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3. 러·일의 한반도 분할 획책
  • 1) 청일전쟁과 한반도 분할안
  • (2) 청일전쟁 중 러·일의 한반도정책

(2) 청일전쟁 중 러·일의 한반도정책

 러시아정부가 아무런 적극적인 간섭을 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8월 1일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8월 21일에 러시아정부는 宮庭 특별회의를 소집하였다. 기르스외상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국은 그 자체로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이 약함으로서 한국이 교전국 중의 어느 하나의 지배하에 들어가 우리 나라에 대항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특히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하게 되면 일본은 한·일 국경의, 또한 우리 나라의 동시베리아 항구들의 대양 진출을 위한 유일한 출구인 대한해협을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日本海에서의 항해의 자유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이것은 우리 나라에 참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0207)Krasnii Arkhiv, Vol. 50∼51, pp.64∼65.

 반노프스키(P. S. Vannovskii)국방상도 한국에서의 현상유지의 보존은 러시아의 극동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일본의 한국 점령을 가장 두려워했다. 위테(S. Iu. Witte)재무상도 기르스외상의 의견에 동의하였다.0208)위와 같음.

 회의 결과 영국을 비롯한 열강과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하고, 한국문제에 관해서는 청일전쟁전의 현상유지 정책을 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당시 러시아는 일본 군대에 의해 한국의 궁궐이 점거된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극동에서의 군사력의 취약성 때문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였다.0209)위와 같음.

 9월에 일본군이 평양전투와 압록강전투에서 대승을 하자 영국은 10월 6일에 영·러·독·불·미 5국에 의한 공동 간섭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한국의 독립에 대한 공동 보장과 일본에의 배상을 조건으로 하였다. 영국의 제안이 성공하면 한국에서의 영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증대될 것을 염려하여 러시아는 이 제안이 러시아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독일과 러시아의 반대로 영국의 제안은 실패로 끝났다.0210)Kassini to Girs, Oct. 29, 1894 ; A. L. Narochnitskii, op.cit., p.646.

 1894년 겨울 러시아정부는 질병과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해 11월초 알렉산더 3세는 사망하고 기르스외상은 거의 사경에 있었다. 外相代理 쉬쉬킨(Shishkin)은 영향력이 없었고, 외무성 아시아국장 카프니스트는 휴가차 유럽으로 떠났다.0211)Kassini to Girs, Oct. 29, 1894 ; A. L. Narochnitskii, op.cit., p.668.

 그 후 청국의 북양함대는 완파되었고, 12월 하순 旅順이 함락되자 청국은 강화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전쟁에서의 계속적인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의 예상을 초월했다. 2월 1일 청일전쟁에 대해 러시아가 독자적으로 활동할 것인지 또는 다른 열강들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인지에 대한 특별회의가 개최되었다.

 2차 특별회의는 알렉산더 3세와 기르스외상이 사망하고 위테재무상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을 때에 소집되었다. 회의 결과 다음 사항을 결정하였다. “청일전쟁 결과 일본이 러시아의 이익에 침해되는 요구를 하게 된다면 일본에 대항하여 공동행동을 취하는 데 대한 협조를 얻기 위하여 영국과 다른 열강들과 협력한다. 태평양지역의 러시아해군 전력을 일본해군 이상으로 증가한다.”

 2월 4일 쉬쉬킨외상서리와의 담화에서 니시공사는 청국에서의 러시아의 이해관계는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보다 중요하지 않고,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 한 전쟁에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무츠외상에게 보고하였다.0212)Krasnii Arkhiv, Vol. 50∼51, pp.67∼73.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555 日淸戰爭ニ關スル露國政府ノ意向報告ノ件, 690∼691쪽.
동시에 히트로보공사는 무츠외상과 인터뷰를 가졌다. 일본외상은 러시아의 신용을 얻어 영국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하여, 극비사항으로서 청 본토의 영토 할양을 요구할 것이라고 히트로보공사에게 말하였다. 러시아공사는 그러한 할양은 현명하지 않은 것이고,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 한 전쟁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0213)≪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561 露國政府ノ態度打診ノ件, 698∼699쪽.

 2월 21일 니시공사는 러시아외무성을 방문하여 쉬쉬킨과 면담하였다. 쉬쉬킨은 러시아의 간섭 여부는 일본이 청의 어느 영토를 요구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니시공사는 그의 사적인 견해로서 일본은 威海衛보다 해군기지로서 여순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쉬쉬킨은 니시공사의 사견을 일본정부의 견해라고 인식하였다. 쉬쉬킨은 숙고하지 않고는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하였다.0214)≪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563 土地割讓ニ關シ露國外相代理ト談話ノ模樣報告ノ件, 701∼702쪽. 쉬쉬킨과의 담화를 나눈 후 니시공사는 무츠외상에게 러시아·영국 및 불란서가 어떤 이의를 제의할 것이지만 그 이의의 정도는 확실치 않다고 보고하였다. 러시아정부가 아직 여순 점령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니시공사에게 정확한 것을 말할 수 없었다.0215)A. L. Narochnitskii, op.cit., p.676. 이 무렵 북경주재 카시니공사는 일본이 大蓮과 여순을 포함한 全요동반도를 요구한다고 쉬쉬킨에게 전보했다.0216)위와 같음.

 2월 27일 무츠외상은 일본정부는 명실공히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다고 러시아정부에 통보하였다.0217)≪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568 媾和ノ基礎タルベキ條件ニ關スル露國ノ提案ニ對シ宣言ノ件, 705∼706쪽. 그러나 실제의 한국 상황은 전연 달랐다. 당시 한국은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 의해 일본의 보호국화가 되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한국의 모든 재정문제를 장악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워싱톤의 한국공사관의 업무를 중지시키고 대신에 워싱턴주재 일본공사로 하여금 한국문제에 관여하도록 한국정부측에 요구했다.0218)Sill to Gresham, No. 78, January 16, 1895, Diplomatic Despatches, Korea.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한국 독립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었는데 러시아정부 관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0219)Krasnii Arkhiv, Vol. 50∼51, p.71.

 러시아정부가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에 대한 간섭정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황제는 三國干涉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2월말까지 독일정부는 공동 간섭에 반대해왔다. 독일 황제의 정책은 청일전쟁 중 영·러대립을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간섭정책에 대한 독일의 반대로 일본은 만주 방향으로 계속 전선을 확대할 수 있었다.0220)A. L. Narochnitskii, op.cit., p.66.

 3월 8일 동경주재 독일공사 구드쉬미트(Gutschimdt)는 하야시 타다시(林董)외무차관을 만나 그 때까지 열강의 간섭이 실패한 것은 독일이 반대했기 때문이었고, 일본의 강화조건을 완화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부언하기를 독일정부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일본의 청국 본토 영토할양은 열강 간섭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0221)≪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571 露國政府ヨリ媾和條件ノ適當ナルベキ事勸告ノ件, 709∼710쪽. 그러나 일본정부에게는 열강 간섭은 새로운 뉴스가 아니었다.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공사는 3월 중순 독일정부에게 일본 군부가 여순항과 대만을 원한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구라파 국가들의 이해 대립을 고려하여 독일의 경고를 무시하였다.0222)Khitrovo to Lobanov, May 10, 1895, A. L. Narochnitskii, op.cit., p.713.

 3월 23일 요동반도의 할양을 일본이 주장하는 것을 알자마자 독일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간섭하기로 결정한다. 곤경에 빠진 아오키공사는 헛되게 독일의 삼국간섭 참여를 예방하려고 노력하였다. 4월 3일에 독일정부는 삼국간섭에 참여할 것을 러시아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한다.0223)Khitrovo to Lobanov, May 10, 1895, A. L. Narochnitskii, op.cit., p.715.

 4월초 로바노프(A. B. Lobanov-Rostorskii)외상은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은 북경에 대한 영구적인 협박이 될 것이며, 심지어 한국의 독립에도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이 점령은 러시아 국익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만일 러시아가 무력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면 일본과 군사적인 갈등을 가져 올 것은 틀림없었다.0224)A. L. Narochnitskii, op.cit., p.695.

 1895년 4월에도 러시아는 단독으로 일본과 전쟁을 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4월 6일 니콜라이 2세(Nikolai Ⅱ)황제는 로바노프외상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는 부동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항구는 한국의 동남부지방에 위치하여야 하며 우리 영토와 연결되어야 한다.”0225)Krasnii Arkhiv, Vol. 50∼51, p.76. 이와 같이 부동항에 대한 짜르의 열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만일 1895년 봄, 러시아정부가 보상정책을 채택하였다면 러시아의 對韓政策은 상당히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상황은 급격히 변화되었다. 독일정부는 러시아에게 여순에서 일본을 몰아내는 일에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4월 11일 또 다른 특별회의가 소집되었다.0226)위와 같음. 위테재무상은 다음과 같이 간섭정책을 주장하였다.

 “일본에 의한 이 전쟁은 우리가 착수한 시베리아철도 건설 결과다. 일본의 남만주에서의 적대행위는 주로 우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고 그 결과 한국은 일본에 병합될 것이다.…곤경에 빠지면 대만·膨湖島, 심지어는 여순항 그리고 한반도 남부까지도 양보하려 하지만 만주만은 결코 아니 된다.”0227)Krasnii Arkhiv, Vol. 50∼51, pp.80∼81. 위테는 러시아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일본점령을 용인하든지 아니면 그 점령을 결단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위테는 후자의 정책을 지지했다.

 부동항 획득을 바라던 러시아황제는 4월 16일에 궁정에서 다시 회의를 소집시켰다. 위테는 니콜라이 2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러시아정부는 독일 및 불란서와 협력하여 삼국간섭을 주도하게 되었다.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6일 뒤인 4월 23일 러·독·불 3국 공사는 외무차관 하야시를 방문하고 일본군은 요동반도로부터 철수하라는 요구를 하였다.0228)≪日本外交文書≫ 28-2, 문서번호 671 獨·露·佛三國公使遼東半島還附勸告シタル旨報告ノ件, 14∼17쪽. 곤경에 처한 일본은 영국에 접근하여 삼국간섭을 견제하려 하였지만 영국의 태도는 냉담했다. 영국의 정책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억제하기 위하여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찬성하는 편이었다. 일본 군부는 일본이 삼국의 군사력과 대항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고 결국 일본정부는 5월 5일에 그들의 요동반도 영토 요구를 포기하였다.0229)≪日本外交文書≫ 28-2, 문서번호 788 三國政府ノ勸告ニ應スル覺書提出スヘキ旨訓令ノ件, 82∼83쪽.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은 영국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독일이 갑자기 삼국간섭에 가담하는 것을 영국정부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삼국간섭의 결과로 영국은 극동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세할 수 없었다. 독일황제의 전략은 영국이 열강 간섭에 불참함으로써 일본의 전략이 만주방향으로 지향하게 될 것이고,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와 대결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0230)A. L. Narochnitskii, op.cit., 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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