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2. 아관파천
  • 3) 친러·친미내각의 성립
  • (2) 조선의 신내각

(2) 조선의 신내각

 다른 한편 같은 시기의 조선 조정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가. 아관파천에 성공한 직후 고종이 취한 조치는 ①친일내각의 교체, ②단발 시행의 강제성 배제, ③의병 해산의 권유, ④적체된 貢稅의 탕감, ⑤경복궁앞 三軍部에 주재한 일본군 수비대의 철수, ⑥춘생문사건 관련자의 석방 등이었다.

 먼저 아관파천 당일 공표된 내각의 구성은 김병시(총리)·이재순(궁내부대신)·박정양(총리대신서리 겸 내부대신)·조병직(법부대신)·이완용(외부대신겸학부·농상공부대신서리)·이윤용(군부대신)·안경수(경무사대신)·윤용구(탁지대신) 등이었고, 같은 달 12일에 윤치호(학부대신서리 겸 학부협판), 22일에 이범진(법부대신)·조병직(농상공대신) 등이 등장하였다.0147)≪舊韓國官報≫, 건양 원년(1896) 2월 11일∼3월말까지의 敍任及辭令. 대체로 초기에는 정동파 인사, 그 중에서도 친미파 인물들이 전면에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친러파 인물로 볼 수 있는 자는 이윤용 한 사람 뿐이었고 친러파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은 10여 일 뒤에야 기용되고 있다.0148)貞洞派 및 親美派의 구분에 대해서는 柳永益, 앞의 책, 49·179·184쪽 및 韓哲昊,<甲午更張中(1894∼1896) 貞洞派의 改革活動과 그 意義>(≪國史館論叢≫36, 國史編纂委員會, 1992)를 참조.

 따라서 아관파천 직후의 내각은 친러파 인사가 중심을 이룬 친러내각이라기 보다는 친미파가 중심을 이룬 ‘친미반일적’ 내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친미파 인물들이 전면에 부각된 배경에는 이들이 아관파천에 협조적이었던 점에도 있지만, 러시아의 의도도 있었다. 즉 친일파가 아닌한 가급적 다양한 인물을 기용토록 하여 러시아가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한다는 인상을 지움과 동시에 아관파천으로 인해 야기될지도 모를 열국의 비난을 미연에 방지코자 한 것이었다. 과거에 일본이 조선 내정에 독점적 개입을 시도하다 오히려 열국의 견제로 낭패를 보았던 일을 베베르 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0149)Sill to Olney, No. 195, Seoul, Feb. 16, 1896, DUSMK;Harrington Fred Harvey, God Mammon and the Japanese: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ican Relations, 1884∼1905(Madison, Wisconsin: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44), pp.307∼308. 이러한 러시아 당국의 방침하에 한동안 현지의 공사 베베르를 통해 투영된 일부의 현상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이 희망하는 내정개혁의 추진이나 자주독립을 고창하는 것을 성원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아관파천기에 독립협회의 창립을 성원하거나 독립신문의 발간, 독립문 건립운동 등에 러시아공사가 기부금을 내는 등 조선정부에 협조적 자세를 취하였던 것은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독립협회의 인물이나 주한외교관들의 보고, 비숍(Isabella Bird Bishop)등의 저술에서 그 시기에 조선의 재정·재판·교육제도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져 “서광이 보였다”고 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러시아의 대한방침에 의해 잠시나마 갖게 된 외압의 상대적 공백으로 인한 현상이다.0150)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rs(Shanghai:Kelly and Walsh Ltd, 1897;Reprint, Seoul:Yonsei University Press, 1970), pp.397∼398, 435∼444.

 둘째, 지나치게 반일적이거나 과격한 인물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나 열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나 거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관파천의 수행과정에서 조선의 핵심인물이자 친러파였던 이범진이 이로부터 한 달도 안되어 불리한 입장에 몰리고, 마침내 주미공사로 발령받아 서광범과 교체된 것은 일본의 공작 등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과거 일본의 경험을 직시한 베베르의 판단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0151)Sill to Olney, No. 224·226, Seoul, June 23, July 17, 1896, DUSMK. 특히 李範晋이 駐美公使로 밀려난 배경에 대해서는 方善柱,<徐光範과 李範晋>(崔永禧先生華甲記念≪韓國史學論叢≫, 探求堂, 1987), 444∼447쪽 참조.

 셋째, 일본이 아닌 한 다른 나라의 인물들을 조선 각부의 고문으로 고빙하는 것을 권장하는 일이다. 영국인 재정고문 브라운이 고종의 지시로 조선의 재정을 조사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것, 미국인 고문 그레이트하우스가 법부고문으로서 왕비시해사건의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또한 재판제도를 개선할 수 있었던 것 등도 베베르의 이 같은 방침에 의해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을 제외한 각국에 철도·광산·삼림·어채 등 각종 이권이 허용된 것은 베베르의 위와 같은 방침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관파천의 부작용이었다.0152)≪尹致昊日記≫4, 1896년 3월 3일.
Sill to Olney, No. 195·224·226, Seoul, Feb. 16, June 23, July 17 1896, DUSMK;Hillier to Beauclerk, No. 46, Inclosure 1 in No. 58, Mar. 24, Apr. 15, 1896, F. O. 405-Ⅷ;Bishop, op.cit., pp.397∼398, pp.435∼444.

 다음으로 정부에서는 종1품 申箕善과 종2품 李道宰를 각기 南路宣諭使와 東路宣諭使로 파견하여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 내용은 의병의 봉기가 국모시해에 대한 설분을 위해, 그리고 군부의 위협과 단발 강행에 대한 격분으로 일어난 명분있는 봉기였음을 인정하면서 각기 해산하여 생업에 종사하라는 것과 의병의 봉기로 인해 지방에 파견된 군대의 즉시 귀환을 명한 것이었다. 아울러 그 동안 의병봉기의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던 단발문제는 각자의 편의에 따르도록 한다는 내부대신의 훈시를 내렸다.0153)≪駐韓日本公使館記錄≫9 (國史編纂委員會, 1993), 164쪽.

 그 다음으로 정부에서는 그 동안 광화문 앞의 삼군부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수비대의 이전을 거듭 재촉하였다.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도 주한 일본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에게 이 문제를 언급하여 조선정부를 거들었다. 이에 고무라는 “이전할 적당한 장소가 없다”거나 “자국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위해 급히 철수할 수 없다”고 구실을 대었다. 내심으로는 ‘서울에서 제일 좋은 장소’를 내어 줄 경우 러시아 병사가 이곳을 차지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수차 재촉함에 따라 일본은 마침내 그들 수비대 병력을 일본인 거류지 부근의 糧餉聽과 일본인 소유 가옥 2개소로 이전시키게 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장차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할 근거로 삼고자 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0154)≪駐韓日本公使館記錄≫9, 157∼159쪽 및 168쪽. 어떻든 그 동안 자국거류민의 보호라는 미명하에 일본군이 조선의 正宮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저간의 사정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을 불허한다.

 기타 춘생문사건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한 수감자들의 석방과 그 동안 적체된 미수·미납의 공세 등을 탕감한 것 등은 일본의 압제에 의해 어지러워 진 민심 수습책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일본에 대한 간접적 항의였다.

 이 시기 조선 조야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일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고종의 아관파천 직전 조선 전역의 상황을 둘러보고 서울에 도착한 러시아장교 카르네프대령과 그 일행의 보고가 이점을 잘 보여준다. 의병이 점령하고 있던 한 두개의 지역을 이들이 방문했을 때 의병들은 그의 국적을 확인한 후 정중히 대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첫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 둘째 만나는 일인은 모두 처형하고자 한다는 것, 셋째 단발령에 불복하며 이를 시행하고자 하는 관리를 처형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0155)1895∼1896년 사이 한국을 여행한 러시아 장교는 ①V. P. 카르네프 육군대령과 그의 보좌관 미하일로프, ②V. A. 알프탄 육군중령 등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중 카르네프의 기록에는 ‘동학의병’ 및 지방민과의 遭遇에 관한 것이 다수 실려 있다. 영국측의 기록에 보이는 러시아장교란 바로 카르네프·미하일로프·알프탄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Hillier to Beauclerk, Inclosure 1 in No. 58, Seoul, Apr. 15, 1896, F. O. 405-Ⅷ;카르네프 외 4인 지음, A. 이르계바예브·김정화 옮김,≪러시아첩보장교 대한제국에 오다≫, (주)가야미디어, 1994).

 반면 그 당시 전국 각 지역(원산 제외)에서 피살된 일인 수는 약 40명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아관파천 자체는 환영할 일이 못되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는 일본의 압제로부터 국왕을 보호해 주고 있다하여 조선의 조야는 한동안 호의적이었던 것이다.0156)Hillier to Beauclerk, Inclosure 1 in No. 58, Seoul, Apr. 15, 1896, F. O. 405-Ⅷ. 을미사변에 대응하여 반일 의병봉기가 발생한 반면, 아관파천에 대하여 반러 의병봉기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아관파천 자체에 대한 일반의 반응은 물론 부정적이었다. 고종이 일본의 간섭을 벗어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한 사실 자체는 국체를 손상하는 일이었고, 또 다시 외세의 간섭을 유발할 소지가 컸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정부의 군사·재정에 관한 지원요청에 대해 러시아가 소극적 반응을 보이고, 게다가 베베르 측근 인물들의 득세와 전횡으로 인해 조정 내외에 비판여론이 일게 되면서 호의적이었던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 갔다. 그에 따라 고종의 환궁문제도 점차 절실한 현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 또한 이러한 변화를 틈타 그 동안 조선에서 실추된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외교와 언론, 기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조선내에 러시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를 기도하면서 환궁공작을 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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