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1.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 2) 민비시해

2) 민비시해

 0037)민비시해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姜昌一, 앞의 글(1992), 참조.미우라는 임지인 조선에 9월 1일 도착하였는데, 이때 이미 왕권의 강화와 친러파의 정권 장악, 친일파의 몰락은 대세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차관을 통한 왕실 매수라고 하는 이노우에 최후의 책략조차도 일본정부에서 확실한 회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다.0038)葛生能久, 앞의 책(上), 517∼518쪽.이노우에공사는 8월 6일 본국 정부에 그 동안 왕실과의 접촉 과정을 보고하면서, 재삼 ‘寄贈金의 件’을 임시국회에 제출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대해 본국에서는 “임시국회를 소집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확답하기 어렵고, 이는 총리대신 이토와 협의한” 것이라고 답신하였다.0039)≪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250 井上公使ニ至急歸朝方通達ノ件. 이노우에는 9월 4일 본국 정부에 대하여, 이미 국왕 및 정부에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성사되지 않으면, “후임자 미우라는 설자리조차 없어질 뿐만 아니라, 더욱 국왕 및 정부에 대해 위신도 완전히 없어지고 또한 조선을 포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숙의하여 줄 것”을 재차 요청하였다.0040)≪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251·252 寄贈金ニ關シ請訓ノ件 및 문서번호 254 寄贈金ニ關シ熟議要請ノ件. 그러나 미우라는 부임하기 이전부터 이미 ‘기증금의 건’은 성사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부임하고서 이를 이노우에에게도 알려 주었다.0041)杉村濬, 앞의 책, 160쪽. 이노우에는 이미 寄贈金이 가망 없음을 알면서도, “조선정부는 일본의 충고에 따라 개혁 성공의 전망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이를 기증한다”라고 조건을 붙여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고 있다.

 미우라가 부임한 이후 친러파의 득세와 친일파의 몰락은 더욱 촉진되었다. 미우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전개였다. 그는 두문불출하여 ‘염불공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불경을 외우면서 세상일을 잊은 것처럼 위장하였다.0042)葛生能久, 앞의 책(上), 517쪽. 정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특유의 과감한 수단을 강구하여 국면을 역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0043)葛生能久, 위의 책(上), 518∼519쪽.

 당시 서울에는 우익 낭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와 동행한 시바·츠키나리·다케다 외에, 한성신보사를 경영하고 있던 態本國權黨의 아다치 겐조(安達謙藏)·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玄洋社의 후지카츠 아키라(藤勝顯)·사세 쿠마테츠(佐瀨態鐵), 天佑俠의 오오자키 마사요시(大崎正吉), 조선의 宮內府 고문관 직함을 갖고 있던 오카모도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다. 열렬한 대륙 침략주의자인 낭인들은 국면 타개의 방책은 민비 제거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자들이었다.0044)<岡本柳之助訊問調書>(伊藤博文公 編, 앞의 책).

露國의 세력이 도도히 조선 반도에 침입하는 근원은, 실로 이 궁정의 한 여성, 민비 그 사람의 一頻一笑의 사이에 생겼다. 무서운 東亞의 禍源이 그곳에 배양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일본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는 一心에 치달아 장래의 화에는 마음 쓰지 않는 것이었다. 동아를 구하고 조선을 구할 수 있는 眼前의 유일하고 가까운 방법은 민비를 죽이는 데 있다. 민비를 죽여라! 민비를 죽여라!이러한 것이 당시 경성에 在留하고 있는 志士의 절규였다(葛生能久,≪東亞先覺志士記傳≫ 上, 522쪽).

 이들 우익 낭인들은 대외 강경운동이래 미우라와 직접 친교를 맺고 있거나, 아니면 막료로서 동행한 시바·다케다·츠키나리와 깊게 연결되는 자들이었다. 미우라는 우익 낭인들과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대외론을 포함한 사상과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궤를 같이하고 있는 자였다. 단지 그는 육군중장의 고급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일각에 자리잡아 정계의 흑막으로서 또는 우익의 거두로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미우라공사가 당시 독력지배라는 대조선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취할 수 있는 방도란 그 개인의 성향과 행동양식에 규정되기도 하지만, 당시의 정황속에서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하나는 러시아와의 전쟁 혹은 협상을 통하여 그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조선내의 친러세력을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 내지 협상의 방안은 공사의 권한 밖의 사항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군무에 종사하여 양국의 군사력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미우라에게 전쟁 등의 직접 대결의 방식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당시 공사의 직분으로서 할 수 있는 길이란 오로지 후자의 친러세력 제거였을 뿐이었다.

 “민비를 죽여라”고 외치고 있던 낭인들뿐 아니라 미우라 자신도 조선의 실권은 민비가 장악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민비를 통해 세력을 부식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0045)葛生能久, 앞의 책(上), 519쪽.
小谷保太郞 編修, 앞의 책, 524쪽.
민비를 제거하여 친러세력을 제거한다는 방침은 미우라가 공사로 임명되는 순간부터 확고하였다. 곧 미우라의 과감한 수단이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민비 제거 즉 시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미우라는 이노우에 前공사(당시 조선 체제 중)와 상의하면서 매우 신중하고 치밀하게 이 계획을 추진하여 나갔다. 공사관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낭인 및 공사관 직원들을 통해 대원군·李周會 등 반민비세력의 동향은 물론 일본인의 성향까지도 상세히 파악하여 갔다.

 9월 20일경에 민비시해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9월 21일경 아다치가 미우라의 對韓決意를 묻기 위해 방문했을 때, 극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아무리 해도 한 번은 여우사냥(민비 살해)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의 밑에 젊은 놈이 몇 명 정도 있는가”라고 묻고 낭인 동원을 명령하였다.0046)安達謙藏, 앞의 책, 55∼59쪽. 아다치는 한성신보사의 낭인 동원에 국한된 행동책에 불과했음에도, 그 임무가 이때 이미 하달될 정도였다. 사실상 9월 초순부터 미우라와 함께 내한한 시바와 다케다가 조선측 가담자인 이주회와 빈번히 회동한 것,0047)大崎正吉,<李周會氏に就て>(≪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黑龍會, 1928). 하순이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 領事館補)와 오카모도가 대원군을 여러 차례 찾아 간 것 등도 모두 짜여진 각본에 의한 작업이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오카모도는 이노우에가 퇴임하여 귀국할 때 본국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같이 귀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노우에와 미우라가 간곡히 만류하여 체류하게 되었다.0048)<岡本柳之助訊問調書>(伊藤博文公 編, 앞의 책). 오카모도란 자는 대원군과 가장 가까운 일본인이기 때문에 차후에 대원군을 이용할 때 그 역할을 담당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노우에 前공사가 9월 21일 조선을 떠나자마자 미우라는 본격적으로 민비시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시해 계획의 개요는 반민비세력의 거두인 대원군과 해산 위기에 직면한 훈련대를 이용하여 이들에 의한 쿠데타로 위장하고, 그리고 이들이 입성할 때 일본인 낭인들을 동원하여 민비를 시해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낭인을 참가시키는 것은, 아무리 반민비세력이라 할지라도 민비를 살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조선인에 대한 의구심0049)≪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이를 작성한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 일등영사는, 사건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인물로서, 이 보고서는 사건의 전모를 밝힘에 있어서, 가장 객관성을 띠고 있고,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미우라는 우치다에게 사건 당일 본래는 조선인만 이용할 계획이었으나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본인을 투입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과 만일의 경우 발각되었을 때 일본정부의 책임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0월 10일을 거사일로 잡았다.0050)위의 글. 이외에도 杉村濬, 앞의 책, 176쪽 등 여러 자료에서 산견된다.

 미우라는 사건의 성패를 쥐고 있는 것은 대원군 문제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9월 하순이래 연일 使者를 대원군 거소에 보내어 동정을 정탐하고 의중을 타진하였다. 9월 하순 호리구치를 파견하는가 하면, 9월 30일에는 낭인 스즈키 쥰켄(鈴木順見)을, 10월 1일에는 와타나베 다카지로(渡邊鷹次郞, 領事館 巡査)를, 10월 2일에는 재차 호리구치를, 그리고 10월 3일과 5일에는 오카모도를 보내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0051)菊池謙讓,≪朝鮮近代史≫下(鷄鳴社, 1939), 398∼401쪽.

 당시 대원군은, 이노우에공사의 재임 중에는 궁중·부중 분리정책에 의해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여 있었고, 민비가 재등장하기 시작하고서는 민씨세력에 의해 거의 유폐와 다름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신임공사 미우라의 ‘호의’0052)미우라는 대원군을 이용하기 위하여 10월 5일 오카모도로 하여금, 그를 복권시키는 것을 전제로 4개조의 밀약을 맺게 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대원군은 왕을 輔翼하여 궁중을 감독하고, 정무에는 관여하지 말 것 ②金弘集·魚允中·金允植의 3인을 政府 要路에 앉히고, 정국의 개혁을 단행할 것 ③李載冕을 宮內大臣으로 할 것 ④李埈容은 3년간 일본에 유학시켜 才器를 양성할 것(≪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菊池謙讓, 위의 책, 400쪽.
葛生能久, 앞의 책(上), 523∼524쪽.
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단, 대원군이 사전에 살해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10월 10일을 결행일로 잡고 10월 2일을 전후하여서는 각 책임자에게 행동지침이 시달되고 역할이 분담되었다. 즉 시바·이다치는 낭인 동원을, 오카모도는 대원군을,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공사관 일등서기관)는 일본인 및 조선인과의 연락관계를,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公使館附武官 겸 軍部顧問, 中佐)와 마야하라 츠토모토(馬屋原務本, 守備隊隊長, 少佐)는 일본군 수비대 및 일본의 영향아래 있었던 조선의 훈련대 동원을 책임 맡았다. 그리고 이들은 계획·입안의 과정에서부터 참여하고 자문하였으며, 살해할 것을 공동 모의한 자들이기도 하였다.

 대원군을 이용하는 작업까지 끝내고서, 계획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0월 6일과 7일에 걸쳐 오카모도와 구스노세를 일본에 귀국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인천으로 보내어 대기시켰다.0053)≪舊陸海軍文書≫, 第4回 報告(10月 26日附). 이들은 사건의 핵심인물이었고 또한 뚜렷한 관직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후 사실 은폐를 위해서도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태는 절박하게 전개되었다. 본래 계획은 이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풍문으로 나돌고 있던 훈련대 해산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대원군과 훈련대의 쿠데타로 위장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6일 저녁 훈련대가 경무청을 먼저 습격하여 충돌시키는 사건을 저질렀다.0054)杉村濬, 앞의 책, 176∼179쪽.
≪舊陸海軍文書≫, 訓練隊起閉安軍務大臣報告에 저변의 사정과 상황이 잘 설명되어 있다.
물론 일본군 수비대는 마야하라의 지시에 의해 비상대기하고 있었다.0055)≪舊陸海軍文書≫, 第9回 報告(11月 3日附).

 그런데 조선정부는 한시도 치체하지 않고 7일 새벽 2시 훈련대 해산의 하교를 내리고, 7일 오전 9시 군부대신 안경수가 공사관에 와서 미우라에게 정식 통고하였다.0056)≪舊陸海軍文書≫, 訓練隊起閉安軍務大臣報告. 조선인으로서 이 사건에 깊숙이 간여하면서 훈련대 동원책임을 맡은 禹範善(훈련대 제2대대장)도 마야하라소좌와 함께 안경수에 이어 보고하였다.

 한편 스기무라는 10일의 거사를 위한 대비책으로 6일 김홍집 총리대신에게 쿠데타가 있을 것을 미리 알리면서 협조를 당부하였고, 7일 아침에는 김윤식을 만나러 갔다가 훈련대 해산의 內命이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훈련대의 동원은 거사의 대전제였다. 그런데 이미 해산되어 시일이 경과되고 나서는 동원 자체도 용이하지 않고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급히 본래의 거사일을 2일 앞당겨 8일 새벽 결행하게 되었다.0057)杉村濬, 앞의 책, 176∼179쪽 참조.

 미우라는 훈련대 해산을 보고하러 온 마야하라와 우범선에게 그 자리에서 즉각 수비대와 훈련대를 동원할 것을 지시하고, 인천에 대기하고 있던 오카모도와 구스노세에게 즉시 귀경하도록 전문을 보냈다. 호리구치 영사관보를 호출하여, 대원군 입궐에 관한<方略書>를 주면서 오카모도와 용산에서 합류하여 대원군을 끌어내고 낭인배를 지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순사인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郞, 公使館 警部)에게는 사복으로 변장시켜 낭인들과 합류하여 대원군과 함께 입성하도록 지시했고, 낭인담당인 아다치와 구니토모에게는 낭인을 집합시켜 입성하여 민비를 살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0058)葛生能久, 앞의 책(上), 525∼528쪽.

 미우라는 시해의 시간을 8일 새벽 4시 반경으로 잡고,0059)≪舊陸海軍文書≫, 第4回 報告. 여기에서 구스노세중좌는 대원군 입궐 예정시간을 새벽 4시 30분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각각의 행동책임자에게 직접 행동지침을 하달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7일 저녁 7시부터 9시 반까지는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 영사관 일등영사)가 베푼 만찬에 태연히 참석하였다.0060)≪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7일 저녁, 낭인들은 시바가 묵고 있던 巴城館이라는 곳을 본부로 하여 연락을 취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一隊는 한성신보사에 집합하여 오카모도·호리구치와 합류한 후 대원군을 호위하여 왕성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파성관에 남아 있던 낭인들은 기생까지 불러 주연을 끝내고 나서 직접 왕성으로 갔다.0061)菊池謙讓, 앞의 책, 406∼407쪽.

 한편, 인천에서 急電을 받은 오카모도는 7일 밤 12시경 용산에 도착하여, 무장한 낭인배 및 사복차림의 순사 30여 명과 대원군이 사는 孔德里로 갔다. 그들은 대원군 댁의 문이 잠겨 있자 담을 뛰어넘어 문을 열고 들어가 경위병 10여 명을 포박하고 나서, 오카모도가 통역 스즈키를 대동하고 대원군의 방에 쳐들어갔다. 이때 일본인 순사들은 포박한 경위병의 제복과 모자를 빼앗아 입어 조선인처럼 변장하였다.0062)≪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대원군 방에 들어간 오카모도는 2시간 반 이후인 3시 반경이 되어서야 겨우 대원군을 강제로 동행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체된 것은 대원군이 왕궁 동행을 완강히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0063)朴宗根,<三浦梧樓公使の赴任と明成皇后(閔妃) 殺害事件>(≪日淸戰爭と朝鮮≫, 東京:靑木書店, 1982). 그는 밖에 나와 문앞에서 낭인배들에게 민비를 반드시 살해하도록 호령하고서,0064)葛生能久, 앞의 책(上), 528쪽. 대원군을 가마에 태우고 서대문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훈련대와 합류하여 4시 반경에 서대문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본군 수비대와도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수비대가 이를 잘못 알고 남대문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1시간 이상 지체한 후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하게 되었다.0065)≪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이때는 이미 5시 반경으로 날이 밝아 사람들도 나다니고 있을 때였다. 본래의 계획이 1시간 이상 차질을 빚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광화문에서 洪啓薰(훈련대 연대장)이 거느린 훈련대와 조우하여 총격전을 벌이고 홍계훈을 살해하였다. 5시 50분경에 왕궁에 침입하였고,0066)왕궁침입 시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당일 8시 50분발 구스노세중좌의 電文이 가장 신빙성이 있고 정확하다고 하겠다(≪舊陸海軍文書≫, 第4回 報告). 6시 10분경에는 대원군을 勤政殿 옆 康寧殿에 내려놓고서,0067)≪舊陸海軍文書≫, 大院君入闕始末. 여기에서 어느 정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다. 민비의 奧宮인 乾淸宮의 坤寧閣에 난입하였다. 그리고서 그곳에 있던 여자들을 끌어내어 그 중에서 민비라고 생각되는 3인의 여성을 살해하고, 민비를 보호하기 위해 찾아다니던 궁내부대신 李耕稙을 건청궁에서 살해하였다.0068)≪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이러한 광경은 러시아인 사바틴(M. Sabatin, 薩巴丁)과 미국인 다이(William Mc. Dye, 茶伊, 시위대 교관)에게도 생생하게 목격되었다.0069)李玟源,<閔妃弑害의 背景과 構圖>(崔文衡 외, 앞의 책).

 민비 및 궁녀의 살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이는 민비의 침실에 난입한 자가 나카무라 타테오(中村楯雄)ㆍ후지카츠ㆍ테라자키 타이키치(寺崎泰吉, 일명 高橋源次)·구니모토 등의 낭인과 미야모토 타케타로(宮本竹太郞, 少尉)·마키 쿠마토라(牧態虎, 特務曹長) 등의 군인들이 있었고, 또한 민비의 용모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는 데서 온 결과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10월 8일 당일 테라자키가 스즈키 시게모토(鈴木重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자기가 죽인 자가) 왕비이다”0070)≪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市川正明 編,≪明成皇后殺害事件史料集成≫日韓外交史料 5(東京:原書房, 1979), 別紙 第4號 高橋源次(寺崎泰吉의 別名)가 鈴本重元에게 보낸 서한(10월 8일자). 이 편지는≪日本外交文書≫에는 누락되어 있다.
이외에도 陸軍側의 法官 井上 理事가 兒玉 陸軍次官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山邊健太郞,≪日本の韓國倂合≫, 東京:太平出版社, 1966년, 224쪽에서 재인용).
라고 하는 구절에서, 일단은 테라자키가 살해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죽이는 현장에서 미야모토와 마키 두 사람의 일본 군인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확인된다.0071)≪舊陸海軍文書≫, 電文(11月 12日).

 한편 미우라는 7일 저녁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 주최의 연회에서 귀가한 후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새벽에 일어나 스기무라 및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 通譯官)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면서 광화문에서의 총성을 듣고 있었다.0072)小谷保太郞 編修, 앞의 책, 334∼335쪽. 시바도 미우라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하여 공사관에 들어왔는데,0073)≪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미우라는 이들로부터 왕궁 침입을 확인한 후, 6시 5분 공사관을 출발하여 왕궁에 들어갔다.0074)≪舊陸海軍文書≫, 楠瀨中佐電文. 그리고서 7시에 고종 및 대원군을 알현하여 친일내각을 강제적으로 수립하고, 8시에는 김홍집 이하 각 대신을 불러들여 제반의 조치를 강구하였다.0075)≪舊陸海軍文書≫, 大院君入闕始末.

 미우라는 7시 고종을 알현할 때까지, 40∼50분간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었는데, 이때 사건현장에서 민비의 시신을 확인하고 그 처리를 지시하는 등 사건의 뒤처리를 도모하였다. 낭인배들도 궁녀와 왕태자 李拓을 통해 민비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미우라도 직접 민비의 시체를 확인한 후 오기하라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급히 화장하라고 명하였다.0076)朴宗根, 앞의 책, 247쪽. 오기하라의 지시에 의해 낭인들은 玉壺樓의 동쪽에 있는 松林에서 불태웠고, 그 유해는 우범선의 지시에 의해 尹錫禹가 正殿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가지고 가서 묻었다.0077)葛生能久, 앞의 책(上), 534∼535쪽.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그리고 이들 낭인들은 민비의 시신을 凌辱하는 蠻行을 저질렀다고 한다(山邊健太郞,<石塚英藏이 末松 法制局長에게 보낸 보고서>, 앞의 책, 226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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