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2. 제2차 개혁
  • 2) 제2차 개혁의 추진세력

2) 제2차 개혁의 추진세력

1894년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朴泳孝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그 동안 품어왔던 개혁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 점령한 다음 일본정부는 조선의 새 정권에 친일파 관료들을 부식할 목적으로 박영효 등의 귀국을 서둘렀다. 박영효는 李圭完·柳赫魯·鄭蘭敎 등 5명의 측근과 2명의 일본인 경찰을 대동하고 釜山을 거쳐 8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입경한 그는 일본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9월 3일과 4일 양일에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단행할 수 있는 전권을 자신에게 부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의 이러한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서울 정가의 분위기가 갑신정변에 관련된 인사들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정치세력은 대체로 박영효를 사형에 처해야 마땅할 역적으로 간주했으며, 미국 및 러시아 외교관들도 박영효를 살인자로 규정하고 그를 옹호하는 일본측의 처사에 세차게 항의하고 있었던 것이다.470)≪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46, 660∼661 및 664∼665쪽. 9월 초순 박영효는 이러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대하면서 부득이 濟物浦(인천)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중순 일본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자 조선정계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조선국민들은 이제 일본을 조선의 미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한 대일인식의 변화는 조선을 자국의 보호국으로 약취하려는 일본정부의 결정에 유리하게 반영되었다. 앞에서 논급하였듯이, 일본정부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노우에를 조선공사에 임명했다. 부임 당시 이노우에공사는 박영효를 중심으로 조선에 강력한 친일내각을 구성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었는데, 이 정략은 일본과 마찰을 빚지 않으려는 고종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471)≪世外井上公傳≫4, 430·432쪽.

그리하여 마침내 12월 9일 국왕 고종은 前 錦陵尉 박영효의 직첩을 환수함과 동시에 蕩滌敍用하며, 갑신정변 관련 죄인들을 모두 사면·석방하고 부자관계로 연좌되었던 故 홍순목·박원양·서상익 등을 복작시킨다는 전교를 발포하였다.472)≪官報≫, 개국 503년 11월 13일. 이로써 박영효와 이미 귀국한 서광범·이규완·정난교 등은 모두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받든 소위 ‘제2차 김홍집내각’이 발족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내무대신, 서광범은 법무대신으로 각각 발탁되었다. 이 내각은 박영효를 위시한 갑신파 이외에 김홍집과 박정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른 두 정파인 갑오파와 정동파로 구성되었다. 먼저 김홍집을 비롯한 갑오파는 일반적으로 친일적인 성향이 강한 세력으로서 대원군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편 박정양을 중심으로 하는 정동파는 친서구(미·러)파로서 국왕 고종을 받드는 근왕주의적 세력이었다. 내각 구성원 중에서 갑신정변과 관련된 이른바 갑신파는 박영효와 서광범 뿐이었다. 이노우에의 치밀한 분할통치 정략에 따라 꾸며진 이 새로운 정치구도에서 갑신파는 다른 두 정파 사이에 介在하여 운신하도록 기대되었다.

일본의 후원으로 내무대신이 된 박영효는 왕실의 至親으로서 국왕 및 왕비 등 궁정세력의 조종역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 박영효는 국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한 데다가 전국에 걸쳐 동학농민군이 재기할 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의존하였으며, 또한 왕실과도 긴밀한 유대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공사와 왕실 양쪽에서 신뢰를 받게 된 박영효는 동학의병과 그 관련세력을 진압하는 데 앞장섬과473)黃玹,≪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1971), 173쪽.
≪世外井上公傳≫4, 467쪽.
동시에 일본지향의 개혁을 추진하는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474)田保橋潔,<朝鮮に於ける政治的改革>(≪近代朝鮮史硏究≫1, 朝鮮總督府, 1944), 147∼149쪽.

그러나 1895년 초부터 박영효는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정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선 李圭完을 경무청의 경무관에, 申應熙·柳赫魯·鄭蘭敎를 훈련대 제1대대 대대장, 군부 포공국 부관, 군부대신관방 부관에 각각 임명하는 등 군대와 경찰의 요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다.475)李瑄根, 앞의 책, 330∼331쪽. 이어서 그는 지방행정기구의 요직에 자신이 천거한 인물들을 임명함으로써 지방정부를 장악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박영효는 심중에 김홍집을 개혁정부에 부적합한 인물로 얕잡아 보고 자신이 총리대신직을 차지하려 하였다. 갑오파와 갑신파는 慕華館·弘濟院의 철거 여부문제로 상호 대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군무대신 趙羲淵이 申泰休를 훈련대대장에 임명하려는 데 반발하여 박영효가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신태휴는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과 일본군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으며, 袁世凱의 고종폐위음모 계획에도 관여하였던 인물이다. 따라서 고종과 민비는 신태휴를 꺼려하여 박영효로 하여금 그의 임명을 저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각 총사퇴는 일본의 조선내정개혁이라는 명분 자체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노우에공사가 앞장서서 김홍집과 박영효의 타협을 주선하여 이를 철회시킴으로써 일단락지어 졌다.476)≪日本外交文書≫28-2, 문서번호 264(부속서 2), 390∼395쪽.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박영효의 이러한 시도는 이노우에공사로 하여금 그가 勢道를 누리려 한다고 판단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이노우에는 그를 견제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박영효는 일본측의 저의에 의심을 품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이권할양 요구에 맞서서 조선의 국익을 옹호·주창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895년 2월 하순 이노우에공사가 조선의 철도 및 전신선 부설사업을 독점하려는 교섭을 비밀리에 벌여오자 그는 이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3월 일본정부가 조선에 제공하기로 한 3백만 엔 차관의 대부조건이 가혹하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박영효는 5월 서울의 일본인 거류지를 확장하려는 일본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조선의 국익을 수호하려는 이러한 일련의 당돌한 행동들로 말미암아 박영효는 한때 서울 주재 미국공사로부터 ‘충심의 애국자(patriot at heart)’라는 평을 듣기에 이르렀다.477)≪尹致昊日記≫4, 48·54쪽.

박영효의 독립주의적인 拒日행동은 1895년 5월 하순에 절정에 다다랐다. 그는 이노우에공사의 충고를 무시한 채 고종을 설득해서 총리대신서리직을 차지한 다음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김홍집파의 군부대신 조희연을 경질시켰던 것이다. 이 무렵 박영효에게는 이렇게 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5월 4일 일본이 삼국간섭에 굴복한 후 조선에서 러시아와 미국의 영향력이 급상승하는 반면 일본의 지위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친미·친러의 입장을 견지해 온 고종과 민비는 머지 않아 그와의 정략적 제휴관계를 청산할 것이 뻔했다. 이 같은 곤경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박영효는 미리 정부의 최고 군사권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왕실측근세력이 획책할 지도 모를 음해에 대비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5월 17일 조희연의 공무상 비행들을 들추어 그를 군부대신직에서 축출하였으며 일보 더 나아가 조희연을 밀어주고 있었던 김홍집으로 하여금 총리직을 사임케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이노우에공사는 박영효를 설득하여 김홍집파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조절함으로써 내각의 붕괴를 막아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김홍집내각이 무너지면서 박영효 자신은 총리대신서리에, 그의 측근 李周會는 군부대신서리에 각각 임명되었다. 이제 박영효는 군부의 힘에 의존함으로써 일본공사의 압력을 벗어나 어느 정도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5월 17일에서 6월 2일 사이에 박영효를 핵심으로 하는 새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에는 총리대신 朴定陽을 포함하여 학부대신 李完用, 농상공부협판 李采淵, 회계원장 李夏榮 등 정동파 인물이 대거 등용되었다.478)韓哲昊,≪親美開化派硏究≫(국학자료원, 1998), 94∼101쪽. 그러나 실제로 박영효가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흔히 이 정부를 ‘박영효내각’이라 불렀다.479)杉村濬, 앞의 책, 136쪽. 이 점은 박영효내각 구성원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표 2>에 나타난 17명의 내각각료들 가운데 서광범·서재필·申箕善·尹致昊·신응희·이규완 등 6명은 갑신정변에 유관한 박영효의 측근들이며, 김윤식과 어윤중은 정변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박해를 받은 인물이었다. 또 이주회·禹範善 등은 박영효가 내무대신직에 오른 후 요직에 발탁된 박영효의 지지자들이다. 따라서 박영효는 군부를 포함한 내각 및 경찰기구의 핵심요직에 적어도 10명의 지지자들을 배치시켜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박영효의 우월한 입장은 정동파에 속하는 이완용·이채연·이하영 등 3명의 측근을 거느린 총리대신 박정양의 취약한 입장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박영효내각은 두 주요 정파, 즉 박영효의 갑신파와 박정양의 정동파로 구성되어 있었고, 내각에서 내부대신 박영효가 총리대신 박정양보다 훨씬 더 우세했다고 말할 수 있다.

姓 名
(職位)

本貫
(身分)
登科 外遊 經驗 改革前의
最終官職
改革前의
主要經歷
朴定陽
(總理大臣)
55 潘南
(兩班)
文科
(1866)
朝士日本視察團 朝士(1881),
駐美公使(1887∼1888)
內務大臣
(1894)
戶曹判書
朴泳孝
(內部大臣)
35 潘南
(兩班)
  修信使(1882∼1883), 日本·美
國亡命(1885∼1894)
廣州留守
(1883)
日本·美國亡命
(1885∼1894)
金允植
(外部大臣)
60 淸風
(兩班)
文科
(1874)
領選使(1881∼1882) 督辦交涉通商事務
(1885∼1887)
沔川郡流配
(1887∼1894)
魚允中
(度支部大臣)
47 咸從
(兩班)
文科
(1871)
朝士日本視察團 朝士(1881),
淸國訪問(1882)
宣惠廳 堂上
(1885)
延日縣流配
(1893∼1894)
申箕善
(軍部大臣)
44 平山
(兩班)
文科
(1877)
  統理機務衙門主事
(82)
呂島流配
(86∼94)
李完用
(學部大臣)
37 牛峰
(兩班)
文科
(1882)
駐美公使館書記官·代理公使
(1887∼1890)
交換局總辦
(1893)
工曹參判
(1893)
徐光範
(法部大臣)
37 達城
(兩班)
文科
(1880)
報聘使 從事官(1883∼1884) 承政院 假主書
(1882)
美國亡命
(1885∼1894)
金嘉鎭
(農商工部大臣)
49 安東
(庶子)
文科
(1886)
駐日公使館參書官·辦事大臣
(1887∼1891)
副護軍
(1893)
副護軍
(1893)
兪吉濬
(內部協辦)
39 杞溪
(兩班)
  日本留學(1881∼1882),
美國留學(1883∼1885)
統理交涉通商
事務衙門主事
(1883)
漢城府內 流配
(1886∼1895)
徐載弼
(外部協辦)
32 達城
(兩班)
文科
(1879)
日本留學(1883∼1884),
美國留學(1885∼1895)
操練局 士官長
(1884)
美國亡命·留學
(1885∼1895)
安駉壽
(度支部協辦)
42 竹山
(庶孫)
? 駐日公使館 通譯官(1887),
日本往來(1888∼1892)
典圜局幇辦·
壯衛營領官(1893)
典圜局幇辦
尹致昊
(學部協辦)
31 海平
(庶孫)
  日本留學(1881∼1883), 中國
留學(1885∼1888), 美國留學
(1888∼1893)
統理交涉通商
事務衙門主事
(1884)
中西學院
專任講師
(1893∼1895)
李在正
(法部協辦)
49 牛溪 進士
(1882)
  電郵局主事
(1893)
電郵局主事
李采淵
(農商工部協辦)
35     駐美公使館代理公使
(1890∼1891)
電郵局幇辦
(1893)
參議交涉通商
事務衙門(1894)
李周會
(軍部協辦)
52 廣州     慶尙左水營
正領官(1894)
慶尙左水營
正領官
權在衡
(內閣總書)
40 安東
(庶子)
  駐日公使館署理公使
(1891∼1893)
統理交涉通商
事務衙門主事
(1885∼1891)
電郵局主事
(1891)
李允用
(警務使)
42 牛峰
(庶子)
    漢城府判尹
(1888)
大護軍
(1889)
禹範善
(訓練隊 第2大隊長)
  丹陽   上海旅行(1894) 別技軍參領官
(1881)
察訪(1894)
申應熙
(訓練隊 第1大隊長)
39 平山   日本留學(1883∼1884) 後衛營
(1881)
日本·美國亡命
(1885∼1894)
李圭完
(警務官)
33 全州
(兩班)
  日本留學(1883∼1884),
美國留學(1885)
武官侍從長
(1884)
日本·美國亡命
(1885∼1894)

<표 2>박영효내각 각료들의 배경 (1895년 6월 현재)

박영효내각 각료들의 사회적 배경, 교육경험, 그리고 정치적 경력 등을 분석해 보면, 그들은 주로 능력본위로 발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42세였으며, 그들 중 적어도 5명이 30대에 속했다. 그들의 가문과 사회적 배경은 다양했는데, 이러한 잡다한 배경의 인물들이 내각에 기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사회질서의 태동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그들 중 최소한 3명이 庶出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교육배경을 살펴보건대, 그들 중에는 과거(문과)를 치르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1894년 전까지 친청 민씨척족의 파행적 권력구조 속에서 요직 획득이 불가능했거나 국내외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개혁에 헌신할 각오가 서있는 관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명의 내각구성원들 중 적어도 10명이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은 이 집단이 일본지향적이라기 보다 서구지향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1896년 이후 이들의 대부분은 친서구적인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권을 장악하자 박영효는 군부 및 경찰조직, 그리고 지방행정조직의 개혁에 주력하면서 5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동시에 그는 개혁을 반대하는 보수세력이 자신을 제거하기 전에 재빨리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려고 애썼다. 이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공사와 민씨척족의 후원에 힘입어 은밀히 권력을 만회하고 있었던 민비와 마찰을 빚고 말았다. 양자의 관계는 이노우에공사가 잠깐 서울을 떠나 있던 6월 초순부터 하순까지 사이에 냉각되어 갔다. 이 무렵 박영효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기 영향력 아래 있던 訓練隊로 하여금 왕실경호를 담당토록 하는 비상조치를 강구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즉, 그는 6월 25일 국왕에게 왕실경비대의 교체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던 것이다. 일본 및 미국측의 자료에 의하면, 그후 박영효는 왕실에 대한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무력으로써 왕실을 통제하기 위한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구상하게 되었다.480)미국공사의 보고서와 일본영사 우찌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보고서에 의하면, 1895년 7월 6일 박영효는 훈련대를 끌어들여 민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박영효가 왕실에 대해 어느 정도 ‘과격한 행동’을 취하려고 계획한 것은 사실이나 자신의 강력한 만류로 그 계획을 철회했다고 주장하면서 민비암살계획에 회의를 표시했다. 한편 정교에 의하면,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하기 전에 그러한 음모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고 한다. 박영효가 1885∼1894년간 민비와 적대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1894년 9월초에 민비를 폐위시키려고 계획한 적이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박영효의 ‘과격한 행동’계획에는 민비의 弑害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녀를 폐서시키려는 기도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Department of States, United States, Dispatches from the United States Legation in Seoul, Korea, 문서번호 123, 1895. 7. 9;문서번호 147, 1895. 9. 18;문서번호 187, 1896. 1. 13.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34;문서번호 317;문서번호 326;문서번호 344, 457·461∼462·466쪽.
鄭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57), 109쪽 등 참조.
이러한 정황에서 7월 6일 왕실측은 박영효가 궁궐을 침범하여 민비를 제거하고 국왕을 폐위시키려 음모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를 계기로 7월 6∼7일 양일간 박영효와 서광범을 제외한 전·현직 고관들이 참여한 궁정회의에서 박영효를 ‘不軌陰謀’의 혐의로 체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궁중의 움직임에 관해 사전경고를 받은 박영효는 7월 7일 측근 2명과 함께 일본공사관의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등의 협조를 얻어 일본으로 탈출함으로써 또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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