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2. 아관파천
  • 4) 고종의 환궁
  • (2) 궁궐 경비병의 확보와 고종의 환궁

(2) 궁궐 경비병의 확보와 고종의 환궁

 귀국중이던 민영환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러시아 군사교관단과 합류하여 1896년 10월 2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 교관단은 뿌챠타대령 외 13명으로, 위관 2명, 하사관 10명, 군의관 1명이었다. 뿌챠타는 조선 현지에서 러시아 군사교관단에 의한 조선군의 훈련과 조직 등에 관하여 형식상으로는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었다. 뿌챠타는 조선에 도착한 이래 줄곧 조선의 군부와 조선군 조직문제를 놓고 협의를 진행하였다. 조선 군부에서는 군사교관단의 도착 즉시 이들이 조선군 2,200명의 훈련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지만, 러시아 당국의 유보 지시에 따라 이들은 잠시 조선군의 현황 파악과 훈련계획안 마련에 주력하였다.0166)Jordan to MacDonald, Inclosure 1 in No. 3, Seoul, Nov. 11, 1896, F. O. 405-Ⅹ.

 이 과정에서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뿌챠타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 베베르는 다혈질인 주일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의 성향과 대비되어 러시아 당국의 신임까지 상실하여 가고 있었다. 또한 군사교관들이 민영환을 군부대신직에 기용하기를 희망한 반면, 이를 반대한 베베르는 조선내에서 민영환 등의 지지도 점차 잃어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었다.0167)Jordan to MacDonald, No. 89, Seoul, Nov. 14, 1896, F. O. 405-Ⅹ.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근본적으로는 러시아 당국의 외부·군부간의 이견을 반영한다.

 즉 뿌챠타는 러시아 당국, 특히 군부의 입장에 가까웠고, 조선에서 궁궐 경비병의 양성 정도가 아니라 정규의 조선군 조직을 크게 확대하고자 구상하였음이 분명하다. 반면 러시아 외부의 지시를 받던 베베르는 조선 정계 내외의 사정과 조선에서의 영국·일본·미국 외교관들의 관계를 익히 숙지하고 있던 입장에서 영국·일본 등의 간섭을 우려 환궁 이전까지는 가급적 조심스런 행동을 취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러시아 언론으로부터는 너무 親韓的이라 하여, 조선 현지의 군사교관단으로부터는 비협조적이라 하여, 조선정부로부터는 러시아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고 실망시켰다 하여 비난받았다.0168)≪尹致昊日記≫4, 1896년 7월 17일.
O'Conor to Salisbury, No. 39, St. Petersburgh, Sep.24, 1896, F. O. 405-Ⅸ.
Jordan to MacDonald, No. 89, Seoul, Nov. 14, 1896, F. O. 405-Ⅹ.

 이후 러시아 당국이 조선군 훈련에 대한 유보 지시를 철회하여, 마침내 이를 착수해도 좋다는 승인을 한 것은 10월 27일이었다. 약 2천여 명의 훈련을 희망하는 조선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이들 교관은 조선군 중 1개대대의 병력 800명을 선발, 정예화를 꾀하였다.0169)Lensen, op.cit., p.653. 아관파천 이전까지 조선군 훈련대가 일본식의 군사교육을 받고 일본교관의 지휘를 받았던 것과 달리 이제 궁궐을 경비하게 될 조선군은 모두 러시아식을 따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러시아의 교관단이 도착했을 당시 조선군의 현황은 서류상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쳐 모두 7,500명 정도였다. 이 중 지방군 2,500명 정도는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중앙군 4,000명도 소요로 인해 지방에 내려가 있어 실질적으로는 겨우 반수에 해당하는 군사만이 중앙에 있었다. 그나마도 중앙군의 훈련상태나 무장·피복·부식 등은 매우 빈약하여, 당시 외국인 군사전문가의 파악에 의하면, 경찰로서의 구실도 못할 형편이었다.0170)Jordan to MacDonald, Inclosure 1 in No. 3, Seoul, Nov. 14, 1896, F.O. 405-Ⅹ;Captain Mercer, R. M. L. I., to Jordan, Inclosure 2 in No. 7 Seoul, June 11, 1897, F.O. 405-X.
러시아大藏省 編,≪韓國誌-本文篇≫, 678∼681쪽 및 707쪽.
그러나 뿌챠타대령 외 13명의 러시아 교관단이 조선에 온 뒤 성과가 나타났다. 뿌챠타는 기존의 군대에서 장교(25명), 하사관(67명), 병사(800명)를 선발하여 연대를 조직한 뒤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연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0171)Captain Mercer, R. M. L. I., to Jordan, Inclosure 2 in No. 97 Seoul, June 11, 1897, F. O. 405-Ⅹ.

연대참모(Staff Regimental) 인원수 연대소속 장병(Regimental Duty) 인원수
정령(Colonel) 1명 정위(Captain) 5명
부관(Adjutant) 1명 부·참위(Lieutenants) 20명
향관(Paymaster) 1명 하사관(Non-commissioned officers) 67명
    병(Rank and file) 800명

러시아 교관하의 조선군 연대편성 상황

 위의 大隊(800명)는 5개 중대로 나누어 각 중대(160명)에 두 명의 러시아교관을 배치하고 만주에서 온 통역들을 배치하였다. 조선군은 장교일지라도 러시아 하사관의 하위에 있었다. 러시아 장교·하사관은 대대의 대열에 편성됨이 없이 엄격하게 교관으로서 감독하는 역할만을 유지하였다. 러시아장교들은 교련을 관장하고, 그 외 대대의 경리부분을 관리하였다. 러시아 장교들은 교관단장에게만 예속되었으며 조선의 군부대신과 직접 업무에 관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0172)러시아大藏省 編,≪韓國誌-本文篇≫, 679쪽.

 그러니까 각 러시아교관마다 80명의 훈련병이 딸린 셈이었다. 이들의 무기는 물론 러시아로부터 공급되었다. 아관파천 직후에 이미 조선정부에서는 러시아정부에서 제공한 소총 3,000정과 60만 발의 실탄을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인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제 종래의 구식 레밍턴(Remington) 및 기타 다른 소총 대신, 러시아에서 들여온 약 300정의 베르당(Berdan) 소총이 왕궁경비병에게 우선 지급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병사에게 지급되었다.0173)Captain Mercer, R. M. L. I., to Jordan, Inclosure 2 in No. 97 Seoul, June 11, 1897, F. O. 405-Ⅹ.

 첫 3개월은 매일 8시간씩 훈련받았으며, 근무시간은 오전 4시에서 오후4시 사이였다. 한편 3개월 뒤로부터 이들의 근무시간은 매일 6시간이었다가 5시간으로 줄어들었다. 경비병들의 첫 임무는 초소와 궁궐 경비였다. 1개 중대가 매일 궁궐을 경비하였고, 비번인 병사들은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보초 임무와 체력 훈련 및 분대·중대·대대 단위의 훈련과 소총 사격술을 배웠다. 10월에서 12월말까지 약 3개월에 걸친 훈련을 통해 이들의 수준은 전보다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연대의 훈련은 시도하지도 못하였고, 이들을 교대로 채우는 방식이었다. 히멜레프(Lieutenant Hmeleff)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장교를 활용하여 모든 명령어는 러시아말로 했지만 이들은 모두 잘 알아들었다. 이들은 주로 서울이나 근교에서 농사를 짓거나 노동하던 사람들로부터 모집한 병사였다.0174)Ibid.

 이들 연대의 막사는 궁궐로부터 약 4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고, 러시아 교관들의 숙소는 궁궐내에 있었다. 궁궐 주위에는 46개의 초소가 있었다. 이렇게 종래와 달리 엄격한 훈련을 받은 조선군이 그나마 궁궐 경비임무를 수행할 정도가 된 것은 그해 12월 말경이었다.0175)Ibid.

 이렇게 조선군을 양성한 러시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뿌챠타는 이 시기에 조선군대의 조직을 위한 계획을 별도로 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군사교관의 파견도 장기적으로는 조선군대의 러시아화를 통한 보호령화의 우회로를 추구한 것이라는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13명 교관의 규모와 역할, 그리고 양성한 병력의 숫자로 보건데 당시로서는 궁궐 경비를 위한 조선군의 양성에 치중하고 있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즉 고종의 환궁이전까지는 주로 국왕의 근위병 양성, 요컨대 정치적 성격의 군병력 양성에 목표를 둔 것이었고, 그것은 환궁이후로도 러시아가 조선에서 타국(주로 일본)에 비해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 두고자 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사실상 조선의 국방 목적을 위한 정규의 군대 조직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그것은 영국·일본의 반발과 차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성질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민영환특사가 러시아에 체류 중 外部의 아시아국장 카프니스트(Kapnist)가 했던 언질이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국왕 보호와 군대의 조직은 별개의 문제이고, 러시아 당국은 이 문제를 국지적 차원이 아닌 세계정책 내지는 동아정책의 차원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었다.0176)≪尹致昊日記≫4, 1896년 6월 16일. 이것은 곧 국왕 보호를 위한 지원은 국지적 차원이니 별다른 문제없이 수행이 가능하지만, 국방을 목적으로 한 조선군대의 조직은 성격을 달리하므로 러시아측이 신중을 요한다는 의미였다.

 나아가 러시아는 조선 조야의 환궁 여론과 일본의 이면공작, 기타 열국이 주시하던 사정을 감안해 볼 때 환궁이 불가피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왕 환궁이 불가피할 바엔 조선에서 최소한 정치적 우위권 만큼은 유지하자는 것이었고, 그것은 러시아 군사교관의 파견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에 묶어 두는 것이 조선내 특정 당파에게는 유리하지만, 고종이 환궁해도 러시아교관이 지휘하는 군사로 고종의 신변을 보호한다면 환궁이전의 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러시아가 기대했던 당초의 의도, 요컨대 조선의 완충지로서의 기능이라는 소기의 목적도 충분히 달성되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측이 소수의 군사교관을 파견하여 내키지 않으면서도 고종의 환궁에 협조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러시아측은 환궁이 가급적 지연되기를 희망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고종이 환궁한다 하여도 문제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들 러시아교관이 양성한 조선군 모두가 고종의 환궁 이후 궁궐 경비병으로 투입된 것이나, 그 해 연말까지도 고종이 러시아교관이 지휘하는 경비병에 의해 외부와의 접촉이 원활하지 못했던 사실이 이점을 입증한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러시아 군사교관의 활동에 대해 조선의 조야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뿌챠타 일행이 조선에 와서 800명의 궁궐 경비병을 양성하는 동안 조선의 조야는 일단 긍정적인 자세였다. 앞서 보았듯이 민영환특사는 당초 러시아측에 200명의 군사교관과 재정차관 등을 요청한 바 있다. 이것은 러시아의 군사·재정지원을 통해 일본의 압제를 벗어나려 한 소박한 의도이기도 하였다.0177)李玟源,<俄館播遷期의 朝露交涉-閔泳煥特使의 활동을 중심으로->(尹炳奭敎授華甲記念≪韓國近代史論叢≫, 知識産業社, 1990). 그러나 재정지원은 없었고, 군사교관도 200명 대신 13명의 소규모 인원을 파견하였다. 그럼에도 이들 소수의 교관은 일단 궁궐 경비병을 양성하여 환궁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구비하였고, 조선측의 초빙 목적도 일부나마 성취된 셈이었다. 그 점에서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당시의≪독립신문≫에서는 러시아교관에 의한 조선군의 훈련이 국왕의 신변보호와 국내 변란의 방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요지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보인다.

조선이 되려면 첫째 나라가 조용하여야 할 터인데 국중에 소란한 일이 없게 하려면 튼튼한 군사가 있어야 할지라…조선이 큰 군사는 두지못할지언정 적어도 강하고 규모있는 군사를 두어 대군주폐하의 성체를 염려없이 보호할만 하고 국중에 비도들이 없게는 하여야 할지라. 아라사 육군과 해군은 세계에 매우 엄한 법률을 군중에서 쓰는 고로 이런 학교에서 교육한 사관들이 조선 군사를 조련하거든 조선 군사도 규모가 그렇게 속히 되기를 바라노라…아모쪼록 힘을 백배나 더 써서 조선을 아라사와 같이 되도록 만들기를 바라노라(≪독립신문≫, 1896년 10월 24일, 논설).

 즉 군사교관의 궁궐 경비병 양성은 일차적으로 고종의 신변보호에 목적이 있으며, 나아가서는 내란을 진압하는 데도 유용하다 하여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독립신문≫의 1897년 2월 13일자 논설에서도 보인다. 즉 “대군주폐하를 환어하신 후에 보호할 꾀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더라. 환어하시는 것이 옳다는 것은 우리도 옳다고 하거니와 환어하신 후에 무슨 좋은 획책이 있어 위태함이 없는 것을 우리는 모르는 고로 지금 환어하시는 것을 간하는 것이 능한 일로 생각지 아니 하노라”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일본의 내정간섭과 왕후시해로 격앙된 일반의 반일감정,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러시아 군사교관의 조선군 훈련에 대해 일본은 어떠한 입장이었는가. 러시아교관의 派韓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지속은 물론 장래 전조선의 군사력 장악을 통해 조선을 러시아의 요새로 삼으려는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대조선 침략 기도가 좌절됨은 물론 이를 통해 대륙침략을 꿈꾸던 일본에게 결정적인 장애가 될 문제였다. 그러므로 군사교관의 파견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이들의 조선군 훈련은 일본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들의 역할이 궁궐수비대의 양성을 통한 고종의 환궁 목적에 국한한다면 별달리 문제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이유는 고종의 환궁 자체는 조선에서 상실한 세력을 만회할 때를 기다리던 일본측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기 때문이다.0178)≪독립신문≫, 건양 2년 2월 13일, 논설 참조. 다만 환궁의 범주를 넘어서서 군사교관이 조선 군대의 조직에 관여한다면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공사는 러·일협정의 위반이 아닌가 하고 넌지시 따지면서 다짐을 받아 두고자 하였다. 그러자 베베르도 조선군 훈련은 궁궐 경비병 양성을 위한 것이며 궁궐의 경비 태세가 갖춰지면 고종은 곧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만 답하였다.0179)Jordan to MacDonald, Inclosure in No. 71, Seoul, Mar. 19, 1897, F. O. 405-Ⅹ;Satow to Salisbury, No. 40, Tokio, Mar. 26, 1898(British Document on the Origin of the War 1898-1914, Vol. 1, p.25). 러시아측은 군사교관의 조선군 훈련이 궁궐 경비병의 양성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베베르는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였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 군사교관의 조선군 양성과 조직을 방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우선은 환궁이 최대 관건이므로 궁궐 경비병의 양성에 대해서 만큼은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일본의 이러한 소극적 반응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의 반일감정을 유화하는 일만도 쉽지 않았다. 청일전쟁 중 자행한 경복궁 유린과 삼국간섭에 대한 왕비시해의 만행 등으로 일본은 조선의 조야로부터 성토를 당하고 있었다. 독립신문 등의 논조도 그렇거니와 당시 전국적으로 만연했던 조선 각지에서의 일본인 살해는 조선인들의 격앙된 반일감정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러시아교관의 조선군 훈련을 처음부터 일본이 문제삼을 수는 더욱 없었다. 환궁을 열망하는 조선 조야의 반일감정을 증폭시킴은 물론, 러시아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결과밖에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환궁을 고대하는 일본측에도 결코 유리할 것이 없었다. 결국 환궁에 대비하여 궁궐을 수비할 조선군의 양성에 목적이 국한된다면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이 일본의 기본 입장이었다. 일본은 모든 문제에 대한 쟁점화를 환궁 이후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러시아와 일본의 이해가 교차되는 가운데 조선군이 소기의 훈련을 마친 것은 그 해 연말이었다. 이에 뿌챠타는 고종이 환궁할 경우 궁궐의 경비를 맡을 병력이 갖추어졌다고 보고하였고, 명례궁(경운궁, 현 덕수궁)의 방어시설을 구비해 놓은 조선정부에서는 마침내 2월 20일 고종의 환궁(보다 정확히는 移御)을 단행하였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지 1년만이었다. 그런데 고종이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으로 환궁하지 않고 명례궁으로 이어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경복궁이 거듭 일본군에 의해 유린될 만큼 방어에 취약한 점이 있었고, 둘째 명례궁은 영국·러시아·미국 등의 외교대표부가 에워싸고 있어 유사시 러시아공사관 등으로 피신하기에 용이하다는 점, 셋째 왕비시해의 참극이 빚어진 경복궁을 고종 스스로 벗어나고 싶은 심리적 상태 등이 그것이다.0180)명례궁의 修理役事는 1896년 9월 하순경 이미 준공되어 있었다. 그동안 보수의 중점은 두터운 외벽의 설치 등 경비시설의 확충에 있었다. 왕태자가 명례궁에 설치된 왕비의 빈소를 수시로 출입하며 守喪한 것도 그의 일환이었다(Hillier to MacDonald, Inclosure 2 in No. 42, Seoul, Aug. 22, 1896, F. O. 405-72, Part Ⅸ).

 이상을 통해 볼 때 고종의 환궁을 가능하게 한 현실적 조건은 궁궐 경비병의 확보를 통한 고종의 신변 안전장치의 구비였다. 아관파천 직후 환궁을 요청하는 조선의 관료나 유생의 상소는 많았지만, 실제로 환궁이 실현된 것은 그로 부터 일년이나 지난 뒤였다. 또한 러시아의 재정지원 회피로 조선측이 실망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환궁 이전에 조선측의 러시아에 대한 자세가 결코 적대적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관민의 환궁 상소나 러시아의 소극적 지원에 대한 조선측의 실망 등이 환궁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자체가 환궁을 실현 가능하게 한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조선정부가 민영환특사를 모스코바에 파견하여 대러교섭을 진행한 것은 환궁의 실현을 위한 모색의 첫단계였다 하겠다. 아울러 러시아군사교관의 초빙은 민영환특사가 대러교섭을 통해 얻은 소기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러시아측의 목표도 결부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고종의 환궁을 가장 시급한 일로 여기던 일반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음과 동시에 고종의 신변안전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조선측 당로자들이 취한 적극적 자구노력의 일환이었다.0181)이에 대해서는 高柄翊,<露皇戴冠式에의 使行과 韓露交涉>(≪歷史學報≫28, 1965) 및 李玟源, 앞의 글(1990)을 참조.

 그러나 고종의 환궁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대일우위를 지속시키고자 하던 러시아의 의도가 작용하여 실현되었다. 러시아정부가 내키지 않으면서도 환궁에 소극적이나마 협조를 하게 된 것은 환궁이 조만간 불가피할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던 데다가 고종의 신변 장악을 통해 위로부터 세력을 행사할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러시아 군사교관의 파견과 초빙에서 러시아는 환궁 이후로도 조선에서 기존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점에, 조선측은 궁궐 경비병의 양성과 고종의 환궁을 통해 자주권을 확립하자는 데에 주목표를 두었던 것이다.0182)李玟源,<고종의 환궁에 관한 연구-러시아의 軍事敎官 派韓意圖와 관련하여->(≪한국근현대사연구≫1, 1994).

 이상의 배경하에 취해진 고종의 환궁은 이후 한러관계의 변화에 중요한 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첫째는 환궁 직후 조선에서 노골화된 영국과 일본측의 반러 선동과 공작, 둘째는 칭제 건원과 대한제국 선포 등에서 보듯이 조선측이 모든 외세의 간섭을 벗어나 자주독립을 추구해 간 것, 셋째는 만주와 한반도의 상황과 맞물려 변모해 간 러시아의 대한방침 등이 그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부언하면, 고종의 환궁은 아관파천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한러관계의 접근이 소원해지고, 삼국간섭 이래 한반도에서 러시아가 차지했던 대일 정치적 우위가 쇠퇴해 가는 점환점이기도 하였다.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이 고조되고, 만한을 둘러싸고 영국·일본·러시아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던 1897년말∼1898년초의 상황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0183)愼鏞廈,≪獨立協會硏究≫(一潮閣, 1976), 277∼302쪽.
崔文衡,≪列强의 東아시아 政策≫(一潮閣, 1979), 42∼98쪽.
李玟源, 위의 글(1994).

<李玟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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