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1.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 3) 사후 수습과 정황

3) 사후 수습과 정황

 미우라는 대원군과 훈련대를 내세워 왕궁에 침입함과 동시에, 기괴망측한 복장을 한 일본인 낭인과 조선인 경위대의 복장을 한 일본인 순사들을 궁중에 난입시켜 민비를 살해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그 나름의 완전범죄를 위한 조처였다. 즉 이 사건에서 일본인의 개입을 숨기기 위한 위장전술이었고, 만에 하나 일본인 가담사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측의 요청에 의해 개인적 차원에서 가담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예방조치였다.

 이 살해계획은 극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곧 미우라·오카모도·아다치·구스노세·시바 등의 극히 제한된 소수만이 민비살해라는 계획을 알고 있었고,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당일 동원되고 나서, 혹은 사후에야 알 정도였다. 심지어는 참여하지 않는 공사관 직원에게는 사실을 끝까지 숨기기 위해 연막전술을 펴기도 했다.0078)≪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사후의 은폐공작은 더욱 철저했다. 모든 관련자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발설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사후의 은폐공작도 철저히 하였다.

 일본 당국에 시해사건이 처음 전달된 것은 8일 오전 6시 32분발 공사관附 海軍少佐 니이노 도키스케(新納時亮)가 이토 미요지(尹東巳代治) 중장에게 보낸 전보였다.0079)≪舊陸海軍文書≫, 電文. 그리고 다시 오전 9시 20분에는 “국왕 무사, 왕비 살해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0080)위와 같음. 니이노는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던 자임에도 미우라에게 보고하러 온 시바 및 사사키 타다시(佐佐木正)를 통하여 이미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0081)≪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해군측의 보고를 듣고, 육군 참모부에서는 전보로 공사관附 육군중좌 구스노세에게 사실 확인을 명령하였다. 그는 사건 가담자로서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 오전 8시 50분발 전문에서는 대원군의 입궐과 훈련대장 홍계훈의 죽음만을 보고하고 있다.0082)≪舊陸海軍文書≫, 電文. 심지어는 오후 3시 25분발 전보에서도 “한인의 死者, 부인 둘에 병졸 둘은 확실하다. 왕ㆍ세자는 安穩, 왕비의 소재는 알지 못하지만 달리 도망간 증거는 없다”0083)위와 같음.라고 하여 본국의 상부에까지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있다.

 일본 외무성에서도, 동일 오후 1시발 전문에서 왕비 살해 實否를 확인하고 있음에도 당사자인 미우라는 “왕비의 소재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시치미를 떼고, 대원군에 의한 구데타라고 보고하고 있다.0084)≪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4 訓練隊ト侍衛隊ノ衝突狀況等報告ノ件. 이러한 사실 은폐는, 스기무라가 직속상관이었던 이노우에에게 행한 보고에도 일관되고 있다.0085)≪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7 問合セニ關シ回答ノ件.

 미우라도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 외무대신에게 끝까지 허위보고를 하면서, 일본인의 가담여부에 대해서는 일부 긍정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사적 차원(민간인임을 주장)’으로 돌리고 있다.0086)한 예를 들면,≪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68 露米兵入京竝內各一部更迭ヲ報告ノ件. 단, 이토 총리대신에게는 비교적 상세히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데0087)≪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378 事變起因竝基ノ對策ニシキ稟申ノ件., 이는 이토와 사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이루어졌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우라는 외국인 목격자인 다이와 사바틴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막료인 츠키나리를 불러 일본인 낭인 중에서 중형을 각오하고서 끝까지 책임질 자들을 물색하였다. 그것은 대원군이 일본인 壯士를 고용하였고 낭인들이 이에 부화뇌동하여 민비를 살해했다고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츠키나리는 후지카츠와 히로다 토메요시(廣田止善, 熊本國權黨員)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물색하여 대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정부당국에서, 사실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10월 14일 가담한 몇몇 낭인들에 대해 退韓 조치를 내렸기 때문에 이 위장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0088)葛生能久, 앞의 책(上), 537쪽.

 민비를 살해하고 나서 즉시 미우라는 대원군과 상의하여 정부 개조의 인사발령을 단행하였다. 친미·친러파로 지목되던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이범진, 군부대신 안경수, 경무사 이윤용 등을 해임시키고 조희연을 군부대신에, 鄭秉夏 농상공부 협판을 대신서리에, 법부대신 서광범을 학부대신서리 겸임으로, 權瀅鎭을 경무사로, 兪吉濬을 내부대신으로, 李載冕을 궁내부대신으로, 金宗漢을 동 협판으로 임명하고, 총리대신 김홍집, 외부대신 김윤식, 내부대신 박정양을 유임시켰다.0089)李光麟, 앞의 책, 370∼371쪽. 그리고 10월 10일 민비에 대한 폐위 조칙을 발표하였다.

 일본정부에서는 외무성에서 진상규명이라는 명목으로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정무국장을 10월 10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 훈령안에서 “범죄자의 罪蹟은 가능한 한 그것을 밝혀야 하지만 그 區域은 가능한 한 축소할 것을 필요로 한다”라고0090)≪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367 事變調査ノ爲メ小村政務局長渡韓ニ際シテノ內訓案. 하여, 사전에 이미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으면서 은닉과 축소를 획책하고 있다.

 완벽한 각본과 주도면밀한 진행으로 완전 범죄를 노린 민비시해 사건의 계획은 당초 10월 10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10월 7일 훈련대 해산 통고라고 하는 예기치 않은 사태의 진전으로 10월 8일 새벽으로 앞당겨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서 새벽 4시 반경 왕궁에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한다고 하는 본래의 스케줄이 지연되어 날이 밝은 새벽 6시경에야 수행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많은 조선인 및 다이·사바틴 등의 외국인에게 현장이 목격되었고, 즉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의 만행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사건이 일본공사의 주도아래 일본인에 의하여 실행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당국은 부득이 미우라를 위시한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사실 은폐를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 10월 17일에는 미우라를 공사직에서 해임하고 대신에 고무라 정무국장을 공사로 임명하였다. 18일에는 관련자 오카모도를 위시한 낭인들에게 퇴한 명령을 내리고 22일에는 스기무라 등 공사관 관리들에게 퇴한 명령을 내려, 이들 48명을 임기응변책으로 히로시마 감옥에 수용하였다. 그후 재판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진상규명의 흉내를 내다가 다음해 1월 20일에는 ‘증거불충분’이라는 명목으로 무죄판결을 내리고 석방하여 버렸다. 이들 살인자들은 스스로 지사인 양 행동하며 공명다툼을 하는가 하면, 송환될 때는 일본인들로부터 개선장군과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0091)葛生能久, 앞의 책(上), 537쪽.
小谷保太郞 編修, 앞의 책, 344쪽.
그리고 일본의 주권자인 明治天皇은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했을 때, 侍從을 보내 그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할 정도였다.0092)小谷保太郞 編修, 위의 책, 345∼346쪽.

 이 사건은 조선주재 외교관을 통해서 세계 각국에 알려졌고, 미국·영국·러시아 등 열강은 야만적 살인행위로 비난하면서, 사태의 전개와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0093)阪崎斌, 앞의 책, 290쪽. 10월 25일에는 러시아·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일본군의 철수와 조선에 대한 불간섭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본내에서도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함’ ‘세계를 진동시킨 일대참극’의 표현으로 비난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0094)阪崎斌, 위의 책, 286쪽.
≪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24 十月 八日 王城事變ノ詳細報告ノ件.
당시 일본의 대표적 지성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연루자를 엄벌에 처할 것을 정부당국에 촉구하기도 하였다.0095)≪時事新報≫, 1895년 10월 15일, 社說.

 이 사건은 당초 그들의 계획과 기대, 즉 반일적이며 引俄拒日 정책을 취하는 민비를 제거하여 일본세를 다시 회복하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국제적 비난과 압력은 물론 조선의 朝野에 반일운동을 유발시켰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의 정략이 도리어 수포로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열강의 견제로 일본세는 더 이상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10월 30일에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훈련대가 해산되고 새로 친위대(왕궁)와 진위대(지방)가 설치되었다. 11월 26일에는 왕비를 복위하고, 시해사건에 관계한 군부대신 조희연과 경무사 권형진을 파면하였다. 대원군도 스스로 은퇴하고, 李埈鎔은 일본에 유학의 명목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12월 1일에는 왕후시해 사실과 국상을 공표하여 시해 사건의 뒷수습은 일단락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김홍집을 위시로 한 친일내각은 여전히 존속하여 진상규명에 들어갔다. 김홍집내각은 李周會를 사건의 총책임자로 하고 훈련대 副位 尹錫禹를 사건의 장본인으로, 무명의 朴銑을 직접 시해자로 날조하여, 이들 3인을 12월 30일 사형에 처해 마무리지었다. 그 외 조선측 가담자인 군부대신 조희연·경무사 권형진·훈련대 대대장 우범선과 李斗璜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미사변의 소식이 알려지고 왕비의 폐위 조칙이 발표되자, 특히 위정척사 계열의 유생을 중심으로 일본 침략세력을 토벌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상소운동(討逆疏)이 일어나고 의병운동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0096)黃 玹,≪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1955), 186∼188쪽.
李光麟, 앞의 책, 378쪽.
거기에다 김홍집내각에 의해 12월 30일 단발령이 조칙으로 공포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른바 을미의병으로 한말 최초의 의병봉기이다. 의병은 친일 관리뿐만이 아니라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반일 분위기가 일반 민중의 차원으로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재야에서의 이러한 반일 투쟁과는 달리 권력층 내부에서도 반일 움직임이 있었다. 11월 28일 무장한 친위대가 궁성에 쳐들어가 국왕을 친일파로부터 구하려고 했던 이른바 ‘春生門사건’이다. 이 사건은 친일파가 계속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시종원경 李載純, 중추원의관 안경수 등이 친러적인 정동파의 이범진·이윤용·이완용·尹雄烈·윤치호·李夏榮·閔商鎬 등과 밀모하고 언더우드(H. G. Underwood, 元杜尤)·다이·헐버트(Homer B. Hulbert) 등의 미국인의 협조도 얻어 친일정권을 타도하려 한 쿠데타 기도였다.0097)李光麟, 위의 책, 374쪽.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져 11월 28일 南萬里(친위 제1대대 소속 중대장)·李奎泓(친위 제2대대 소속 중대장)이 800명의 군인을 인솔하여 거사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의 실패로 무장군인들은 체포되거나 도주하였고, 주모자들도 피신하거나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0098)李光麟, 위의 책, 374∼375쪽. 일본은 이 사건을 국왕 탈취사건으로 규정하고서 대대적인 일본세 만회와 왕비시해 사건의 무마용으로 활용하였다. 시해사건 관련자에 대한 무죄방면도 이 사건을 빌미로 정당화하고 있고0099)菊地謙讓, 앞의 책, 447쪽. 친일 김홍집내각을 연명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결국 조야의 반일운동이 일본세력을 축출하지 못한 채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1896년 2월 9일 120명의 러시아 해병대가 입성하고 2월 12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고 나서 비로소 친일세력은 소탕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姜昌一>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