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2. 아관파천
  • 2) 아관파천
  • (1) 항일의병의 봉기

(1) 항일의병의 봉기

 을미사변 이후 조선에서 보인 일본의 행태는 자주독립을 갈망하던 조선과 조선의 영토 보전을 기본방침으로 했던 러시아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후 조선과 러시아로부터 그에 대한 대응이 모색되어 간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그 중에서 조선 조야의 대응은 그해 연말로부터 다음 해까지 지속적으로 펼쳐진 의병의 봉기와 고종의 러시아에 대한 접근으로 나타났다. 이 중 보수유생층이 주도한 의병봉기의 중요한 동기는 국모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 시행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 일본의 압제에 직접 대항할 수 있었던 집단은 지방의 유생층밖에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일전쟁 이후 을미사변 직후까지 조선의 농민층이나 군대는 모두 일본군에 의해 이미 초토화되거나 철저히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의병봉기는 19세기말∼20세기초 항일의병 봉기를 본격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의병은 華夷 관념에 입각한 尊王攘夷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일본의 국모시해에 대한 보복의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 단발령의 선포 등 ‘전통문화의 파괴’에 대한 저항의 입장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의병운동은 반일적·반개화적 성격을 띠고 있고, 공격의 주요 대상은 일본군과 그의 구속하에 움직이고 있던 관군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전반적으로는 일본의 위압하에 있던 고종과 측근 인물들의 희망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의병은 주로 중남부 지역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북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즉 춘천의 李昭應, 강릉의 閔龍鎬, 제천의 柳麟錫·李春永·安承禹, 홍주의 金福漢·李 偰, 남한산성·안성의 金河洛, 문경의 李康䄵, 안동의 權世淵·金道和, 영양의 金道鉉, 진주의 盧應奎, 금산의 李殷瓚·許 蔿, 장성의 奇宇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목표는 서울·부산·원산 등 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이 중 대표적이었던 것은 유인석 휘하의 충청도 의병진의 활약이다. 이들은 충주를 점령하여 남부와 중부를 연결하면서 전국을 지휘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0112)尹炳奭,<抗日義兵>(≪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356∼390쪽.

 그런데 의병 중 일부는 고종과 은밀한 연계하에 봉기하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의병이란 일반적으로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봉기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이 국모를 시해한 극단적 상황을 맞이한 데다가 그야말로 조정은 일본의 압제에 의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 의병의 입장은 반일의 입장에서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종은 외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경계하던 러시아의 지원을, 다른 한편으로는 반일적이면서도 집단성이 강했던 지방 유생과 보부상 등의 지원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0113)≪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360 親露派李範晋等ノ隱謀ニフニ報告ノ件.
李鉉淙,<俄館播遷>(≪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81).
Пак Чон Хë, Россия И КОРЕЯ 1895∼1898, (Мockва:Москов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ьІй унnверситет, 1993), pp.7∼39.
吳瑛燮,<乙未義兵運動의 政治·社會的 背景>(≪國史館論叢≫65, 國史編纂委員會, 1995).

 의병의 주요 공격 대상은 전국을 돌아다니던 일본 상인이나 일본군, 친일내각의 이름으로 파견된 지방관리 등이었다. 그 외에 일본군의 통신망을 차단하는 등의 교란작전도 병행하였다.0114)金祥起,<甲午更張과 甲午·乙未義兵>(≪國史館論叢≫36, 國史編纂委員會, 1992). 이렇게 왕비시해와 단발령 등을 계기로 전국 도처에서 의병이 봉기하게 되자 자연히 서울지역은 군사적으로 공동화하게 되었다. 즉 일본군의 구속하에 있던 중앙의 주력부대(친위대)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분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0115)黃 玹,≪梅泉野錄≫, 190∼200쪽.
李瑄根,≪韓國史:現代篇≫(震檀學會, 1963), 726∼729쪽.
이러한 현상은 당시 일본의 압제하에 활로를 추구하던 조선은 물론, 일본의 조선지배 기도로부터 ‘조선의 독립보전’을 지향하던 러시아가 공동의 대응책을 강구하기에 유리한 상황을 제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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