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2. 아관파천
  • 2) 아관파천
  • (2) 스페이에르의 내한과 고종의 아관파천

(2) 스페이에르의 내한과 고종의 아관파천

 당시의 열강 중에서 일본의 왕비살해와 이후의 조선 장악 기도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나라는 러시아였다. 주지하듯이 러시아는 동서의 연결을 목표로 1891년이래 유럽에서 동아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는 장장 5,500마일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중이었다.0116)“The Great Siberian Railway” in Charlemagne to Tower, No. 227, St. Petersburg, May 26, 1900, Despatches from U. S. Ministers to Russia. 거기에는 경제와 군사적 이해가 두루 결부되어 러시아로서는 가히 사활을 건 사업이었다. 따라서 상기 철도의 순조로운 완공을 위해 러시아는 동북아의 안정을 원하였고, 만주와 한반도의 현상유지는 그래서 필수적이었다. ‘조선의 영토보전’과 ‘조선의 현상유지’를 기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던 1880년대 후반의 李鴻章-라디겐스키(Ladygensky)협정과 코르프(Korf)-지노비에프(Zinoviev)회담, 나아가 일본에 조선의 ‘자주독립’ 유지를 촉구했던 삼국간섭 당시의 대일각서도 그러한 방침과 맥락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의 사태에 대해 러시아는 조선 현지에서 어떻게 대응하여 갔는가. 러시아의 조선에서의 입지는 여러 변수에 의해 삼국간섭 당시와 같을 수 없었다. 삼국간섭에 참여했던 독일이 청국에 대한 차관의 제공문제에서 소외되어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요동반도 반환문제도 러시아의 중재하에 이미 타결을 보았다.0117)朴英宰,<淸日戰爭과 日本外交>(≪歷史學報≫53·54, 1972).
金元洙,<淸日戰爭 및 三國干涉과 러시아의 對韓政策>(≪韓露關係 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이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이해관계가 적은 프랑스나 독일 등의 협조를 끌어내 대일견제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은 러시아 스스로 확립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896년 1월 8일 신임 주한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 士貝耶)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스페이에르는 헌병 장교출신이었던 부친답게 과감한 성격의 인물로, 1885∼90년 사이에 주일공사를 역임한 일본통이었고,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미 1885년 조선정부와 러시아 군사교관 고빙문제를 적극 추진했던 인물이다. 한편 멕시코주재 공사로 발령받은 베베르(Karl I. Waeber, 韋貝)는 그해 12월 러시아정부로부터 후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따라서 스페이에르의 도착과 함께 서울에는 자연히 러시아의 두 외교관이 함께 머물게 된 셈이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고종이 베베르의 유임을 거듭 러시아황제에게 요청했던 점, 또한 러시아도 을미사변 이후의 조선 사태에 대해 대응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서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취해진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러·일·영·미의 자료에도 불구하고 스페이에르가 서울에 부임하면서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시를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에 부임한 이후는 물론, 부임과정에서 보인 그의 활동은 일정한 목표로 향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스페이에르는 부임도중 동경에 들려 주일 러시아공사 히트로보(Mikhail A. Khitrovo)와 일본의 당로자들을 만나 조선에 관한 의견을 청취한 바 있다. 그가 동경에서 만난 이토총리나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외상 등은 대원군이 조선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하였고,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여할 생각이 없으며 조선의 독립을 존중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선문제에 대해 러시아와의 화의교섭을 통해 평화적 안정유지를 위한 양국의 협정체결을 희망한다고 하였다.0118)George Alexander Lensen, Balance of Intrigue:International Rivarly in Korea and Manchuria, 1884∼1899(Tallahassee:University Presses of Florida, 1982), pp.575∼580.

 그러나 스페이에르가 도착한 직후의 조선은 사정이 전연 딴판이었다. 우선 지방민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왕비시해와 단발령의 강행으로 인해 조선 전역에 걸쳐 의병의 항일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었다. 이들은 만나는 일본인마다 살해하고자 할 만큼 일본의 만행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가설한 전신선을 절단하고 통신을 차단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을 교란시키고자 하였다. 1896년 2월 5일부터 11일까지 약 일주일 사이에만도 조선내에서 피살된 일본인은 36인으로 집계되고 있었다(여주-16인, 원산-10인, 가흥-9인, 서울-1인).0119)Hillier to Beauclerk, Inclosure 1, 3 in No.33, Seoul, Feb. 9, 12, 1896, Inclosure 1 in No. 58, Seoul, Apr. 15, 1896, F.O. 405-70, Ⅷ, Further Correspondence Relating to Corea, China and Japan.(이하 F.O. 405-Ⅷ로 줄여 씀).
朴宗根,≪日淸戰爭と朝鮮≫(東京:靑本書店, 1982), 255∼300쪽.

 서울 현지의 사정도 스페이에르가 일본에서 접한 일본정부 요인과 외교관들의 언급과는 판이하였다. 대원군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도 않았거니와 국왕은 국왕대로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대신들은 일본인 고문관들의 지시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스페이에르는 “일본이 주장해 온 조선의 독립은 하나의 사기극”이라고 주한 일본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히로시마(廣島)재판소 판결을 통해 미우라 코로(三浦梧樓) 이하 50명에 달하는 왕비시해 관련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이라는 명목하에 무죄방면하고 있었다.0120)The Japan Daily Mail(Yokohama), January 20, 1896, Aquittal of the Offices arrested in Connecction with the Korean Trouble of October 8th.

 즉 “관련된 일본군인들은 상관(일본 장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무죄이고, 일본군 장교는 미우라의 명령에 따랐으니 역시 무죄이며, 미우라는 대원군의 요청에 응하여 이들을 현장에 동원하였으나 이미 사태가 일단락된 뒤였으니 모두 무죄”라는 식이었다. 이것은 물론 그 동안에 비판적이었던 열국의 대일 비난 여론에 대한 정면 도발행위였다.0121)The North China Herald(Shanghai), April 17, 1896, The Murder of the Queen of Korea. 그러나 여론은 여론일 뿐 삼국간섭 이후 조선문제를 청국문제와 관련지어 바라보던 각국 정부의 입장은 달랐다. 일본이 이렇게 당돌해진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와 같은 국외적 분위기의 변화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의 내각도 다시 10월 8일 을미사변 당일에 등장한 친일내각의 형국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2월 초에는 일본공사와 접촉을 유지해 오던 조희연이 군부대신에 복귀되는 형편이었다. 조선측 인물 중 왕비시해에 가장 깊은 관련이 있던 그의 복귀에 일본공사 고무라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0122)尹致昊,≪尹致昊日記≫4, 1895년 11월 6일∼1896년 1월 31일.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이에르와 베베르는 러시아의 희망과 배치되는 조선의 국면을 전환시키고자 긴급히 대책을 숙의하였다. 러시아 정책의 주목표는 조선정부에서 친일관료를 제거하는 것임이 틀림없는 바 고종에게 관료의 임명권을 회복시켜 준다면 친러성향의 정부 성립이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종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친일관리의 제거란 일본과의 타협을 통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조정내외에 팽배한 반일의 분위기로 보아 러시아가 직접 나서는 대신 반일파를 지원하여 일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0123)Lensen, op.cit., pp.575∼601.
崔文衡,<閔妃弑害 以後의 列强과 朝鮮>(≪明成皇后弑害事件≫, 民音社, 1992), 205∼207쪽.

 물론 이러한 그들의 계획 자체는 조선으로부터 호응이 있어야 함은 물론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사전 내락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조건이 스페이에르가 서울에 도착한 1월초에 이미 갖추어지고 있었다. 우선 고종이 李範晋을 통해 자신의 불안한 처지와 러시아의 지원을 호소하는 메모를 비밀리에 전해왔음은 물론, 1월 중순에는 전임·현임 두 러시아공사가 알현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 고종 자신이 직접 스페이에르의 주머니에 쪽지를 넣어주기까지 하였다. 그 내용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었으므로 고종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진 셈이었다. 도착 직후도 그랬지만, 스페이에르는 고종이 러시아의 지원과 개입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음을 거듭 본국에 타전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 당국에서는 “조선의 현정부를 전복하는 것이 갖는 의미와 이 목적의 수행을 위한 수단이 무엇인가를 유념하라”는 내용의 훈령을 내려 이들을 독려하였다.0124)Lensen, op.cit., p.581.

 이러한 내용의 교신은 일본을 경유하여 이뤄졌기 때문에 주일 러시아공사 히트로보의 견해도 자연히 개입되었다. 그는 스페이에르의 주장에 경악하여 이러한 목적을 위해 러시아가 행동하려면 이후 해빙될 때까지 3∼4개월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스페이에르는, 첫째 조선의 상하 모두가 일본을 증오한다는 것과 일본이 곧 조선을 삼킬 상황이라는 것, 둘째 조선현지의 사정으로 보아 일본과의 협상은 불가능하고,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병력만큼 러시아가 군사를 파견하여 해결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러시아 당국의 적극적 조치가 필요함을 강력히 피력하였다.0125)Ibid., p.580.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입장은 달랐다. 외부대신 로바노프(Aleksei Borisovich Lobanov-Rostovskii)는 “러시아 당국은 스페이에르의 案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군사파견은 거절한다”는 훈령을 보내었다. 이때 동경과 서울의 상황을 거듭 종합한 스페이에르의 판단은 일본이 조선 독립을 존중한다고 운운한 것이 사기라는 것이었다. 실상 주러 일본공사 니시 도쿠지로(西德二郞)는 “일본은 조선에 개입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하였고, 러시아 外部의 아시아국장은 그의 말을 액면대로 해석하여 “대원군이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히트로보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평화적 자세를 주입시키고자 한 사이온지 일본외상 등의 공작에 말려든 듯 하였다.0126)Ibid.

 당시 일본정부는 왕비시해사건 관련자 전원을 사건 3개월만에 무죄방면한 직후였다. 이에 대한 일본언론들의 보도는 대체로 히로시마재판소의 판결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0127)≪時事新報≫, 1896年 1月 23日,<閔妃謀殺事件の豫審終結す:三浦以下四十八名無罪放免>.
The Japan Daily Mail(Yokohama), Jan. 20, 1896, Aquittal of the Officers Arreested in Connection with the Korean Trouble of October 8th.
조선에서는 이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일본인 부랑배들의 행태는 지방민들에게 기고만장한 모습 그대로 비쳐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조정에서는 조희연이 일본공사의 힘을 업고 다시 군부대신직에 복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만간 일본인들이 고종을 살해하고 李埈鎔을 일본에 유학시키고자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준용의 일본유학 운운은 사실상 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원군 자체가 극력 반대하는 일이었다. 거기에다 폭도의 서울 진공설도 돌았다.0128)Satow to Salisbury, No. 3, Tokio, Feb. 20, 1896, Hillier to Beauclerk, Inclosure 1, 3 in No. 33, Seoul, Feb. 9, 12, 1896, F. O. 405-Ⅷ. 이러한 것 모두가 고종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알려진 러시아 자료에 의하면, 바로 이때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는 발상이 고종측근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스페이에르는 “그 계획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생각하였고, 이범진은 상황이 몹시 다급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마침내 스페이에르와 베베르는 이러한 조치가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에 그 계획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승인을 즉각 요청하였으며, 러시아 당국에서는 이를 승인하면서 러시아 황제도 즉각 자국 군함의 인천 입항을 명하였다는 것이다.0129)Lensen, op.cit., pp.582∼583.
Hillier to Beauclerk, Inclosure 3 in No. 2, Seoul, Feb. 12, 1896, F. O. 405-Ⅷ.

 러시아의 의향을 확인한 고종은 스페이에르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였고, 이로부터 俄館播遷을 위한 예비작업이 은밀히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2월 7일 스페이에르는 고종에게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렸고,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경비병이 배치되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스페이에르는 다시 이러한 고종의 뜻을 빌려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군함의 제독에게 서울에 수병을 파견하도록 조치하였고, 러시아장교 4명과 수병 100명이 의병의 서울 진공에 대비한 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야포 한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왔다. 준비가 완료되자 왕과 왕태자는 다음날 이른 아침 궁녀의 가마를 타고 위장하여 가까스로 궁궐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것은 1896년 2월 10일 7시경이었다.0130)영국 관찰에 따르면 러시아 장교 4명과 수병 100명이 야포 1문을 이끌고 입경했다(Hillier to Beauclerk, Inclosure 3 in No. 2, Seoul, Feb. 12, 1896, F. O. 405-Ⅷ).

 이 같은 아관파천의 진행과정에는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친미파 인물들이나 嚴尙宮 및 상궁 김씨 등이 긴밀한 협조를 하였고, 알렌(H. N. Allen, 安連) 등 구미 외교관의 협조도 있었다. 아울러 왕비시해와 단발령 등을 계기로 전국 도처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베베르가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러시아 수병을 입경시키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서울에 있던 병력의 상당수가 이들의 진압을 위해 지방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을미의병 중 규모가 가장 컸던 것으로 알려진 춘천의병장 李昭應은 이범진과 연관이 있던 인물이었고, 이범진 등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충청·황해·경기도의 褓負商과 工兵隊(舊式兵) 등을 궁문앞으로 동원한 것으로 드러난다.0131)≪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360 親露派李範晋等ノ隱謀ニフキ報告ノ件 및 문서번호 361 去十一日事變顚末其後ノ模樣報告ノ件.

 이렇게 볼 때 아관파천은 ①위기에 처한 고종이 이범진을 통한 구원요청, ②조선의 상황에 대한 스페이에르와 베베르의 판단, ③그리고 이들의 보고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일정한 지시와 후원, ④의병의 일부와 보부상 등 조선내 여러 집단의 직·간접적인 협조가 따르는 가운데 진행된 것이었다. 다만 러시아 당국의 아관파천에 대한 사전 인지의 여부나 주한공사의 역할, 그리고 고종의 의향이 어느 정도까지 주동적이고 피동적이었는지를 정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스페이에르와 베베르가 러시아 당국의 훈령을 앞지르는 행동을 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본국 정부의 책임추궁을 회피하고자 스스로 역할을 축소하여 보고했다는 주장도 있고, 그와 달리 고종은 러시아공사측 보다도 필사적이었으며, 실제로 고종 스스로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피신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0132)Synn Seung-Kwon,<The Russo-Japanese Rivalry over Korea, 1896∼1898>(≪中蘇硏究≫5-2(10), 漢陽大 中蘇問題硏究所, 1981), 228∼229쪽.

 이에 관해 스페이에르가 주한 프랑스공사 르페브르(G. Lefevre)에게 언급한 다음의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서울에 도착한 후 나는 조선의 사태를 보고 정말 놀랐다. 한편으로 고종은 대신들의 부당한 요구를 저지할 힘이 없었고, 다른 한편 대신들은 일본공사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상황이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고 보고, 이를 시정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나는 대신들을 권력으로부터 몰아낼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고종이 비밀히 궁궐을 떠나 우리 공사관으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고종은 모든 압제로부터 벗어나 대신들을 해임하고 자신의 의향에 따라 새 내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계획을 직접 고종에게 털어 놓았지만, 이 일을 감행하는 데 그는 주저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이 일이 실패하여 자신의 처지가 더욱 궁지에 몰리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그가 결심을 굳히기까지 나는 수차에 걸쳐 고종이 가장 암담한 처지에 있으며 더 이상 궁궐에 머물러 있으면 그가 매일 암살의 위협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당신도 아다시피 고종은 죽음을 크게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는 나의 주장에 응하여 이 계획을 따르기로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George Alexander Lensen, Balance of Intrigue:International Rivarly in Korea and Manchuria, 1884∼1899, Tallahassee:University Presses of Florida, 1982, pp.587).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은 스페이에르 자신의 구상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아관파천의 진행과정에서 러시아 당국의 일정한 훈령과 지원 등이 있었고, 최종적인 순간 스페이에르와 베베르의 조선 현지 상황에 대한 판단과 합의에 의해 고종의 아관파천이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아무리 고종이 러시아에 지원을 호소하였다 해도, 러시아 당국 및 조선 현지 공사들의 의향과 적극적 지원이 없다면 아관파천은 당초부터 실현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러시아정부가 ①두 공사를 함께 서울에 머물게 한 조치, ②러시아군함의 인천 입항 지시, ③아관파천 전날 100여 명의 수병을 입경시켜 공사관을 경비하게 한 조치, ④스페이에르와 베베르가 수시로 보고하면서 러시아 당국의 훈령을 구한 사실 등은 아관파천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나아가 아관파천이 실현된 뒤 러시아 당국이 “현상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 등은 최소한 아관파천과 같은 형식의 사태수습 자체를 러시아가 희망하였음을 잘 입증한다.0133)李玟源,<露·日의 對立과 高宗의 俄館播遷-을미사변 이후의 조선상황을 중심으로->(≪정치외교사논총≫14, 韓國政治外交史學會, 1996), 113∼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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