그의 애손 이준용 등 반일세력을 중앙정계에서 거세하는 것이었다. 1894년 7월 23일에 일본공사관측의 집요한 설득에 말려 대권을 잡게 된 대원군은 입궐 직후 그가 오랫동안 구상해 온 내정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민씨척족정권하에서 장기간 권력을 남용했던 驪興 閔氏 척족계의 고관들 내지 그 추종세력을 貪贓罪 등 명목으로 奪職·囚禁하거나 유배시키고, 일보 더 나아가 민비의 廢庶 조치를 서둘렀다. 이때 그는 ‘昏君’ 고종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이준용을 新王으로 봉대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본공사관측에서는-아마도 미·러 양국의 간섭을 우려한 나머지-대원군의 민비폐서안에 동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원군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개시하였고, 또 군국기무처라는 개혁입법기구를 조직하여 대원군의 의사에 반하는 급진적 제도개혁안을 채택함으로써 그를 격분시켰다. 한마디로, 대원군은 집권한 지 1주일도 채 못되어 자신의 집권을 후원한 일본공사관과 構隔하였으며 비밀리에 일본군을 조선으로부터 축출하면서 친일개혁파 관료들을 제거하려는 일련의 항일 음모를 획책하게 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대원군은 표면상 친일을 가장하면서 음으로는 이준용 및 이준용의 黨與인 李泰容·朴準陽 등을 앞세워 평양에 진출한 청군과 내통하여 그들의 대남작전을 재촉하고, 삼남의 儒林 거족 및 동학접주들과 접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의병을 규합·북진하여 청군과 더불어 일본군을 挾擊하도록 독려하며, 서울에서는 친일정권에 가담한 金弘集·金鶴羽·金嘉鎭·趙羲淵·兪吉濬 등 친일 개혁파관료를 암살하려는 등 세 갈래의 상호연관된 반일 음모를 은밀히 추진하였던 것이다.

대원군∼이준용의 항일 전략은 임진왜란 때 명군과 조선의병이 공동으로 왜병을 구축했던 역사적 선례에 따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원군이 추진했던 제1의 음모는 청군이 9월 중순의 평양전에서 일본군에게 참패당함으로써 좌절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 평양에 입성한 일본군이 입수한 대원군이 淸將에게 보낸 비밀간찰은 나중에 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 단서로 활용되었다.445)≪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68, 104쪽.

그의 제2 음모는 지방유림들이 그의 요구에 즉각 호응하지 않은 데다가 (제2차) 동학농민군(의병)의 조직·발동이 기대보다 늦었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대로 청군과 항일협격전을 벌이지 못한 채 동학정토군에게 패배당하였다.446)≪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68, 404쪽.

그의 제3 음모는 이준용이 모은 자객 崔亨植·崔亨順 등이 10월 30일에 군국기무처 의원 겸 법무협판인 金鶴羽를 암살하는 데 그쳤다.447)≪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68, 405∼407쪽. 요컨대, 대원군∼이준용 등이 획책했던 일련의 항일음모는 이노우에공사의 서울 부임 전에 거의 다 수포로 돌아갔다.448)Young I. Lew, “Korean-Japanese Politics behind the Kabo-Ǔlmi Reform Movement, 1894 to 1896,”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3(1981), pp.62∼69.

이노우에공사는 부임 전에 이미 대원군의 항일 음모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김학우암살사건 수사를 핑계로 대원군의 음모를 철저히 내사하는 한편 大本營으로부터 대원군이 淸將앞으로 보낸 밀서의 원본도 송부받았다. 이노우에공사는 11월 8일 김홍집 등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 밀서를 증거물로 내보이며 대원군의 하야를 촉구하였다. 처음에는 이노우에공사에게 그의 항일 음모 사실을 부인하던 대원군도 밀서를 직접 본 다음에는 이를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그는 11월 18일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어서 이노우에공사는 11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7월 23일 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섭정권의 취소를 요구하여 국왕의 응락을 받아냄으로써 대원군을 완전히 거세하였다. 이준용도 11월 13일에 이노우에가 추궁한 동학군 선동·조종혐의를 부분적으로 시인한 다음 내무협판직을 사퇴함으로써 정계에서 물러났다.449)≪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480, 75∼76쪽;문서번호 481, 91쪽;문서번호 477, 60쪽;문서번호 478, 61쪽.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61, 384∼385쪽.
≪高宗實錄≫, 고종 31년 11월 21일.

이렇듯 이노우에공사는 부임 초에 일본의 조선침략, 특히 보호국화정책에 장애물이었던 대원군과 그를 둘러싼 一團의 반일정치인을 중앙정치무대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후 대원군은 복권된 고종·민비에 의해 다시 연금되었다. 이준용과 그의 동지인 군국기무처 의원 박준양·이태용 등 23명은 (고종·민비와 결탁한) 박영효· 서광범 등 친일집권파에 의하여 김학우암살사건 등 테러음모사건에 연류되었다는 죄목으로 1895년 4월 18일 체포·구금되었다가 5월 13일에 열린 특별법원의 재판을 거쳐 모반죄 혹은 모살죄 등 죄목으로 사형·종신유형·流 15년 내지 流 10년 등 중형에 처해짐으로써 집단적으로 숙청되었다.450)≪日本外交文書≫ 27-1, 문서번호 228, 346쪽. 이준용, 이태용 그리고 박준양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준용은 주한 각국외교단의 항의에 몰린 井上공사의 제청이 있은 후 5월 14일附 왕명으로 流 10년으로 감형되었다. 한마디로, 이노우에공사는 청일전쟁 중에 서울에서 형성된 대원군·이준용 중심의 항일 정치세력을 직접 나서거나 조선인 정파간의 알력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거세·숙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