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3. 러·일의 한반도 분할 획책
  • 1) 청일전쟁과 한반도 분할안
  • (3) 민비시해와 러시아의 대한정책

(3) 민비시해와 러시아의 대한정책

 영국은 삼국간섭 중 일본을 군사적으로 돕는 데 냉담했다. 영국은 러·독·불 3국이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영국은 일본에게 절제할 것을 충고하였다. 로바노프외상도 니시공사에게 일본이 한국 국내문제에 너무 관여한다고 경고하였다.0231)≪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271 內政改革ニ對スル露國ノ危惧ニ關シ露國外務大臣ト談話ノ件, 413∼414쪽. 이러한 궁지에 몰린 일본정부는 열강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장하는 문제로 영국정부에 접근하였으나 영국은 관심이 없었다.0232)≪日本外交文書≫ 28-2, 문서번호 864 極東問題ニ關スル英國外相ノ談話報告ノ件.

 삼국간섭 이전에 이미 한국 정치는 복잡해져 있었다. 이노우에공사가 수립한 2차 金弘集內閣은 여러 정파로 나누어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내무대신 朴泳孝는 김홍집을 위시한 보수파를 싫어하였다. 국방대신 趙羲淵 등 기존의 친일파세력은 박영효의 권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고종과 왕비는 김홍집과 魚允中을 제거하기 위하여 박영효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박영효가 한국정부의 독재자가 되기 위하여 왕비를 지지하고 이노우에공사를 반대하게 되자 서울의 정치상황은 대단히 혼란스럽게 되었다. 박영효의 행동은 김홍집파 뿐만 아니라 반일투쟁을 벌리고 있는 한국 국민을 격분시켰다. 박영효의 배후에는 왕비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이노우에공사는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0233)Sill to Gresham, No, 123, Znly 9, 1895, Diplomatic Despatches, Korea.
柳永益,≪淸日戰爭中 日本의 對韓侵略政策-淸日戰爭을 前後한 韓國과 列强≫(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168∼170쪽.

 삼국간섭 직후 민비는 ‘引俄拒日政策’을 시작하였다. 민비는 여러 나라의 공사들이 드나드는 貞洞클럽에 侍臣을 보내 외국공사들과 친교를 맺게 하였다. 그 때 일본을 견제하는 데 부심하고 있던 베베르공사는 여러 나라의 공사들과의 연결고리로 민비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즉 민비로 하여금 일본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여러 나라의 외교관에게 이권을 주도록 조언하였고, 민비 또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이권을 허용하였던 것이다.0234)李玟源,≪俄館播遷前後의 韓露關係-1895∼1898≫(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21쪽.

 삼국간섭 이후 국왕이나 왕비는 더 이상 박영효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6월초 김홍집내각이 붕괴되고 새 내각이 수립될 때에 왕비나 이노우에공사는 박영효가 총리대신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결과 힘없는 朴定陽내각이 수립되었다.

 이 무렵 일본의 침략적인 내정간섭에 대해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침략세력에 의하여 수립된 김홍집내각은 사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이노우에공사는 對韓 강압정책에 실패하고 귀국을 서두르게 되었다. 귀국 하루 전 이노우에공사는 오카모도 류노스케(岡本柳之助)와 박영효에게 일본 군대와 훈련대를 사용하여 쿠데타를 실행하라고 지시하였다.0235)伊藤博文,≪朝鮮外交交涉資料≫中(秘書類纂刊行會, 1936), 462∼464쪽. 일본인 顧問官 호시 도루(星亨), 사이토 슈이치로(齊藤修一郞), 무라사키 시로(紫四郞), 사사 마사유키(左左正之) 등은 박영효를 총리로 만들고 왕비를 살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또한 쿠데타를 실행하기 위하여 왕궁 호위병을 훈련대로 변화시키기로 결심하였다.0236)伊藤博文, 위의 책, 464쪽.
杉村濬,≪在韓苦心錄≫(日本外務省, 1932), 138쪽.
葛生能久,≪東亞先覺志士記傳≫下(黑龍會, 1933∼1936), 515쪽.

 6월 25일 친일파의 거두인 박영효는 러시아에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왕실을 호위하던 종래의 호위병을 일본군이 훈련한 800명의 훈련대와 교체하고, 이 훈련대를 이용하여 러시아에 접근하려는 왕비를 살해할 음모를 일본인 오카모도·무라사키·아사야마 켄조(淺山顯藏) 등과 밀모하다가 발각되었다.0237)Sill to Cresham, No. 123. July 9, 1895, Diplomatic Despatches, Korea. 박영효 등은 叛逆陰謀罪로 체포령이 내리자 일본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0238)≪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316 朴泳孝謀反ニ關シ報告ノ件, 456∼457쪽.

 서울에서 쿠데타에 실패한 박영효·아사야마·다나카·무라사키 등은 일본 요로를 찾아다니며, 베베르공사와 한국왕실이 결탁되었다고 중상하였다. 이 사실이 일본 신문지상에 게재되자, 박영효의 허위선전에 대해 러시아공사와 왕실은 이노우에공사에게 항의하여 외교문제로 발전되었다.0239)申國柱,<明成皇后殺害事件에 對한 再評價>(≪明成皇后弑害事件과 國際關係≫, 第5回 國際學術會議, 韓國政治外交史學會, 1995), 8쪽. 이때 이노우에공사의 ‘軟弱정책’에 대하여 일본내의 대외강경파와 현지 한국의 일본관계자로부터 불만이 고조되고 이노우에공사를 대신할 군인 출신의 공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을 외교관출신의 공사로는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이노우에공사는 7월 10일경 國權主義者의 거물이고 군출신이기도 한 육군 중장 미우라 코로(三浦梧樓)를 추천하였다. 미우라는 일본의 대외강경파에 속해있었고 10년 이상 박영효를 원조하고 있었다.0240)Hirao Michio,≪子爵谷干城傳≫(東京, 1935), 711쪽.

 일본정부가 미우라공사를 임명하여 민비를 살해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삼국간섭 이후 對淸 차관문제로 삼국간의 협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독일의 관계는 대청 차관문제로 삼국간섭동안 양국간에 존재했던 협력은 완전히 붕괴되었다.0241)≪日本外交文書≫ 28-2, 문서번호 870 英國外相トノ談話報告ノ件, 154∼156쪽. 영국의 정책은 러시아를 억제하기 위하여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찬성하고 있었다. 독일 황제는 일본의 한반도 점령뿐 아니라 요동반도에서도 일본군이 몇 년 더 점령하는 것을 원했다. 그의 목적은 러·영이 극동에서 대결하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0242)A. L. Narochnitskii, op.cit., p.778.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러시아뿐이었다. 1895년 여름에 한국의 내각이 거의 친러적으로 되었으나 러시아정부는 한국에 대한 적극정책을 취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베베르공사만이 한국정부를 적극 지지하였다. 무력함을 느낀 한국정부는 군대양성을 위하여 러시아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 고종은 군사교관 외에도 의사·엔지니어 및 러시아어 선생을 초대하였으나, 러시아정부는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을 다 거절하였다.0243)V. p. Nikhamin, "Diplomatiia russokogo Tsarizma V Korea Posle Iapono-Kitaiskoi Voiny(1895∼1896)", Istoriia Mezhdunarodnyx Otnoshenii Istoriia Zarubezhnykh Stran(Moscow, 1957), p.140.

 7월 고종은 密使 權東壽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하여 한국을 일본의 점령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러시아정부에 요청하였으나 9월까지 아무 회답을 받지 못하고 귀국하였다.0244)≪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479 朝鮮國密使浦潮ヘ來リタルニ付報告ノ件, 622쪽.
V. p. Nikhamin, op.cit., pp.140∼141.
오로지 베베르공사만이 일본의 영향력을 저지시킬 것을 러시아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로바노프외상은 그의 건의를 묵살하고 그를 멕시코로 전보하기로 결정하였다.0245)V. p. Nikhamin, op.cit., pp.140∼141.

 러시아가 한국에 대하여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7월 중순경 한국주재 공사로 임명된 미우라는 일본의 對韓政策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열강 특히 러시아가 한국문제에 간섭하게 되었고, 만약 일본이 실수를 하게 되면 취소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미우라는 3가지 정책을 제시했다.

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단독으로 한국의 개혁을 실시한다.

② 열강과 한국의 공동보호.

③ 조만간에 반드시 일본은 강대국과의 분쟁이 불가피함으로, 아직 一大難事가 야기하지 않은 오늘날에 차라리 단호한 결의로 一强國과 더불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방침(≪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0 對韓政策ニ關スル三浦新公使 意見書:對韓政策ノ訓令ヲ待ツ).

 ①안을 채택할 경우 1∼2개의 강대국과 전쟁을 할 결심이 필요하다고 미우라는 보았다. ③안의 방침을 결심한다면, “잠시 한국에 대해 관망하다가 협의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신속히 방책을 취해야 한다. 다른 나라를 병합한다는 것은 약탈의 다른 말이니 점령 후에 형세를 협박하거나 혹은 惠恤하면 그만이다.” 현재로는 러시아에게 북방의 부동항이나 함경도 정도를 양여한다면 만족할 것이라고 보았다.

 미우라공사는 9월 1일 서울에 도착한 이후 쿠테타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미우라 뿐만 아니라 러시아주재 일본공사 니시도 한반도를 러시아와 분할하자는 방안을 정부에 제시했다.0246)≪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1 朝鮮問題ニ關スル露國ノ態度報告ノ件, 484∼489쪽. 그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수상도 9월말경 동경주재 영국공사 사토우(E. Satow)에게 한국은 일본이 점령하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0247)George A. Lensen, Korea and Japan, 1895∼1904(Tallahassee, Florida:The Diplomatic Press, 1966), pp.44∼45.

 이와 같이 일본정부는 미우라공사가 서울에 부임하기 전에 한국에서 쿠데타를 실천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9월 1일 서울에 도착한 이후 미우라공사는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인 인물인 閔妃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그 접촉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왕비 살해 흉모에 착수하였다. 미우라는 일본 정규군·領事 警察·劍客 浪人 등을 총동원하여 10월 8일 새벽 민비를 시해하였다.0248)김려호,<明成皇后弑害事件과 朝鮮에 對한 러시아의 政策>(≪明星皇后事件과 國際關係≫, 第5回 國際學術會議, 韓國政治外交史學會, 1995), 31쪽.

 1995년말까지도 일본학계에서는 민비 살해는 일본정부가 직접 관여된 것이 아니고 미우라공사가 현지에서 단독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보고 있다.0249)朴鍾根,<明成皇后弑害事件과 日本의 政策>, 위의 책, 27쪽. 위에서 지적한대로 민비 시해사건은 이노우에공사가 주모자이고 미우라공사는 하수인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0250)“The Situation in Corea”, North China Herald, Nov. 22, 1895.
李玟源, 앞의 책, 34∼42쪽.
일본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민비가 러시아에 의뢰코자 하고, 러시아는 한국을 점령하려고 하여 일본은 한국의 왕비를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왕실과 베베르공사와 밀약이 체결되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정반대다.0251)小早川秀雄,≪閔后暗殺≫(東京:筑摩書房, 1962).
李瑄根,≪韓國史-現代篇-≫(乙酉文化社, 1963), 587쪽.

 청일전쟁이후 영·러·독·불 및 미국은 청국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팽창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중요 관심이 만주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한국문제는 점점 덜 중요시하게 되었다.0252)John Berryman, 앞의 글, p.62.
A. L. Narochnitskii, op.cit., p.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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