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3. 제3차 개혁
  • 3) 제3차 개혁의 내용
  • (4) 경제제도의 개혁

(4) 경제제도의 개혁

갑오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해나가는 한편 전통적인 재정기구를 개편하고 근대적 상공업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개혁조치를 취해나갔다.

우선 갑오파는 종래에 폐단을 야기시켰던 환곡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1895년 7월 18일<社還條例>를 제정하였다. 사환제도는 종래의 환곡제도와는 달리 관청의 간여를 배제하고 민간에게 자율적으로 관리토록 하였으며, 고리대 행위를 금지하고 본래의 취지대로 순전히 賑貸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573)≪韓末近代法令資料集≫1, 466∼468쪽.

다음으로 지방제도의 개편과 짝하여 탁지부가 직접 각 부·군의 稅務視察官과 稅務主事로 하여금 지방세무를 감시토록 하는<稅務視察官章程>과<各郡稅務章程>을 제정하였다. 이는 지방 징세기구의 자의적인 수탈을 방지함으로써 국가재정을 증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574)≪韓末近代法令資料集≫1, 562∼567쪽.

또한 갑오파는 민간의 상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일환으로<商務會議所規則>을 제정하였다. 이 규례에 의하면, 상무회의소는 상업자 20명 이상이 회원선거규칙·의사규칙·서무규정·역원직무권한·회계규칙 등의 규정을 의정한 다음 지방장관을 경유하여 농상공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설립될 수 있었다. 상무회의소는 상업의 興旺방법을 의결하고, 상업의 이해득실에 관한 의견을 관청에 보고하며, 상업에 관한 관청자문에 답신하고 상업상의 분규를 재결하는 사무를 맡았다. 그리고 회의소의 경비는 회원선거권을 가진 자에게서 징수토록 하고, 그 징수방법은 농상공부대신에게 인가를 받아야 하며, 지방수세관리가 체납자에게 징수를 독촉할 수 있었지만, 영업독점권의 부여와 상업세의 징수와는 전혀 무관토록 하였다. 이로써 볼 때, 갑오파는 官과의 밀접한 관련하에 상무회의소를 육성함으로써 상업의 발달을 도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575)李憲昶,<甲午·乙未改革期의 産業政策>(≪韓國史硏究≫90, 1992), 48∼49쪽.

한편 갑오파는 탁지부의 일본인 고문관 니오 코레시게(仁尾惟茂)와 협의하여 일본으로부터 500만 엔의 신규 차관을 도입할 계획인<起國債議>를 세우고, 이 안을 1896년 1월 18일에 코무라공사에게 제출하여 일본정부의 협조를 구하였다.<기국채의>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갑오파는 일본으로부터 乙未차관 300만 엔을 포함한 총 800만 엔의 차관을 도입, 이 외채로써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진다는 일종의 외자도입·적자조달 전략에 따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도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1896년초 500만 엔의 신규 차관을 신청할 때 제시한 향후 3년간의 재정계획을 살펴보면, 그들은 京仁鐵道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것 이외에 다음 몇 가지 수입증대 방안을 강구함으로써 연차적으로 세입규모를 확대해 나갈 작정이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왕실재정의 정리이다. 갑오파는 왕실비의 절감과 籍田·庄田·鹽田·火田 등 왕실소속 재산의 탁지부 이관, 종래 각 관·각 사가 징수하던 분세·수세·강세 등의 탁지부 편입, 삼업 등 왕실독점사업의 탁지부 이관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부수입을 증대시키려 하였다.

둘째, 징세법의 개선이다. 그들은 세무시찰관 및 기타 훈련받은 세무관리로 하여금 지방세무를 시찰케 하여 隱結을 적발하고 수납의 결손을 줄이며, 동시에 조세 금납제의 실행 및 향회·향약의 활성화를 기함으로써 납세율을 높이고자 하였다.

셋째, 新稅源의 발굴이다. 갑오개화파는 경인철도 및 利運社 등 관영 교통수단의 개발, 목포·진남포 등 신항구의 개항, 택지세의 실설, 驛土 및 屯土와 같은 관유지 불하 등의 방법으로써 새로운 세원을 개발하려고 하였다.

넷째, 민간상공업의 진흥이다. 그들은 六矣廛·商理局 등 인민의 식산의욕을 저해하는 제도를 혁파하고, 상공회 등을 설립하여 민간의 기업심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576)≪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319, 609∼616쪽.

이러한 일련의 계획이 실현될 경우 조선정부는 제3회계년도인 1898년에는 “더 이상 國債가 필요없이 獨力으로써 歲計 유지가 가능한” “獨立·自理의 域”에 도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기국채의>에 나타난 갑오파의 예산계획은 그들의 개혁방략 전체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즉, 그들은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경제적으로 무기한 일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초창기 3년간에 한하여 지원을 받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점을 그들의 개혁구상 전체와 관련지어 살펴본다면, 그들은 1896년 이후 3년간 자립적 경제기반을 마련하면서 그 동안에 군사·경찰·교육 등 다른 여러 면에서의 개혁도 원활히 추진함으로써 결국 1898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한 수준의 독자적 군사·경찰력 등을 확보하려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하튼 갑오파는 우리 나라 근대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장기 경제개발 내지 국가발전계획을 입안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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