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3. 제3차 개혁
  • 2) 제3차 개혁의 추진세력

2) 제3차 개혁의 추진세력

1895년 7월 6일 박영효가 이른바 不軌陰謀 혐의로 서울정계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망명하자 고종은 그를 엄중 처벌하라는 조칙을 내림과 동시에 부분적 내각개편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내부대신 박영효와 경무관 李圭完 등 박영효파 인물들이 면직되고, 내부협판 兪吉濬이 내부대신서리에, 탁지협판 安駉壽가 경무사에, 金弘集·鄭範朝·金永壽가 궁내부 특진관에 각각 임명되었다.547)이어서 7월 9일에는 미국에 체류 중에 외부협판에 임명된 徐載弼도 역시 해고당하였다(≪日省錄≫, 고종 32년 윤5월 14일·17일). 그후 7월 12일에는 尹用求가 궁내부대신, 李金憲永이 내부대신, 尹致昊가 외부협판, 金春熙가 학부협판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그런데 박영효의 일본 망명 후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세력은 왕실과 협력하여 박영효를 축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정동파였다.548)정동파는 친일적 성향이 강한 인물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한편 박영효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親日단체인 朝鮮協會를 해체시키려고 노력하였다(杉村濬,≪明治二十七·八年 在韓苦心錄≫, 東京:杉村陽太郞, 1932, 143∼144쪽;柳永益,≪甲午更張硏究≫, 一潮閣, 1990, 206∼207쪽 및 264∼266쪽). 즉, 8월 11일에는 안경수가 군부대신 겸 탁지부대신서리에, 李允用이 경무사에 등용되어 내각에서 정동파의 입지가 강화된 데 이어, 8월 17일에 친러파의 대표격인 이범진이 궁내부 濟用院長으로 임명된 지 한 달도 못되어 궁내부 협판에, 그리고 閔商鎬가 궁내부 제용원장에 임명됨으로써 “궁내부는 순수한 閔黨, 즉 俄美黨으로써 단결하여 그 세력이 거의 정부를 압도”하게 되었다.549)≪高宗實錄≫, 고종 31년 6월 27일·7월 8일.
杉村濬, 앞의 책, 429쪽.
따라서 정동파는 친일파관료들이 왕실과 일본공사관을 매개시켜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실과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던 미·러 양국 공사관간의 연결고리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과 민비는 8월 22일 갑오경장의 개시와 함께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던 徒流罪人 閔泳駿·趙秉式·閔泳柱·閔炯植 등 민씨척족들을 사면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550)≪高宗實錄≫, 고종 32년 7월 3일. 그런 다음 8월 24일에 고종은 김홍집을 총리대신에 재임명하고 박정양을 내부대신에, 어윤중과 申箕善을 중추원 의장 및 부의장에 각각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표 1>참조).

總理大臣 金弘集
內閣總書 李聖烈(8.10)
宮內府大臣 李耕稙(8.18), 李範晋(8.28 署理)  協辦 李範晋(8.18)
內部大臣 朴定陽  協辦 兪吉濬※(10.4 免職)
外部大臣 金允植※  協辦 尹致昊※
度支部大臣 沈相薰(署理 安駉壽)  協辦 李鼎煥(8.10)
法部大臣 徐光範※  協辦 李在正※
農商工部大臣 金嘉鎭, 李範晋(10.5)  協辦 鄭秉夏※
學部大臣 李完用※  協辦 金春熙(7.12)
軍部大臣 安駉壽(8.10)  協辦 權在衡(8.10)
警務使 李完用(8.10)
訓練隊聯隊長 洪啓薰(7.17)
侍衛隊聯隊長 玄興澤(7.17)

<표 1>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의 구성 (1894년 8월 24일∼10월 8일)

1.≪高宗實錄≫, 고종 32년 5월 14일∼8월 19일.
 2. ※ 표는 前내각에서 유임된 자.
 3. ( ) 내는 임명 날짜.

이렇게 출범한 제3차 김홍집내각은 7월 23일에 서울에 재귀임하여 3백만 엔의 寄贈金을 미끼로 왕실에 접근했던 이노우에공사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하여 만들어낸 것이지만551)≪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49, 482쪽 참조. 궁극적으로는 고종과 민비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내각이었다. 이들 내각원의 면모를 살펴보면, 표면상으로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외부대신 김윤식, 중추원의장 어윤중 등 제1차 갑오경장을 주도하였다가 박영효의 집권으로 말미암아 실세했던 갑오파인사들 이외에 내부대신 박정양, 학부대신 이완용, 경무사 이윤용, 궁내부협판 겸 서리대신 이범진 등 정동파가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더욱이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에서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법부대신 서광범과 외부협판 윤치호까지도 정동파에 가담하였으므로 실제로 정동파의 세력은 한층 더 강화되어 있었다.552)서광범은 朴泳孝의 일본 망명 후 大院君派에게 복수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뮈텔주교 집에서 하루밤을 묵었다가 귀가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일환으로 정동파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천주교 명동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뮈텔 주교 일기 I, 1890∼189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341∼343쪽). 한마디로, 제3차 김홍집내각은 친일개화파보다 정동파가 더 우세한 내각이었다.553)李瑄根, 앞의 책, 569∼570쪽.

정동파는 내각의 요직을 장악한 다음 먼저 일본의 내정간섭을 종식시키고 독립을 선양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1895년 9월 4일(음 7월 15일)을 503회 開國紀元節로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이범진이 개국기원절 행사추진 부총재, 이채연·이하영·민상호·윤치호·르젠드르 등이 사무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제반실무를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정동파가 조선의 자주를 표방하는 사업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종도 개국기원절을 맞이하여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게 된 기쁨을 은근히 토로하였다.554)韓哲昊,≪親美開化派硏究≫(國學資料院, 1998), 104∼105쪽.

이러한 상황에서 미우라가 신임공사로 내한하고 이노우에는 9월 17일에 귀국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정동파 인사들을 통해 친미·친러정책을 표방하는 한편 배일정책을 강화하였다. 먼저 9월 28일에 칙령 제1호를 반포하여 朝臣上下의 服飾을 舊制로 환원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일본공사의 권고하에서 추진되었던 내정개혁을 부분적으로 무효화시켰다.555)≪高宗實錄≫, 고종 32년 8월 10일.

다음으로 고종은 10월초에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부내 친일적 성향의 인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0월 1일에 중추원의장 어윤중이 해임되고, 2일에는 훈련대 장교 成暢基·趙羲範·申羽均·安泰承 등이 면관되었으며, 10월 4일 유길준이 義州府 관찰사로 좌천되고, 김가진은 농상공부대신직에서 물러난 반면, 10월 5일 이범진은 농상공부대신으로 승진하였다.556)≪官報≫, 개국 504년 8월 10일·14일·16일·17일.

한편 이범진의 주도 아래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시위대만을 존치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557)杉村濬, 앞의 책, 433∼435쪽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대신 안경수는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전날인 10월 7일에 일본공사관으로 미우라공사를 방문하여 훈련대 해산결정과 무장해제방침을 통고하였던 것이다.558)李瑄根, 앞의 책, 596∼597쪽 참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조선에서의 세력 만회를 위해 일본은 10월 8일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이윤용·이하영·이채연·민상호·현흥택 등은 미국공사관으로, 이범진과 이학균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각각 피신하였다.559)Horace N. Allen, Korea:Fact and Fancy(Seoul: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4), p.194.
尹致昊,≪尹致昊日記≫4(國史編纂委員會 編, 1975), 105·123쪽.
그 결과 어윤중이 탁지부대신에, 유길준이 내부협판 및 내부대신서리에, 張博이 법부협판 및 법부대신서리로, 權瀅鎭이 경무사에 각각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함으로써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이 재수립되었다.

민비시해사건 직후 김홍집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궁내부의 국정 관여를 배제하고 내각에 전권을 위임한다는 조칙을 반포케 함과 동시에 시해사건의 원인을 훈련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의 탓으로 돌리는<內部告示>를 공포하였다. 이어 10월 10일에는<王妃廢位詔勅>을 발포하여 민비시해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내부대신직에 유임되었던 박정양은 민비시해사건을 합리화하려는<詔勅>,<內部告示>,<王妃廢位詔勅>등에 서명할 것을 거부하고 친일내각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10월 12일 중추원의장으로 좌천당했다.560)≪高宗實錄≫, 고종 32년 8월 14일. 이어 법부대신 서광범도 13일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가 주미전권공사로 발령받아 출국함으로써 정동파인사들은 내각에서 축출되고 말았다.561)≪高宗實錄≫, 고종 32년 8월 25일·10월 25일. 서광범은 민비시해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학부대신으로서 거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0월 26일 미국공사 씰을 방문하여 은연중에 駐美全權公使로 파견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서광범이 주미전권공사로 임명된 것은 그를 내각에서 쫓아내기 위한 計略으로 규정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이 참조된다.
≪뮈텔 주교 일기 I, 1890∼1895≫, 410·426∼427쪽.
≪尹致昊日記≫4, 80·107쪽.
方善柱,<徐光範과 李範晋>(≪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探求堂, 1987), 439∼441쪽 등.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미국공사 씰(John M. B. Sill)과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10월 8일 오전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오후에는 다른 주한외국공사들과 함께 일본공사관을 방문하여 사건의 전말과 일본인의 관여사실 여부를 추궁하였다.562)≪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9, 494∼495쪽 참조.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민비시해사건을 주도한 미우라공사와 관련자들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동시에 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파견했던 코무라를 주한변리공사로 임명하고 조선 사정에 정통한 前공사 이노우에를 王室問安使로 급파함으로써 사태수습에 나섰다.

김홍집내각은 민비시해사건으로 인하여 대내외적으로 실추된 정부의 권위를 만회하고자 국호를 ‘大朝鮮帝國’으로, 대군주를 ‘皇帝’로 각각 개칭하고, 음력을 양력으로 개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그들은 민비시해사건에 관여했던 훈련대를 해산하는 대신 서울에 親衛隊와 지방에 鎭衛隊를 신설하였다. 아울러 폐위된 민비를 복위시키고, 시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던 군부대신 조희연과 경무사 권형진을 파면시켰다.

이와 같은 조처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으며, 국왕 고종은 신변 위협을 느낀 채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에 미·러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던 정동파인사들은 양국 공사 및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언더우드 등 친왕파 미국인들의 협조 아래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1월 28일에 정동파의 후원을 받은 시종 林㝡洙와 일부 훈련대 장교들은 궁궐에 연금되어 있던 고종을 구출하기 위한 春生門事件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거사는 사전에 일본측에 의해 탐지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 사건의 주모자 이범진과 尹雄烈은 上海로 일시 망명하였고, 정동파는 미·러공사관의 비호를 받으며 근근히 세력을 유지하였다.

춘생문사건을 계기로 김홍집내각은 정국의 주도권을 재장악함과 동시에<鄕會規則>,<鄕約辦務規則>,<種痘醫養所規程>,<商務會議所規例>등을 제정하여 민비시해사건으로 인하여 지지부진했던 내정개혁에 박차를 다시 가하였다. 특히, 김홍집내각은 1895년 12월 26일 귀국한 徐載弼(Philip Jaisohn)에게 중추원 고문직을 제의한 데 이어 정부의 보조금으로 신문을 발간하려고 시도하였다. 서재필은 자신의 귀국을 주선했던 박영효가 이미 일본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신변안전에 확신을 가질 수 없어 貞洞에 있는 아펜젤러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국내에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는 유길준이 제의한 중추원 고문직을 일단 받아들이고 신문 간행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공사 코무라는 신문 간행이 일본에 불리한 여론을 형성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나머지 이 일을 중단시키고, 심지어 유길준을 내부대신직에서 내쫓으면서 서재필을 추방시키려고 획책하였다.563)李光麟,<徐載弼의≪독립신문≫刊行에 대하여>(≪韓國開化思想硏究≫, 一潮閣, 1979), 160∼71쪽. 이처럼 김홍집내각은<향회규칙>의 실시와 신문발간 등 개혁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을 무리하게 강행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일·반정부를 기치로 내세운 이른바 을미의병운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정동파는 비밀리에 상해에서 귀국한 이범진을 중심으로 정권을 재장악하려는 음모를 추진한 끝에 마침내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였다.564)아관파천에 관해서는 李鉉淙,<俄館播遷>(≪한국사≫18, 國史編纂委員會, 1971) 참조. 아관파천이 단행된 직후 고종은 김홍집내각의 각료들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그들에 대한 포살령을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과 정병하는 순검에게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압송되는 도중 군중에 의해 타살되었고, 어윤중은 서울을 탈출하여 報恩으로 도피하다가 龍仁에서 살해당했으며, 유길준·조희연·장박·권형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또한 김윤식은 잠적하였다가 나중에 발각, 탄핵당하여 濟州道로의 종신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제3차 개혁을 담당했던 갑오파 관료들은 살해되거나 망명 또는 유배당함으로써 갑오경장은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그 반면 아관파천을 계기로 정동파인사들은 내각의 요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박정양은 내부대신으로서 총리대신 및 궁내부대신서리직을, 이완용은 외부대신으로서 학부대신 및 농상공부대신서리직을, 이범진은 법부대신으로서 경무사직을, 윤치호는 학부협판으로서 서리대신직을 각각 겸임하게 되었으며, 이윤용은 군부대신에, 그리고 李商在는 내각총서에 각각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때 새로이 구성된 내각은 박정양·이완용·윤치호 등의 친미파가 주축을 이루고 이범진 등의 친러파가 이들을 지원하는 성향을 띤 친미·친러파 내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관파천 중 이 내각은 자신들의 집권을 후원해준 러시아와 미국측에 조선의 이권을 양여해 주기도 하였지만, 갑오경장의 취지를 계승한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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