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3. 제3차 개혁
  • 1) 제3차 개혁의 배경

1) 제3차 개혁의 배경

이노우에공사는 조선의 ‘이집트화’를 궁극목적으로 삼고 한편으로 일본고문관을 동원하여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편달하면서 내정개혁을 촉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동학농민‘의병’과 대원군계열의 반일 정치세력을 탄압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내정개혁의 미명 아래 추진했던 일본지향형 제도개혁작업은 일본정부의 조선 보호국화정책의 동요, 개혁추진자금인 5백만 엔 차관의 실현 지연, 그리고 下關條約과 삼국간섭 이후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의 와해 등 복합적인 이유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노우에공사는 삼국간섭 후 일본내각의 조선정책 심의에 참여할 목적으로 무쓰외무대신에게 휴가를 신청한 바 있지만, 5월 11일에 조선내각내에서 김홍집파와 박영효파 간에 대립·분쟁하는 사태가 벌어져 서울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내각이 새로운 對韓정략을 결정한 지 이틀이 지난 6월 6일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이 중간 즉, 5월 23일에 그는 무쓰로부터 휴가귀국령 대신 완곡한 공사직 해임 권고를 받았다. 이 무렵 내부대신 박영효는 김홍집과의 마찰을 중지하라는 이노우에공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결국 김홍집과 조희연을 내각에서 몰아내는 한편 이노우에의 의도에 배치되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박영효의 독주로 말미암아 조선의 내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이노우에는 6월 5일 귀국 인사차 고종과 민비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박영효를 위험인물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박영효를 음해하였다.524)Spencer J. Palmer, ed., Korean-American Relations 2, p.262.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동경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주한공사직에서 곧 해임될 것을 예상했던 이노우에는 두 가지 현안의 해결, 즉 6월 4일 일본 내각의 결정에 따라 향후 일본이 조선에서 취해야 할 구체적인 정략을 안출하는 일과 자신의 후임자를 물색·천거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6월 20일 천황을 알현하고, 21일에 내각회의에 참여하였으며, 22일에 무쓰를 만나 在韓時 자신의 임무수행에 대해 보고하였다.525)井上馨傳記編纂會 編,≪世外井上公傳≫4(東京:原書房, 1975), 482∼483쪽. 이어서 7월 1일에 그는 자신의 대한정책 의견서를 내각에 제출하였다.

이노우에가 7월 1일에 제출한 이 의견서는 2개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안에서 그는 일본이 청국에서 받게 될 3억 6천 5백만 엔의 배상금 가운데 약 5, 6백만 엔을 조선국왕과 정부에 기증금으로 惠與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 기증금 제공안을 도덕적 내지 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하였다. 즉, 그는 조선이 청일전쟁 중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만한 액수의 기증금이 할당되어야 마땅하며, 또 이 정도의 기증금을 惠與함으로써 향후 6년간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막을 수 있고 조·일 양국간의 유대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이 기증금 제공의 대가로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기왕의 3백만 엔 차관을 상환받을 수 있는 동시에 앞으로 조선의 철도 및 해관에 대한 관할권까지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언하였다.526)≪世外井上公傳≫4, 483∼384쪽.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45, 367쪽.

이노우에가 제시한 제2안은 장차 일본인을 세관감독으로 聘用한다는 전제 하에 이미 제공한 3백만 엔 차관의 상환기간을 5년에서 20년으로 연장시켜 준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환기간 연장이 가혹했던 차관조건 때문에 조선 위정자들이 품게 된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일본내각은 7월 7일 서울에서 중대한 政變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노우에의 이 의견서에 대해 의결했다. 7월 7일 박영효가 민비와 김홍집 등의 반대파의 계략에 걸려 ‘不軌’(아마도 민비시해)를 음모했다는 혐의로 관직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돌발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정부는 박영효의 실각을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여 이 사건을 계기로 민비와 김홍집을 조선정부내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만들려는 정략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새 정략에 따라 7월 8일 이노우에는 스기무라대리공사에게 “박영효를 보호하기 위해 운동하지 말라”는 내용의 전훈을 보낸 다음, 7월 9일에는 “왕비를 窮鼠처럼 몰아 부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527)≪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18, 457∼458쪽;문서번호 321, 459쪽. 오이소(大磯)에 머물고 있던 무쓰는 7월 10일에 외무성에 보낸 전보를 통해 이노우에공사 귀임시에 박영효를 함께 데리고 가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외무대신임시대리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는 7월 10일 스기무라에게 김홍집내각을 조성하는 데 진력하라고 훈령을 보냈다.528)≪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29, 462∼463쪽;문서번호 331, 463쪽. 요컨대, 7월 7일 정변 이후 일본정부는 민비와 김홍집을 지원하고 박영효를 희생양으로 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그후 7월 11일 일본내각은 회의를 열어 이노우에의 7월 1일자 의견서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일본내각 각료들은 3백만 엔 차관의 상환기간을 20년으로 연장해주는 것 외에 별도로 기증금 3백만 엔을 조선정부에 혜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내각의 결정은 이노우에의 제1안과 제2안을 절충한 것이었다. 사이온지는 이노우에에게 3백만 엔의 기증금 제공약속을 가지고 서울에 귀임하라고 명하였다. 다만, 그는 이 기증금은 앞으로 개회될 의회의 협찬을 얻은 후 비로소 조선 위정자들에게 공여될 것이라고 부언하였다.529)≪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64, 368쪽. 또한 7월 11일에 일본내각은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樓)를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지명하였다.530)三浦는 8월 17일 주한일본공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언제 공사직을 지명받았는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신승권은 三浦가 7월 27일에 지명되었다고 보았다. Seung Kwon Synn, The Russo-Japanese Rivalry over Korea, 1876∼1904(Seoul:Yuk Phub Sa, 1981), pp.172·184 참조. 그러나 많은 자료들이 그의 지명이 7월 20일 이전에 이루어 졌음을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에 일본내각이 조선에 3백만 엔의 기증금을 주기로 결정한 7월 11일 전후에 三浦의 지명이 이루어 졌다고 여겨진다(≪Japan Weekly Mail≫, 1895년 7월 20일;≪世外井上公傳≫4, 512쪽;朴宗根,≪日淸戰爭と朝鮮≫, 東京:靑木書店, 1982, 223쪽 등 참조).

이상으로써 일본의 내각 각료들은 7월 11일에 이르러 조선정부에서 박영효를 제거하고 그 대신 민비와 김홍집을 지지하기로 합의함과 아울러 총 6백만 엔이라는 거액의 정치자금으로써 조선의 위정자들을 농락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노우에공사는 7월 14일 동경을 출발하여 7월 21일 서울에 다시 귀임하였다. 주한 일본공사로서의 마지막 재임기간에 그는 3백만 엔의 기증금을 미끼로 민비와 김홍집측의 일본 지지를 획득하려는 신정책을 펼쳐나갔다. 7월 25일 이노우에공사 부부는 국왕과 왕비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9천 엔 상당의 보물을 선물로 헌납하고, 국왕·왕비를 상대로 6시간 이상의 內謁見을 하였다. 이어서 8월 5일 국왕을 다시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노우에는 “금후 조선의 왕족·신민으로서 왕실에 대하여 不軌를 도모하는 자가 있을 경우 일본정부는 병력으로써라도 왕실을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언하였다. 동시에 그는 일본내각이 조선국왕에게 3백만 엔의 기증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국왕과 왕비의 환심을 크게 샀다.531)≪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48, 372∼373쪽;문서번호 344, 479∼480쪽.

8월초 이노우에공사는 국왕과 민비를 또 다시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운 ‘17箇條 改革案’을 토로하였다. 이 개혁안에서 이노우에는 1894년 말 자신이 발설했던 개혁안과는 정반대로 민비로 하여금 고종과 함께 국정에 참여할 것, 즉 정치일선에 복귀할 것을 권고하였다. 더욱이 그는 고종이 갑오경장 실시 이후 투옥된 모든 민씨척족 내지 친민파 관료들을 특별사면 조치를 통해 석방시키고 대원군에 의해 유배당한 자들을 복권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閔泳翊과 閔泳駿 등 민씨척족 인사들을 1, 2년간 일본에 머무르게 한 다음 정부의 주요 관직에 재임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특히 대원군에 관해서는, 국왕이 내각 각료들로부터 국정에 관해 대원군과 상의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냄으로써 대원군이 다시는 국정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노우에가 제시한 17개조 개혁안의 핵심은 국왕이 민씨척족과 김홍집파를 합친 새 내각을 구성하도록 건의한 점에 있다.532)‘17개조 개혁안’의 전문에 대해서는≪世外井上公傳≫4, 502∼510쪽 참조. 요컨대, 이노우에의 개혁안은 1894년 이전의 정치상황, 즉 보수적인 민씨척족정권의 복구를 부추긴 것이기 때문에 갑오경장의 정신을 분명히 역행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신속하게 이노우에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 8월 17일 고종은 “更張하는 때를 당하여 維新하는 정치에 斟量함이 없을 수 없으니 개국 504년 4월 25일(음 4월 1일) 이전의 범죄 중 모반·살인·절도·강도·통간·騙財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일체 석방함으로써 曠蕩한 措置를 보이게 하라”533)≪高宗實錄≫, 고종 32년 6월 27일.는 조칙을 내려 민씨척족과 그에 속한 모든 정치인들을 사면시켰다. 그 결과 개혁기간에 징역이나 유배형에 처해졌던 260여 명의 탐관오리들이 석방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1894년 이전 조선의 최고 실력자였던 민영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 사면조치 덕택으로 9월 24일 망명지 홍콩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8월 25일에 민씨일파와 근왕적인 정동파를 중심으로 이른바 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을 발족시키게 되었다. 이때 김홍집은 총리대신에 재임명되었지만 내각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제약되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민비와 민비의 추종세력이 이노우에의 서울 재부임을 계기로 정계에 복귀하여 재집권한 것이다.

이노우에는 조선에서 이임하기 전에 벌인 외교의 성패 여부는 그가 8월 5일 고종과 민비에게 언약했던 기증금 3백만 엔의 실현과 이미 제공한 3백만 엔 차관의 상환기간 연장에 달려 있었다. 300만 엔 기증금의 용도에 대해 이노우에가 그 중 200만 엔을 경인간 철도건설에 사용하되 그 가운데 100만 엔을 왕실소유의 몫으로 하고, 나머지 100만 엔은 정부경비와 왕실재산에 각각 반씩 충당케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150만 엔을 왕실에 제공함으로써 고종과 민비의 환심을 사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철도부설에는 반드시 일본인 技士와 工人을 고용하고, 소요 자재도 일본에서 수입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자국의 실리를 최대한으로 확보했다.534)李瑄根,≪韓國史:現代篇≫(乙酉文化社, 1963), 564∼564쪽 참조.

그런데 이노우에가 고종과 민비에게 약속한 기증금의 실현은 일본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되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자신의 후임자 미우라공사가 서울에 부임하기 전에 이 안을 처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으로 8월 25일 김홍집·박정양내각과 3백만 엔 차관상환기간 연장에 관한 협상을 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8월 6일과 29일 두 번에 걸쳐 사이온지외상대리에게 전보를 보내 기증금 3백만 엔을 조속히 공여할 것을 촉구하였다.535)≪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48, 373쪽;문서번호 249, 374∼375쪽.

그러나 사이온지는 이러한 이노우에의 기증금 즉각 실현 요구에 냉담하였다. 미우라공사가 고종에게 신임장을 바친 다음날인 9월 4일에 사이온지는 이노우에에게 모든 임무를 신임공사에게 인계하고 이노우에 자신은 속히 귀국하라고 훈령하였다. 그는 또 일본 의회가 예정대로 가을에 개회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내각은 기증금 3백만 엔의 조기 실현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기증금 문제는 연말에 열릴 의회에서 다루어지게 될 전망이라고 부언하였다.536)≪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50, 375쪽;문서번호 253, 377쪽.

9월 4일자 사이온지의 훈령은 이노우에공사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곧바로 사이온지에게 전문을 보내 기증금 공여약속의 불이행으로 말미암아 서울에 착임한 미우라공사의 입장이 난처하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이 재임기간 조선에서 구축한 일본의 위신도 실추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동시에 그는 일본정부가 약속한 기증금을 조선측에 제공하지 못할 경우 서울 정계에는 “일련의 엄청난 혼란과 격동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신임공사 미우라도 9월 4일 이노우에와 동일한 맥락으로 사이온지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미우라에게 보내는 회신에서 기증금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이노우에공사의 조속한 귀국만을 재차 강조했다.537)≪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51, 375쪽;문서번호 254, 376∼377쪽 참조.

이처럼 이노우에는 3백만 엔 기증금 공여를 미끼로 펼쳤던 자신의 마지막 對韓 포섭전략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9월 17일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그 전날 고종과 민비를 이임차 알현한 자리에서 이노우에는 조선정부가 재정을 정리한 후에 일본이 약속한 3백만 엔의 기증금이 공여될 것이라고 책임회피성 발언을 하였다. 또한 자신을 환송하기 위해 龍山에 모인 조선인 친지들에게 그는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당신들 내각에 분규가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의미심장한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이노우에가 서울을 떠난 지 20일만인 1895년 10월 8일에 조·일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희대의 참극, 즉 閔妃弑害事件이 터지고 말았다.538)柳永益,<淸日戰爭 및 三國干涉期 井上 馨 公使의 對韓政略-閔妃弑害事件 背景論->(≪明成皇后弑害事件≫, 民音社, 1992), 312∼313쪽 참조.

이노우에의 후임인 미우라공사는 9월 1일에 부임하였다. 그는 외교에 전혀 무경험이며 조선 사정에 대해 문외한인 예비역 육군중장 출신이었다. 이 같은 武人 배경의 미우라가 이노우에의 추천으로 주한일본공사로 발탁된 사실은 박영효의 망명을 계기로 일본의 대조선정책이 크게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미우라는 조선공사직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다음과 같은 3조의 대조선정책 중 한 방침을 일본정부가 채택해 주는 것을 조건으로 공사직을 수락하였다.

제1조. 지난해 征淸의 主義에 의거하여 조선을 동맹의 독립왕국으로 인정하고 장차 우리의 獨力으로 전국의 방어 및 개혁을 담당하는 책임의 방침을 취할 것인가.

제2조. 우리의 독력으로 조선 독립 改良의 책무를 피하고, 또한 보호 및 점령의 雄心을 억제하여 구미열국 가운데 공평한 나라와 서로 모의하여 공동보호의 독립국으로 하는 방침을 취할 것인가.

제3조. 조만간 반드시 한 두 강국과 紛擾를 일으키는 것은 가장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추세이므로 大難事가 일어나지 않은 금일 오히려 단호히 결의하여 一强國과 고려 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방침을 취할 것인가(≪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0, 1711∼172쪽).

즉, 미우라는 조선에 대해 ①일본의 독력지배, ②공동보호국화, ③러·일 양국의 분할점령 등 복안을 제시하면서, 이중 제1안을 일본정부가 채택할 것을 은근히 촉구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미우라의 제안에 대해 명확한 결정을 내려주지 않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미우라공사에게 조선문제를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 셈이다. 민비시해사건은 그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539)姜昌一,<三浦梧樓 公使와 閔妃弑害事件>(위의 책), 44∼50쪽 참조.

미우라공사는 부임 후 두문불출하면서 參禪僧을 자처하였지만 실제로 그는 일본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한 중대 음모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정계의 상황을 주시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하던 중 훈련대 해산문제가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반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민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이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와 (조선)軍部 고문관 육군 中佐 쿠수노세 유끼히코(楠瀨幸彦), 宮內府 고문관 오카모토들을 중심으로 민비시해계획을 치밀하게 준비·추진하였고 동시에≪漢城新報≫사장 아다찌 켄죠오(安達謙藏)와 편집장 코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를 비롯한 일본인 기자와 통신원, 그리고 일본인 경찰관·상인 및 낭인 등을 끌어 모아 놓았다.

민비시해의 결행에 앞서 미우라는 민비와 정적관계에 있던 대원군을 포섭·이용하기로 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9월 하순경부터 영사관補 호리쿠찌 쿠마이찌(堀口九萬一), 낭인 스스키 쥰켄(鈴木順見), 영사관 순사 와타나베 타카지로오(渡邊鷹次郞), 그리고 오카모토 등을 잇따라 孔德里에 있는 대원군 별장에 보내어 대원군의 의중을 타진하고 설득작업을 벌였다. 아울러 미우라는 훈련대 해산문제로 불평불만을 품고 있던 前군부협판 李周會와 훈련대 대대장 禹範善·李斗璜·李軫鎬 등 조선인 무관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10월 2일 미우라는 스기무라·오카모토·쿠수노세 등과 회합하여 10월 10일을 민비시해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10월 7일 정식으로 훈련대의 해산을 통고해 오자 무장해제가 단행되기 직전인 10월 8일로 거사일을 앞당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우라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을 중심으로 서울 거주 일본인 낭인 그리고 일부 훈련대소속 군인들이 경복궁을 급습하여 민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민비시해사건 후 일본공사관은 조선정계내에 (반일)친미·친러적인 李完用·李允用·李範晋·閔商鎬 등 정동파 인사들을 해직시키고, 그 대신 김홍집·어윤중·김윤식·유길준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결과 성립된 제3차 김홍집내각은 사건 당일에 즉각<內部告示>를 통해 민비시해사건이 훈련대 해산에 불만을 품은 兵丁들의 반발로 일어났다고 무마한 데 이어 10월 10일에 그 진상을 은폐하고자 고종으로 하여금<王妃廢位詔勅>을 반포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비시해 당시 侍衛隊를 지휘했던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와 왕궁에 유숙하고 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G. Sabatin) 등에 의해 그 목격 현장이 폭로되었다. 특히,≪뉴욕 헤럴드(The New York Herald)≫紙의 특파원 코커릴(C. Cockerill)이 사건의 진상을 취재·보도함으로써 일본의 만행이 만천하에 폭로되었다.540)민비시해사건 전반에 관해서는 崔文衡 등 공저,≪明成皇后弑害事件≫(民音社, 1992) 참조.

사건 발생 후 미국대리공사 알렌(Horace N. Allen)과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 Waeber)를 주축으로 한 서울주재 외국공사단이 고종을 알현할 뿐 아니라 미우라공사를 직접 면회하여 사건의 전말과 일본인의 관련 사실을 추궁하였다. 또한 그들은 외부대신 金允植에게 고종의<왕비폐위조칙>이 강요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고 항의하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였으며, 10월 11일에 미·러 양국 공사는 공사관 호위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인 군함에서 수군 17명과 10명을 각각 서울로 불러들였다.541)≪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72, 507∼509쪽.

민비시해사건 당일 서울의 미우라공사로부터 이 사건에 대해 보고 받은 일본정부는 즉시 “이번의 사건에 대해 정부의 훈령이 있을 때까지 우리 수비대를 동원시키려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이라는 전훈을 보냈다.542)≪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5, 492쪽. 그러나 시해사건이 국제문제로 확대됨에 따라 곤궁에 빠진 일본정부는 미·러·영 등 각국 주재공사들에게 각국의 반응을 파악하라는 훈령을 내림과 동시에 외무성 정무국장 코무라 쥬타로오(小村壽太郞)를 서울로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조사·보고토록 조치하였다.

10월 14일 인천에 도달, 그 다음날 서울에 도착한 코무라는 사건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그는 미우라공사를 비롯해 스기무라·쿠수노세·오카모토·아다찌·코바야카와 등 일본공사관원·고문관·군인·기자·낭인 등이 민비시해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일본정부는 구미 열강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우라공사를 포함한 주요 관련자들을 소환·귀국시켜 히로시마(廣島)감옥에 구금토록 조처하였다.

아울러 일본정부는 코무라를 辨理公使로 임명하고, 그에게 김홍집내각의 붕괴를 예방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일본정부는 구미 열강과의 타협을 모색하기 위해 주한 일본군 철수안을 제안하는 한편 조선정계의 사정에 밝은 이노우에를 王室問安使로 파견하였다. 서울에 온 이노우에는 주한 외국공사와 접촉하면서 코무라공사를 측면지원하는 동시에 대원군을 정계에서 제거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이노우에가 공사 재임시에 약속했던 기증금 공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코무라공사 역시 이러한 조선정부의 분위기를 파악하였기 때문에 “井上伯의 滯韓은 되도록 단기간에 그쳐줌이 득책”이라고 본국 정부에 품신하였다.543)≪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411, 534쪽. 결국 이노우에는 아무런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서울 체류 보름만인 11월 15일 귀국하고 말았다.

한편 11월 26일 고종은 정부대신과 외교사절단이 모인 자리에서 ‘폐왕후’를 복위시키는 동시에 親衛隊(前훈련대) 將卒의 무죄함을 천명하고, 민비시해에 대한 문책인사로 군부대신 趙羲淵과 경무사 權瀅鎭을 파면시키는 조칙을 내렸다.544)≪高宗實錄≫, 고종 32년 10월 10일. 이로써 민비시해사건에 대한 사후수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지만, 그 사건을 주도했던 일본공사관측의 입장은 갈수록 난처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 28일 侍從院卿 李載純·侍從 林㝡洙·탁지부 사계국장 金在豊·중추원 의관 安駉壽 등이 주동하고, 친위대 소속 중대장 南萬里 등 수십 명의 장교가 가담하여 민비시해사건 이후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있던 고종을 왕궁 밖으로 移御할 목적으로 春生門의 담을 넘어 왕궁을 침범하는 이른바 春生門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李範晋·李完用·李夏榮·尹雄烈·玄興澤 등 정동파인사들, 미·러 양국 공사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헐버트(Homer B. Hulbert), 다이 등 친왕적 성향의 미국인들의 은밀한 협조가 있었다. 그러나 이 국왕 移御계획은 참가를 약속했던 친위대 대대장 李軫鎬의 사전 누설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545)李瑄根, 앞의 책, 683∼701쪽.
洪景萬,<春生門事件>(≪韓國近代改新敎史硏究≫, 京仁文化史, 2000), 153∼196쪽 참조.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國王奪取事件으로 규정하고 그 동안 민비시해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국내외적 난국을 타개할 호재로 활용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이 사건에 서양인들이 대거 관련된 사실에 주목하고, 이를 빌미로 謀殺·凶徒聚集罪 혐의로 기소당해 있던 미우라 등 민비시해 가담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으로 면소·석방시켰다. 심지어 일본정부는 이 때를 기하여 주영공사 카토오 타카아키(加藤高明)로 하여금 조선을 공동보호하기 위한 일·영·러 3국의 협상안 내지 동맹안을 영국정부에 제안하였다.546)≪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469, 595∼597쪽.

김홍집내각은 춘생문사건의 연루자들에게 사형, 종신유배형, 징역 등의 처벌을 내림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아울러서 갑오경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즉, 김홍집내각은 춘생문사건의 관련자들을 처벌했던 12월 30일에<建元에 관한 件>,<年號를 議定하는 件>과 더불어 斷髮令을 내렸다.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시행은 민비시해사건으로 팽배해 있던 국민들의 반일 내지 반정부 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 친일내각이 임명한 지방관들을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김홍집내각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친위대를 지방으로 출동시켰지만 의병운동은 계속 확산되었다. 이렇게 친위대의 지방파견으로 인해 서울의 치안력이 약화된 틈을 타 미·러 양국공사관이 피신해 있던 이범진과 이완용 등 정동파인사들이 양국 공사의 협조를 받아 고종을 러시아공사관(俄館)으로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896년 2월 11일에 결행된 이른바 俄館播遷으로 말미암아 1894년 여름 이래 조선에 대해 독점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일본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면서 김홍집내각이 붕괴하고 모처럼의 갑오경장도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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