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당시 조선의 개혁파관료들은 나라의 부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갑오경장 초반에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왕실의 권한을 축소시키면서 종래 정책의 입안 및 시행을 담당하였던 議政府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895년 1월 11일 박영효를 비롯한 갑신파는 궁내부 및 중추원을 발족시킴과 동시에 근대적 內閣制를 수립·선포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중앙정치체제는 이제 1885년 이후 메이지 일본의 체제와 흡사하게 되었다.
1895년 4월 19일에 발포된<內閣官制>에 의하면, 의정부는 내각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며, 종래의 8衙門은 部로 각각 개칭되면서 농상무아문과 공무아문이 통합되어 외부·내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등 7부가 되었다. 내각은 총리대신과 7부의 대신을 포함하여 8명의 각료로 구성되었다. 내각수반인 총리대신은 행정 각부의 통일을 꾀하며, 행정 각부의 처분 혹은 명령을 다시 협상해야 될 때에는 그 실시를 잠시 중지하고 내각회의를 거쳐 재가를 받은 뒤에 실시토록 하였다. 그리고 내각에는 법률·칙령안, 세입·세출의 예산 및 결산, 내외國債에 관한 사항, 국제조약 및 기타 중요한 국제문제, 각부간 주관권한의 쟁의, 신민의 상소 중 특별히 大君主陛下께서 下付하는 것, 예산외의 지출, 칙·주임관의 임명 및 진퇴, 舊規의 존폐 내지 변경과 관청의 廢置 및 분합, 조세제도의 개혁, 그리고 관유토지·삼림·屋宇·선박 등의 관리·처분 등 대소사를 다룰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달에 발포된 각부 관제에서는 7부가 각각 고유의 권한을 갖고 정책을 집행하도록 규정했다. 내각은 이제 중앙정부의 가장 강력한 정책입안기관이자 집행부로 자리잡은 것이다.487)≪韓末近代法令資料集≫1, 199∼200쪽.
왕현종,<甲午改革期 宮僚制度의 變化>(≪國史館論叢≫68, 1996), 270∼271쪽.
내각관제의 실시와 아울러 중추원 및 궁내부의 개편이 단행되었다. 우선 중추원은 종래의 군국기무처와 중추원을 통합한 것으로서, 1894년 이전에 집권했던 보수적인 관료들을 명예스럽게 은퇴시키기 위해 고안된 실권없는 자문기관이었다.<中樞院官制 및 事務章程>에 따르면, 중추원은 내각의 諮詢에 응하여 법률·칙령안과 내각에서 임시로 자순하는 사항을 심사·의정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중추원의 구성원은 칙임의 의장·부의장, 그리고 칙임의 1등 議官과 주임의 2·3등 의관 등 50인 이하의 의관이었다. 이어서 중추원 의관들이 임명되고,<중추원회의 및 처무규정>도 제정·반포되었다. 그러나 중추원은 1895년에 실제로 별다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내각이 국가정책의 입안 및 집행기관으로 자리잡게 된 반면 궁내부는 내각과 분리된 채 권위의 상징체로 전락되었다. 1894년 12월 17일 칙령 제1호로 承宣院의 公事廳을 폐지하고, 그 대신 布達 제1호로 1895년 6월 12일 궁내부를 신설했다. 개정된<宮內府官制>를 살펴보면, 궁내부대신은 왕실의 일체 사무를 總判하고 소속 각 관을 統督하고 귀족을 감독함과 아울러 國璽·御璽를 尙藏하였으며, 大臣官房 아래에 掌禮院·侍從院·奎章院·會計院·內藏院·濟用院 등 6院을 두었다. 그리고 종래의 종정부와 종백부는 폐지되고 그 대신 이들은 장예원 예하의 宗正司와 貴族司로 축소되었다.488)≪韓末近代法令資料集≫1, 304∼316쪽. 주목할 만한 것은 왕실경비를 취급하는 회계원 이외에 왕실의 사유재산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내장원을 신설하였다는 사실이다. 내장원은 이전의 內需司 및 그에 소속해 있던 龍洞宮·於義宮·壽進宮·明禮宮 등 소관의 재원을 관리하였다. 내장원은 내각제의 강화로 인하여 권한이 축소된 국왕 및 왕실측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신설되었던 것이다.489)徐榮姬,<1894∼1904년의 政治體制 動向과 宮內府>(≪韓國史論≫23, 서울대 국사학과, 1990), 357∼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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