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1.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 1) 삼국간섭과 일본의 대조선 정책

1) 삼국간섭과 일본의 대조선 정책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미국 등 구미 열강의 중재아래 그 해 10월부터 강화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의 승리가 불을 보듯이 명백한 가운데 제기되는 강화의 조건은 일본에게 유리한 것임은 두말할 여지조차 없다. 일본과 청국은 오랜 동안의 협상 끝에 드디어 1895년 4월 17일 강화조약에 조인함으로써 국제법상의 청일전쟁은 종결되었다.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청국의 전권공사 李鴻章과 일본의 전권공사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사이에 맺어진 강화조약의 중요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한다. 둘째, 청국은 요동반도와 臺灣·膨湖 諸島를 일본에 할양하는 것을 승인한다. 셋째, 청국은 배상금 2억 냥(일본 화폐 3억 엔)을 지불하는 것에 동의한다. 넷째, 종래부터 구미 각국이 갖고 있던 통상 특권을 일본에게도 부여한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 침략의 발판을 구축하였고, 요동반도를 획득하여 대륙 침략의 근거지를 확보하였으며, 대만을 점유하여 非白人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식민지를 영유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식으로 비준서가 교환되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하였다. 하나는 요동반도의 할양을 반대하는 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에 의한 간섭이고, 다른 하나는 대만의 할양을 반대하는 청국정부내의 조약파기론이다.0001)檜山幸夫,≪日淸戰爭―秘藏寫眞が明かす眞實≫(東京:講談社, 1997), 229쪽.

 청일 양국간 강화조약의 내용은 구미 열강 특히 러시아가 좌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조인 직후인 4월 23일 러시아의 주도아래 프랑스·독일 3국의 주일공사는 외무성을 방문하여 하야시 타다시(林董) 외무차관에게,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청의 수도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선국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0002)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8-2(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事項 12 <三國干涉一件>. 요동반도를 환부할 것을 권고하는 각서를 교부했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다.0003)삼국간섭에 대해서는, 李光麟,≪韓國史講座≫Ⅴ(近代篇)(一潮閣, 1981), 359∼360쪽;崔文衡,<閔妃弑害 以後의 列强과 韓國―引俄拒日과 그 後의 情況 變化를 중심으로>(崔文衡 외,≪明成皇后 弑害事件≫, 民音社, 1992);金相洙<閔妃弑害의 國際的 背景―日本政府의 介入과 관련하여>(같은 책) 참조.

 일본정부 당국이 그 대응에 골몰하여 시간을 끄는 동안, 삼국 공사는 28일 이래 거듭 외무성을 방문하여 회답을 촉구하였다. 일본정부는 부득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어 5월 5일 요동반도 환부의 회답서를 삼국의 공사에게 전달하여 삼국간섭은 종결되었다.0004)檜山幸夫, 앞의 책, 234쪽. 이 때 여론은 ‘와신상담’을 주창하고 국민의 애국심과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비등시켜, 조선을 위시로 한 대륙침략을 위해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對露 主戰論이 대세였다. 이후 일본은 대륙침략과 대러전쟁을 위한 군비확장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삼국간섭으로 주도권을 빼앗긴 일본은 조약파기론을 제기한 청국정부와의 외교 교섭에서도 삼국 정부의 집요한 간섭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만 할양을 거부하려고 하는 청국의 노력은 요동반도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는 열강의 이해 때문에 그 지지나 지원을 얻지 못하고 5월 8일 요동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사항은 본래의 조인대로 양국 정부간에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청일 강화조약은 성립하고 전쟁은 종결되었다.0005)檜山幸夫, 위의 책, 230∼231쪽. 요동반도 환부문제는 11월 8일 환부조약과 의정서 체결로 결착되었다.0006)檜山幸夫, 위의 책, 234쪽.

 삼국간섭의 주도국인 러시아는 1891년 시베리아철도 건설에 착수하여 동진 남하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조선을 둘러싼 양국간의 패권다툼으로 받아들여 방관 혹은 소극적 정책을 취하였다.0007)Vladimir S. Miasnikov,<第3次極東戰爭(1894∼1895)とロシアの極東地域における政策の展開>(東アジア近代史學會 編,≪日淸戰爭と東アジア世界の變容≫上, 東京:ゆまに書房, 1997). 그런데 전쟁의 뒤처리가 조선에 국한되지 않고 요동반도 할양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자, 적극정책으로 전환하여 개입하였고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하여 삼국간섭을 단행하게 된다. 프랑스는 러·불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지지하고, 독일은 러시아의 관심을 유럽에서 극동지역으로 돌리기 위하여 이에 동참하였다.0008)宮地正人,≪國際政治下の近代日本≫(東京:山川出版社, 1987), 85∼86쪽.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권위가 추락하자 조선의 조야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 7월 일본군의 조선 왕궁 점령이후 친일정권이 수립되고 나서 친청 반일적인 왕실 및 민씨 척족세력은 ‘궁중과 부중의 분리’라는 명분하에 취해진 내정개혁에 의하여 권력으로부터 축출당하고 있었다. 이 세력을 중심으로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민비가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 Waeber, 韋貝)를 인견하여 국정을 상담하는가 하면, 朴定陽·安駉壽·徐光範·李完用·李範晋 등을 축으로 하는 반일 친러적인 貞洞派라는 정치집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공사의 힘이 약화되면서 친일정권 내부에서도 알륵과 갈등이 노정되었다. 급진개화파인 내부대신 朴泳孝가 그 틈새를 이용하여 ‘자주 독립’의 노선을 천명하면서 이노우에공사와 대립하고 온건개화파인 총리대신 金弘集과 내홍하는가 하면, 보수적인 궁중세력으로부터도 배척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0009)柳永益,<甲午更張을 圍繞한 日本의 對韓 政策-甲午更張 他律論에 對한 修正的 批判->(≪歷史學報≫ 65, 1975).

 5월말 친일파인 趙羲淵 군부대신의 해임문제로 김홍집과 박영효가 심각하게 대립하더니 결국은 김홍집 총리대신이 사퇴하고 박영효가 임시 총리대신을 맡다가 6월 2일 정동파인 박정양이 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이것은 박영효의 주도 혹은 묵인하에 친일파가 권력으로부터 밀려나고 새롭게 친러파가 정권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0010)柳永益, 위의 글. 박영효는 점차 일본으로부터도, 왕실세력으로부터도 견제·배척당하게 된다.

 박영효는 6월 25일, 미국인을 교관으로 하는 시위대가 맡고 있던 궁성 호위를 자기들의 영향하에 있는 훈련대로 교체하려고 상소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거절로 좌절되었다. 이를 빌미로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의 反박영효 세력이 7월 7일 ‘반역음모사건’을 조작하여 박영효 일파를 축출하였고, 그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0011)李光麟, 앞의 책, 365∼367쪽.

 이후 친러파의 정권 장악은 확연히 나타났다. 8월 10일 인사개편에서는 군부대신에 안경수가, 경무사에 李允用이, 내각 총서기에 李聖烈이 취임하고, 8월 24일 단행된 제3차 김홍집내각에서는 김홍집은 원로로서 명색만 유지하고 있을 뿐 실제는 친러파와 민씨세력 일색으로 이루어졌다.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0012)李光麟, 위의 책, 365쪽.

총리대신    김홍집 외무대신    金允植 군부대신    안경수 내무대신    박정양 농상공부대신  金嘉鎭 법부대신    서광범 탁지부대신   沈相薰 학부대신    이완용 중추원의장   魚允中 중추원부의장  申箕善 궁내부대신서리 이범진

 일본세력 쇠퇴의 직접적 계기는 삼국간섭이었으나, 또 다른 문제가 걸려 있었는데 다름아니라 일본이 약속한 차관 제공의 문제이다. 전쟁 도발 후 조선의 정치적 보호국화를 꾸준히 추진하여 온 이노우에공사는 조선 재정의 파탄을 빌미로 차관을 대여하여 경제적 보호국화를 획책하려 하였다. 이노우에는 우선 그 조치로 500만 엔의 차관을 약속하여 1895년 2월말부터 3월에 걸쳐 본국 정부와 협의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본국의 총리대신인 이토, 외무대신인 무츠와의 협의 결과 300만 엔으로 줄어들었고, 그것조차도 민간 차원의 차관이 아니라 임시 군사비에서 충당되는 것이고 조건도 조선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가혹한 것이었다.0013)鄭在貞,<井上馨-明治政府에서의 役割과 朝鮮侵略의 實踐->(≪國史館論叢≫1, 國史編纂委員會, 1989). 우여곡절 끝에 4월 10일까지 300만 엔이 대여되었으나, 조선 왕실과 정부내의 불만은 매우 컸고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세력의 쇠퇴와 러시아세력의 부상을 부추기기에 충분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줄곧 제기되어 온 내정개혁과 차관대여라는 명목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던 이토와 이노우에로 대표되는 ‘文治派’에 의한 조선 침략의 책략은0014)姜昌一,<근대일본의 사상흐름과 조선침략론>(≪오늘에 본 친일문제와 일본의 조선침략론≫, 역사학연구소, 1993). 이 논문에서 필자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츠라 타로(桂太郞) 등 육군 군벌세력의 武人에 의한 무단파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등 문민정치가에 의한 문치파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삼국간섭으로 좌초에 부딪쳤다. 일본으로서는, 계속 그 정책을 추진할 때는 러시아의 간섭을 야기하게 될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는 난국이었다. 이노우에의 표현대로 그대로 방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삼국간섭을 계기로 해서, 이후 조선에서 公(이노우에)은 비상한 난국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일 적극적으로 나가면 露國으로 하여금 간섭의 구실을 주고, 물러서서 소극적으로 나가면 지금까지 고심하여 건설하여 온 개혁 사업은 갑자기 내부적으로 붕괴하여 위기를 낳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아갈까 그만둘까 모두 公의 행동은 제약받았던 것이다. 무릇 우리 정부(일본)의 對韓 방침이 확정될 때까지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방관적 태도로 나아가, 타국에서 조선의 일에 끼여들 기회를 만들지 않도록 오로지 주의하는 길밖에 없다(井上侯傳記編纂會 編,≪世外井上公傳≫4, 東京:內外書籍, 1934, 475∼476쪽).

 이노우에공사는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대해 러시아의 개입이 두려워 어떠한 대응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5월 22일 본국의 무츠외상에게 打電하여, 당국에서 시급히 ‘장래의 對韓方策’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였다.0015)井上侯傳記編纂會 編,≪世外井上公傳≫4(東京:內外書籍, 1934), 479∼480쪽.
春畝公追頌會 編,≪伊藤博文傳≫下(東京:統正社, 1940), 247쪽.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6월 4일 내각회의를 열어 ‘장래의 대한방침은 가능한 한 간섭을 그만두는’ 불간섭 정책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조선 내정의 문제는 물론 철도부설·전신가설의 건에 대하여서도 무리하게 강행하지 않도록 하는 응급조치를 이노우에공사에 하달했다.0016)春畝公追頌會 編, 위의 책, 248쪽.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198 對韓政策ニ關スル閣議案.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의 응급 처방일 뿐, 이것으로써 조선문제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이노우에는 장래의 대한방책을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6월 7일 서울을 출발하여 20일 요코하마(橫濱)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 즉시 천황을 비롯한 정계 지도자에게 현지의 사정을 보고하는 한편, 7월 2일의 각의에서 자기 나름의 대한방책을 제시했다.0017)井上侯傳記編纂會 編, 앞의 책, 483∼491쪽.
杉村濬,≪在韓苦心錄≫(日本外務省, 1932), 155∼159쪽.
요컨대 그것은 차관이라는 미끼를 가지고 왕실을 매수하여, 민비를 위시한 왕실의 러시아 접근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문치적인 방식, 즉 회유와 공작으로 왕실과 내각을 친일화하여 조선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는, 이노우에의 입장에서는 최선·최후의 책략이었다. 이 책략의 채택 여부는 그의 진퇴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상의 제 조건(장래의 對韓方策)을 가능한 한 빨리 결정한 후, 本官(이노우에)의 귀임을 요한다면 언제라도 귀임할 것이고, 또한 신임공사 파견의 경우라도 본관의 희망은, 공사 그 사람은 細軍(민비)의 交際 등에 능란한 인물을 특히 뽑아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적임자를 내정한 후에는 발표 전에 본관이 일단 귀임해서 종전의 사정과 장래의 조치 등에 대해 대군주(고종) 및 왕비(민비)에게 잘 奏聞하고, 또한 각 대신과 신임공사와의 사이에 대해서도 유감없도록 하고 싶기 때문에 이 뜻도 一考하여 주시기 바랍니다(井上侯傳記編纂會 編,≪世外井上公傳≫ 4 , 491쪽).

 위의 진언은 자기의 제안이 받아들여졌을 때는 다시 귀임할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는 사임하겠다는0018)<岡本柳之助訊問調書>(伊藤博文公 編,≪朝鮮交涉資料≫中, 東京:秘書類纂刊行會, 1936)에 의하면, 이노우에는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오카모도에게도 사임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다. 것으로, 7월 2일 단계에서는 사임할 확고한 의사를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가 일본 체류시에 경질이 결정되어 후임에는 미우라 코로(三浦梧樓)가 내정되었다.0019)미우라의 공사임명 과정에 대해서는 姜昌一,<三浦梧樓公使와 閔妃弑害事件>(崔文衡 외,≪明成皇后 弑害事件≫, 民音社, 1992) 참조.

 삼국간섭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위세는 점차 통하지 않게 되고, 친일파 세력은 정권으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했다. 7월초 이노우에공사의 일본체류 중에 일본의 비호 아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박영효 내무대신이 실각하여 일본에 재망명하는 사건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였다.

 내정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궁중과 부중의 분리책’은 주지하다시피 왕권을 완전히 무력화시켜 조선을 지배한다고 하는 이노우에의 책략이었다. 그런데 삼국간섭이라는 국제적 압력속에서 일본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강압정책이 통하지 않게 되면서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왕권파는 서서히 권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일본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7월 21일 급거 귀임하고부터는, 종래의 태도를 돌변하여 국왕 및 왕비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였다. 종래 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보호국화하려고 하는 ‘法典政略’을 포기하고 왕실을 회유하고 매수하려는 ‘宮中政略’으로 대전환한 것이다.0020)安達謙藏,≪安達謙藏自敍傳≫(東京:新修社, 1960), 53∼54쪽. 지금까지 적대적 입장을 취해 왔던 왕실에 대해서도 ‘조선의 독립과 왕실의 보호’를 奏上할 정도였다.0021)井上侯傳記編纂會 編, 앞의 책, 495∼520쪽.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48 謁見顚未竝ニ寄贈金ニ關シ內申ノ件.
뿐만 아니라 이전 차입금 300만 엔의 返濟기한을 5년에서 15년 내지 20년으로 연기시키고, 본국으로부터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차관 300만 엔을 제공한다고 미리 미끼를 던져 왕실을 매수하려고 획책하였다.0022)井上侯傳記編纂會 編, 위의 책, 500∼502쪽 및 517쪽. 그리고 종래 스스로의 ‘내정개혁안’을 번복하여 버리는 17개조의 의견을 제출하여, 왕비를 비롯하여 민씨 척족세력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0023)井上侯傳記編纂會 編, 위의 책, 503∼511쪽.

 8월 24일 제3차 김홍집내각이 구성됨에 이르러서는 친일·친러의 연립내각을 모색하여 국왕·왕비를 위시하여 조선정부의 일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고 진력하기도 하였다.0024)井上侯傳記編纂會 編, 위의 책, 512쪽. 이미 ‘引俄拒日(러시아를 끌어당겨 일본을 몰아 냄)’의 방침은 확고한 것이었고 일본세의 쇠퇴·러시아의 부상은 불가항력적인 대세였다.

 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의 대조선정책에 대해서는 당국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론도 비판적이었다. 외상 무츠는 “이노우에는 닭을 잡는 데에 소잡는 칼을 사용하는 격이어서 점점 평판이 좋지 않아 君(무츠)은 부득불 이토에게 도모하여 그를 불러들였기 때문에 이노우에는 매우 불평하고 있었다”0025)≪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281 對韓政策ナルモノニ對スル意見伊藤總理ヘ陳述方ノ件.
阪崎斌,≪陸奧宗光≫(東京:博文館, 1898), 287쪽.
고 평하고 있다. 다음의 구절로도 당시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경성에 재류하고 있던 우리 민간 지사(일본인 낭인)가 이 모양(일본의 후퇴와 러시아의 진출)을 보고 切齒扼腕한 것은 무리도 아니다. 일본의 內地에 있어서도, 有志 사이에서는 조선의 정세를 걱정하고, 정부로 하여금 이노우에공사를 귀환시켜, 더욱 剛毅果敢한 인물을 공사로서 파견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뒤에서 정부쪽에 향해 헌책하는 자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결국 그 필요를 인정해서 이노우에 대신에 육군중장 미우라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葛生能久,≪東亞先覺志士記傳≫上, 516∼517쪽).

 이노우에의 후임자로 내정된 자는 예상외로 외교에는 전혀 경험이 없고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던 미우라였다. 그것도 노련한 정략가인 이노우에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주무 대신인 무츠외상은 반대하였다.

이노우에의 후임에 대해서는 여러 議論이 있어서, 혹은 다나카 후지마루(田中不二磨)를 시키려는 자도 있었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드디어 이노우에의 추천에 의해 무단적 禪將인 미우라를 그 후임으로서 부임시키기로 했다. 君(무츠)은 오오이소(大磯)에서 그의 不可함을 주장했지만 長閥君(長州 出身의 정치세력 즉, 이토·야마가타·이노우에 등)의 세력에 눌리어 그 뜻을 관철시킬 수가 없었다. 이는 君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과연 그 해 10월 8일 흉변을 격발하기에 이르러 불행히도 君은 시비없이 선견지명을 얻었다(阪崎斌,≪陸奧宗光≫, 東京:博文館, 1898, 287쪽).

 당시 일본의 정치권력은 이토·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이노우에를 거두로 하는 長州閥에 장악되어 있었다. 미우라는 장주벌이면서도 이들과는 사이가 안 좋을 뿐만 아니라, 藩閥 전제정치라고 비판하는 반정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또한 이노우에의 대조선방책에 대해서도 후임자로 내정되기 이전부터 비판하고 있었다.0026)安達謙藏,<閔妃事件と當時の政局>(≪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黑龍會, 19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야마가타·이노우에 등에 의해 그가 후임자로 결정된 것이다. 여기에는 급격한 상황변화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노우에는 7월 2일 단계에서도 진퇴를 확실히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만일 후임자를 정하게 될 때는 ‘細君(민비)과의 交際’에 능란한 사람을 임명할 것을 진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며칠 안 되어 그 후임자로 그러한 요건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은 미우라를 추천한 것이다. 다름아니라 7월 7일 박영효가 실각하여 일본에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일본에게는 최악의 사태였고 종래의 문치적 방법으로서는 ‘조선문제’의 해결은 전혀 무망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준 셈이 되었다. 그래서 이노우에·이토 등 문치파들은, 그들과는 전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우익적이고 무단적인 미우라를 내세워 조선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노우에는 후임자로 미우라를 추천하고 나서 조선에 귀임하였다.

 이노우에로부터 조선공사의 제의를 받은 미우라는 스스로 외교에 대해 문외한이고 서툴기 때문에 재삼 거절했으나, 끈질긴 부탁에 일단 응낙했다고 한다.0027)小谷保太郞 編修,≪觀樹將軍回顧錄≫(東京:政敎社, 1925), 319쪽. 7월 10일경이다. 미우라는 승낙하는 대신 정부당국에 세 가지 대조선책을 제안하면서, 그 중에서 명확한 방침을 선택하도록 촉구했다.0028)≪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0 對韓政策ニ關スル三浦新公使 意見書:對韓政策ノ訓令ヲ待ツ. 날짜가 8월 17일자로 되어 있으나, 註에서 ‘三浦梧樓 조선공사 발령의 日附로 한다’라고 附記하고 있고, 그 외 다른 자료를 검토하여 보면, 제의를 받았던 7월 10일경 직후에 제출한 것임을 알 수 있다(阪崎斌, 앞의 책, 286쪽;小谷保太郞 編修, 위의 책, 319쪽;井上侯傳記編纂會 編, 앞의 책, 475쪽 참조).

…미리 3조를 진열해서 장래의 훈령을 청하는 바이다. 원하건대 다시 심의하여 不拔의 대한방침을 국시로 정할 것을. 제1조, 지난해 征淸의 주의에 則하여 조선을 동맹의 독립 왕국으로 인정하고 장래 우리(일본)의 혼자 힘으로 전국(조선)의 방어 및 개혁을 담당하는 책임의 방침을 취할 것인가. 제2조, 우리의 혼자 힘으로 조선 독립 개량의 책무를 꾀하고 또한 보호 및 점령의 웅심을 억제하여 구미 열국 중 공평한 나라와 함께 도모하여 공동 보호의 독립국으로 하는 방침을 취할 것인가. 제3조, 조만간 반드시 한 둘의 강국과 紛擾가 생기는 것은 가장 예측하기 쉬운 추세이기 때문에 大難事가 일어나지 않은 금일 오히려 무단 결의하여 한 열강(러시아)과 고려 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방침을 취할 것인가. 위 3조 중 제1조는 가장 공명 정대한 방책이기는 하지만 어려운 일 가운데에서도 어려운 일로서 장래 내외로부터 困難 蝟集하고 많은 인력과 금력을 소비하고 恩威 또한 행하기에는 오랜 시간을 요하고, 특히 한 두 강국과 조만간 전쟁을 치를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그렇지만 우리가 堪忍 시종 일관하여 전력을 다해서 수년이 지나면 조선은 우리의 보호하에 속하는 결과가 되니, 또한 천하에 대해 좋은 일이 될 것이 아닌가). …梧樓(미우라 본인) 이미 난국을 돌아보지 않고 목숨을 그 땅(조선)에 바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정부의 방침이 어떻게 정해져도 이에 구애받지 않는다. 단, 앞의 3조의 결정 여하에 따라 은혜적·협박적 혹은 묵종적 정책의 필요가 생기고 寬猛 緩急 모두 이에 준거하여 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0 對韓政策ニ關スル三浦新公使 意見書:對韓政策ノ訓令ヲ待ツ).

 미우라가 제시한 3안은 요컨대 ①일본의 獨力支配, ②공동보호국화, ③러·일의 분할 점령안으로서, 그 스스로는 이 3안 중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라도 제1안을 채택할 것을 은근히 촉구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난국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전력투구할 ‘비장한 결의’까지 표명하고 있기도 하다.

 미우라의 대한방침의 질의에 대해 정부당국에서 아무런 회신조차 없자, 그는 7월 17일, 공사 교섭을 맡았던 노무라 야스시(野村靖) 내무대신을 찾아가서 취임 승낙을 번복하여 버렸다.0029)<7월 18일자, 野村靖(內務大臣)가 井上 全權公使에게 보낸 書翰>(東京:國際韓國硏究院 소장). 이때 미우라를 추천한 이노우에는 7월 14일 일본을 출발하여 19일 인천에 도착하였고, 이 문제는 결국 18일 야마가타와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의 간곡한 설득으로 미우라가 다시 받아들여 수습되었다.0030)<7월 19일자, 野村靖(內務大臣)이 井上 全權公使에게 보낸 書翰>(東京:國際韓國硏究院 소장). 번복과 재수락의 상황 전개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미우라 자신의 표현대로 깊이 숙고한 끝에 번복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부가 그 방침(대조선방침)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나침반 없이 항해를 강행할 수 없기”0031)小谷保太郞 編修, 앞의 책, 320쪽,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한편 이를 통고받은 노무라 내무대신은 미우라가 처음에 승낙한 후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韓地(조선)의 사정을 듣고 그 곤란한 것에 당혹했기”0032)<7월 19일자, 野村靖(內務大臣)이 井上 全權公使에게 보낸 書翰>(東京:國際韓國硏究院 소장).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는 곧 번복한 것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숙고한 끝에 이루어진 치밀한 계산하의 행동이었음을 말해 준다.

 재수락의 설득은 이토와 쌍벽을 이루면서 군벌 정치세력을 이끌던 무단파의 수령 야마가타가 담당하였다. 이때 구체적으로 어떠한 타협이 이루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한 조선의 일에 대하여 공사가 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한 것은 확실하다.

미우라가 제출한 3대 정책은 일이 중대하여 숙고를 요하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渡韓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미우라는 정부의 방침이 없는 채로 도한하는 이상은 임기응변적으로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것이다(<7월 19일자, 野村靖(內務大臣)가 井上 全權公使에게 보낸 書翰>, 東京:國際韓國硏究院 소장).

 그 어느 누구보다도 미우라의 성격과 일 처리 방식을 잘 알고 있는 야마가타가 미우라에게 자유 의사에 따라 일을 처리하여도 좋다고 한 것은 그에게 전권을 부여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결정’ 운운한 구절이다. 즉 이 시점에서는 아직 대조선 정책이 결정되지 않았으나, 빠른 시일내에 결정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 후 과연 일본정부는 3안 중 어떠한 방침을 결정하였을까.

 이에 대해 몇 가지 추정하여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민비를 시해한 직후인 10월 14일, 미우라가 이토 총리대신에게 보낸 보고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獨力支配)을 달성하기 위해 부득불 이것(왕비 시해)에 나오게 된 것이기 때문에, …이번의 일은 그 방법이 좀 졸렬하여 襤褸를 숨길 수 없었다는 비방을 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잘 달성한 것이기 때문에 그 득과 과실을 끝까지 잃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로 외교상의 입장에서 본관를 위시하여 관원(공사관 직원)을 교체시키는 일이 있어도 이와 동시에 현 정부(조선정부)에 대한 방침까지도 바꾸는 것은 매우 不得策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이 주의하여 주실 것을 깊게 희망하는 바입니다(≪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78 事變起因ノ竝其ノ對策ニツキ稟申ノ件 ).

 또한 범죄자들이 히로시마 형무소에 투옥되고 나서 검사의 취조에 대해 사실 진술을 거부하면서, “이(시해사건)에 대해 내각원에게 논술한다면 사실을 말하겠지만, 법정에서는 진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고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0033)≪舊陸海軍文書≫(日本國會圖書館 憲政資料室 所藏, 마이크로필름), 第5回 報告(10月 27日附) 憲兵司令官 春田景義ヨリ兒玉陸軍次官ヘ. 뿐만 아니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고 나서 동경에 상경했을 때, 이토가 환대하지 않고 오히려 시골에 빨리 내려가도록 재촉한 데 대해 배신감을 토로하면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기도 하다.0034)小谷保太郞 編修, 앞의 책, 347쪽. 이러한 정황을 놓고 판단하여 볼 때 이토·야마가타 등 일본정부의 수뇌들은 미우라가 부임하고 나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최소한 미우라가 제시한 3안 중 제 1안인 ‘독력지배책’으로 그 목적을 결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더 나아가 ‘민비제거’의 계획도 사전에 예측하고 있었고 이를 방조·묵인하고 있었음을 시사하여 준다.

 7월 22일 전권공사로 내정된 미우라는 8월 17일 임명을 받고 임지인 조선으로 출발할 때까지 아타미(熱海)의 별장에 머물면서, 많은 조선문제 전문가와 회합하면서 나름대로 치밀히 준비하였다. 여기에는 열렬한 대륙침략론자로서 玄洋社·態本國權黨 같이 근대 일본의 전형적인 우익이 있었는가 하면, 타니 칸조우(谷干城)·시바 시로(柴四朗) 같은 대외강경파의 정치가도 있었다.

 미우라는 당시 유명한 정치소설가이자 중의원도 지냈으며 우익 낭인들과 친교가 깊었던 시바를 참모로서 활동시켰다. 시바는 天佑倈의 다케다 노리유키(武田範之)와 玄洋社의 츠키나리 히카루(月成光, 후에 梶川光으로 개명)와 상의하였다. 시바는 이전부터 이들과 친교가 매우 깊었는데, 다케다는 전형적인 조선 낭인으로서, 1893년 전라남도의 금오도에서 李周會와 교류를 맺고 있었고0035)武田範之,<記 李豊榮事>(≪洪疇遺績≫1, 東京大學 圖書館 所藏).,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는 민씨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천우협을 결성하여 농민군과 접촉을 획책하였던 자였다. 츠키나리는 전형적인 대륙 침략단체인 현양사의 핵심멤버로서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외상에의 폭탄 투척사건에 가담하여 구속된 적이 있는 테러리스트였다.0036)葛生能久,≪東亞先覺志士記傳≫下(黑龍會, 1933∼1936), 249쪽.

 미우라는 이들 3인을 막료로서 동행하여 9월 1일 조선에 부임하였다.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을 참모로 동행시켰다는 점에서, 장차 전개될 일본의 대조선정책을 예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조선의 독력지배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여기에는 친러파의 정점인 ‘민비 제거’의 방법을 포함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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