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2. 제2차 개혁
  • 3) 제2차 개혁의 내용
  • (2) 대외관계의 개혁

(2) 대외관계의 개혁

1894년 이전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던 결정적 요인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정치적·문화적 지배였다. 청일전쟁의 결과 조·청간의 전통적 유대는 마침내 청산되었다. 박영효는 민족주의적 상징들을 고안하여 국민들에게 새로운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우선 박영효가 참석한 1895년 1월 12일의 내각회의에서 왕실의 존칭을 개칭할 것이 결의되었다. 즉, 主上殿下를 ‘大君主陛下’로, 왕대비전하를 ‘王太后陛下’로, 왕비전하를 ‘王后陛下’로, 왕세자저하를 ‘王太子殿下’로, 왕세자빈저하를 ‘王太子嬪殿下’로 각각 격상시킴으로써 독립국가의 체면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484)≪韓末近代法令資料集≫1, 155∼156쪽.

다음으로 1895년 2월 초 내각회의에서 박영효는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기 위해 전통적인 조·청 종속관계를 연상시키는 松坡 소재 淸帝功德碑를 묻어버리고 서대문밖에 있는 迎恩門·慕華館·弘濟院 등을 헐어버리자는 안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김홍집·박정양 등은 청제공덕비와 영은문의 제거에는 동의하였지만 모화관·홍제원은 그 명칭을 바꾸어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이 문제는 훈련대대장 申泰休의 진퇴문제와 결부되어 갑신파와 갑오파간의 대립을 격화시킬 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중재로 갑오파의 의견을 수렴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다.485)李瑄根, 앞의 책, 461∼462쪽 참조.

이외에도 박영효는 1882년에 자신이 도안한 太極旗라는 이름의 국기를 널리 사용케 하였으며, 처음으로 공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토록 하고, 나아가 獨立慶日을 제정하는 등 상징적인 민족주의 지향의 개혁을 도모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내무대신의 직권으로<自主獨立을 妨害하는 者를 不道國賊으로 處罰하는 件>이라는 제목의 내무아문령 제1호로 발포하기도 하였다.486)≪韓末近代法令資料集≫1,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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