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3. 러·일의 한반도 분할 획책
  • 2) 아관파천과 일본의 한반도 분할 제안

2) 아관파천과 일본의 한반도 분할 제안

 민비시해 이후 고종은 자기 궁안에서 포로가 되어 있었다. 景福宮은 일본인이 훈련시킨 훈련대에 의하여 호위되어 있었다. 궁밖에는 1,000명의 일본군이 막사를 치고 있었다. 일본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화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러시아정부는 고종에게 부득이하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0253)Seung Kwon Synn, The Russo-Japanese Rivalry Over Korea(Seoul:Yuk Phub Sa, 1981), p.201.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궁안에서 포로 상태에 있게 되자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여 있던 李完用·李允用·李範晋·尹雄烈·尹致昊 등이 주동이 되어 고종을 궐외로 모시고 김홍집내각을 타도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春生門事件을 일본은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춘생문사건 이후 반일 한국지도자들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의 결사 반대를 외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강원도 春川에서는 李昭應(親露派 李範晉系)이 대대적인 반일운동을 전개하여 春川府 관찰사 曺寅承이 의병들에게 살해되었다. 강원도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단발령을 강요하던 지방 관리들이 응징되자 김홍집내각은 서울의 친위대를 각 지방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의병의 목적은 친일파 김홍집내각을 타도하고 고종을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0254)李瑄根, 앞의 책, 725∼730쪽. 친위대가 의병의 진압을 위해 각 지방으로 분산되자 러시아와 미국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貞洞派들이 베베르와 알렌(H. N. Allen, 安連)대리공사를 접촉하여 俄館播遷을 실시하였다.

 고종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러시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895년 11월 28일 춘생문사건이 있은 이후 고종은 베베르공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러시아군 경비대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왕비를 시해한 한국반역자들에 포위되어 나는 내 생명에 대하여 위험을 느끼고 있다. 새로운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루도 보장할 수 없다. 베베르공사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나에게 러시아군 경비대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한다.”0255)A. L. Narochnitskii, op.cit., p.803.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고종의 요청에 대해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철도를 만주로 통과하기로 결심한 러시아는 만주에 중요 관심이 있었고 한국은 2차적인 문제였다.0256)Pak Chon Xë, Rossiia I Koreia(Moscow, 1993), p.15.

 스페이에르공사는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고종은 전혀 권력이 없고 일본의 괴뢰들만이 단속없이 명령을 하고 왕세자를 일본으로 보내려고 한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왕은 러시아의 간섭을 간청하였다.0257)Xitrovo to Lobanov, Jan. 15, 1896, Ibid., p.26.

 새해가 되면서 고종의 불안과 공포심은 더 증가되었다. 민비시해 책임자로 해임되었던 趙羲淵이 군부대신에 재임명이 되었다. 동시에 일본정부는 민비사건 관련자 전원을 무죄 방면하였다. 이 상황에서 조만간 일본인들이 고종을 살해하고 李埈鎔을 왕으로 앉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0258)李玟源, 앞의 책, 62쪽. 이때 반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가 없는 한국 민중은 친일파정부로부터 고종을 해방시킬 힘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러시아공사는 러시아가 한국을 일본에게 완전히 양보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러시아의 적극적인 역할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였다. 베베르와 스페이에르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병력만큼 러시아 군사를 파견하여 해결하는 것이라고 타전하였다.0259)Shpeier to Lobanov, Jan. 27, 1896, Boris D. Pak, op.cit., p.126. 그러나 러시아 외무성은 군대를 파견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였다.

 춘생문사건 이후 친러파 李範晋은 嚴尙宮을 통하여 大院君과 친일파들이 일본군과 공모하여 국왕을 폐위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고종에게 전달하였다.0260)≪日本外交文書≫ 29, 문서번호 356 奉露主義者ノ國王播遷計等畫ニツキ報告ノ件. 이렇게 상황이 긴급해지자 2월 2일 고종은 이범진을 통하여 두 러시아공사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계획을 통보하였다. 고종은 친일파 반역자들이 왕과 왕세자를 살해하려 한다고 하여 아관파천 후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였다.0261)Shpeier to Lobanov, Feb. 2, 1896, Boris D. Pak, op.cit., p.126.

 러시아대표들은 아관파천이 너무 위험하다고 이범진에게 알렸다. 그러나 고종은 왕궁에 남아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고 통보하였다. 두 러시아공사는 절박한 위험에 처한 고종에게는 아관파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려되어 왕에게 피신을 승락하였다. 고종은 스페이에르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파천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고 통보하였다.0262)Pak Chon Xë, op.cit., pp.28∼29. 이때 고종이 알렌서기관에게 아관파천을 하는 것이 현명한가를 문의했는데 그는 적극 찬성하고 왕과 왕세자가 입을 여자 옷을 제공하였다.0263)George A. Lensen, Korea and Manchuria Between Russia and Japan:1895∼1904 (Tallahassee:The Diplomatic Press, 1966), p.58.

 2월 7일 고종은 스페이에르에게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9일 밤에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고 통보하였다.0264)Pak Chon Xë, op.cit., p.29.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배치되어 있는 水兵의 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2월 9일에 아관파천을 하지 않았다. 고종은 스페이에르에게 러시아공사관에 배치된 수병만으로는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인천에 정박한 러시아군함으로부터 가능한 한 더 많은 수병을 배치해주기를 간청하였다. 왕의 완강한 부탁에 굴복한 스페이에르는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군함의 알렉세에프(E. I. Alekseev)제독에게 서울에 수병을 파견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결과 2월 10일 밤 러시아 수병 100명과 대포 一門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이튿날 고종과 왕세자는 궁녀의 가마를 타고 아침 7시 30분에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하였다.0265)Shpeier to Lobanov, Feb. 11, 1896, Ibid., p.29.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친일 김홍집내각은 붕괴되고 정동파에 의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아관파천을 주도한 李範晋·李允用·李完用·朴定陽 등이 새 내각에 등용되었다.0266)韓哲昊,<俄館播遷期 貞洞派의 개혁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4, 1996), 282·283쪽.

 일부 국내학자들은 아관파천을 러시아정부가 스페이에르공사를 파견하여 그가 주도권을 쥐고 추진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0267)李玟源, 앞의 책, 64∼65쪽.
李瑄根, 앞의 책, 729∼731쪽.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러시아 외교문서에 의하면 고종과 이범진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베베르와 스페이에르는 보조적 역할밖에 하지 못한 것이 확실하게 되었다.0268)Pak Chon Xë, op.cit., pp.23∼32. 베베르공사의 外交手記에 의하면 러시아외무성은 아관파천 전까지 한국문제에 관심이 적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주요 관심사는 만주에 있었다. 시베리아철도를 만주로 연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관심은 만주로 집중되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대한정책은 변화하고 있었다. 일본을 요동반도에서 몰아낸 러시아는 한국에 있어서는 일본에게 어느 정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0269)Seung Kwon Synn, The Russo-Japanese Rivalry Over Korea(Seoul:Yuk Phub Sa, 1981), p.210

 2월 14일 고종은 베베르와 스페이에르에게 한국의 운명을 러시아에게 맡기고 싶다고 하였다. 왕은 계속해서 태평양연안에서 한국의 독립이 유지되는 것이 러시아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한국 내각에 배치할 주요한 顧問의 파견과 3,000명의 한국 군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러시아 교관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0270)Boris D. Pak, op.cit., p.128. 그러나 외무성으로부터 아무 회답이 없었다. 2월 26일 스페이에르는 한국의 보호국화를 건의하였다. 그는 “만약 러시아가 일본과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한국의 보호자 역할을 거절한다면 러시아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방관하고 있다가 부득이하게 러시아가 한국문제에 개입하게 된다면, 그때 개입해 보아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따라서 한국이 이렇게 러시아측에 달려오는 이상, 이 기회를 이용하면 러시아가 태평양연안에서 강력한 입지를 확보할 것이다. 대신 일본에게 한국의 무역 이익과 재정 분야의 주도권을 허용한다면 양국이 합의에 도달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의견이었다.0271)Shpeier to Lobanov, Feb. 26, 1896, Pak Chon Xë, op.cit., p.38.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한국 보호자 역할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고종이 요청한 한국 내각의 고문이나 군사교관 문제를 기각하였다.0272)Shpeier to Lobanov, Feb. 26, 1896, Pak Chon Xë, op.cit., p.39. 시베리아철도의 만주 통과를 결정한 러시아는 한국에서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시기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만주방면으로 확장하기로 결심한 러시아정부는 일본과 한국문제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또한 당시의 군사력으로서는 러시아에 도저히 적대할 수 없었으므로 정면 충돌의 위험을 회피하면서 러시아와 타협의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양국 대표들이 서울에서 교섭한 결과 5월 14일에 베베르-고무라 覺書(Waeber-小村 Memorandum)가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을 점령하고 있는 모든 일본군의 철수를 의미하였다. 800명 이하의 일본 衛兵도 한국인으로부터 피습될 위험이 소멸되면 철수하도록 되었다. 또한 러시아도 4개 도시에 일본 군인수에 초과하지 않는 수의 위병을 둘 수 있게 되었다.0273)≪日本外交文書≫ 29, 문서번호 465 朝鮮事件善後始末ニ關スル露國公使トノ協議ニ付報告ノ件(附屬書 二).

 1896년 2월 일본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거행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日露提携論者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러시아와 협상하려고 결심하였다. 일본 군부를 대표하는 야마가타는 러시아와 同盟내지는 和親協商(entente cordiale)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로 출발전 야마가타는 한반도의 분할안을 무츠외상과 상의하였다. 무츠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과 협의한 후, 만약 히트로보공사가 직접 한반도 분할문제를 제의한다면 일본정부는 그 문제를 착수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몇일 후 야마가타는 히트로보공사를 만나 한반도 분할문제를 제기하였으나 히트로보는 그 제안을 회피하였다. 야마가타는 외교문제는 대단히 예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0274)信夫淳平,≪明治秘話-二大外交眞相-≫(東京, 1928), 28쪽.

 모스크바에서 5월 24일 러·일간의 비밀교섭이 시작되었다. 야마가타대사는 일본의 露日議定書案을 로바노프외상에게 제시하였다. 일본 제안의 핵심은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러시아와 일본이 분할하자는 것이었다.0275)≪日本外交文書≫ 29, 문서번호 482 朝鮮ニ關スル露國トノ協約ニ付報告竝ニ意見具申ノ件. 6월 6일 로바노프는 반대 제안을 하였다. 한국을 분할하자는 조항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그 대신 앞으로 고종의 호위병은 러시아가 조직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야마가타는 일본 국민은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6월 6일 국빈 초대 만찬장에서 니시 일본공사는 카프니스트 아시아국장에게 일본은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카프니스트국장은 일본은 이미 한국 궁성을 호위한 적이 있고 훈련대도 조직했었다고 지적하였다. 한때 야마가타와 니시는 대러협상을 중단할 생각까지 하였다.0276)위와 같음.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議定書(Labanov-山縣 Protocol)가 체결되었다. 러·일간의 협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반도의 분할문제였다. 5월 24일 제1차 회견에서 로바노프외상과 야마가타는 일본 제안의 제5조를 논의할 때 서로 웃었다. 그 뜻은 일본이 한반도를 러시아와 분할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소련·미국 및 한국 학자들은 왜 러시아정부가 한반도를 39도선에서 분할하자는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였는가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고 있다.0277)B. A. Romanov, op.cit., p.143;William L. Langer, The Diplomacy of Imperialism
(New York:Alfred A. Knopz, 1956), p.406.

 1928년 소련학자 로마노프(V. N. Romanof)교수가 일본의 39도선 제안을 38도선으로 잘못 썼기 때문에 세계 모든 학자들은 38도선으로 잘못 쓰게 되었다고 했다. 야마가타대사가 大同江∼元山線 39도선을 제안하였고 러시아정부도 그렇게 받아들였다.0278)B. A. Romanov, op.cit., pp.142∼143.
V. p. Nikhamin, op.cit., p.159.
≪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482 朝鮮ニ關スル露國トノ協約ニ付報告竝ニ意見 具申ノ件.
1896년 이후 러시아정부가 일본정부에게 한반도 분할을 39도선을 경계로 제안한 것을 보면 39도선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러시아의 한국정책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 당시 일본이나 영국도 러시아가 한반도 전체를 병합할 의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0279)George A. Lensen, op.cit., p.74.
John Berryman, op.cit., pp.72∼73.
1900년에 義和團事件이 발발하자 5만 명의 러시아군이 만주를 점령하였다. 그 2년 후 람스도르프(Lamsdorf)外相이 지리적·정치적 조건에 입각하여 한반도는 러시아제국에 없어서는 안될 組成地方으로 예정되었다고 생각했다.0280)B. A. Romanov, op.cit., pp.141∼142. 많은 학자들은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을 잘못 해석한다.

 당시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니시 도쿠지로(西德二郞)가 가장 예리하게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을 분석하였다. 그는 1875년에 쌍트 페테르브르크대학을 졸업한 러시아를 잘 아는 일본외교관이었다. 야마가타대사는 러시아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었고 외교에도 경험이 없었다. 따라서 모스크바에서 러일협상은 주로 니시공사가 주도하였다. 니시는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현재 러시아로서는 일본과 공동으로든 혹은 단독이든 간에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가 영국이나 기타의 세력과 예측할 수 없는 분규를 초래할 의사가 없다. 현재의 상태로는 일본과 함께 한국을 남북으로 분할할 의사도 없다. 그러나 상태가 一變하여 한국의 독립이 유지될 수 없게 되던가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그와 더불어 항쟁함이 불리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즉 共同分割) 사양치도 않을 것이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러시아가 한국에서 원하는 것은 현상유지이다. 러시아는 한국을 정복하던가 보호국화할 계획이 없다(≪日本外交文書≫ 29, 문서번호 482 朝鮮ニ關スル露國トノ協約ニ付報告竝ニ意見具申ノ件).

 러·일간의 제2차 회담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남북으로(39도선) 분할하자고 제의한 데 대하여 로바노프외상은 후일에 가서 필요로 할 그 때에 재론키로 전제하고, ‘南北’ 二字를 삭제키로 합의하였다. 그 결과 모스크바 의정서의 비밀조항 제1조는 다음과 같이 체결되었다.0281)≪日本外交文書≫ 29, 문서번호 482 朝鮮ニ關スル露國トノ協約ニ付報告竝ニ意見具申ノ件.

 “한국의 안녕 질서가 문란해지던가 또는 문란해질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러·일 양국민의 안녕 보호와 電信線 유지를 위한 군대 이외에 각기 합의에 의해 다시 군대 파견을 필요로 할 경우 양국정부는 그 군대 상호간의 모든 충돌을 예방하기 위하여 군대와 군대간에 점령하지 않는 空地를 두도록 각 군대의 用兵地域을 획정할 것이다.”0282)≪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478 山縣大使露國トノ議定書成立シタル旨報告ノ件. 이 비밀조항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니시공사가 예측했던 대로 1900년 義和團事件을 계기로 러시아군대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한반도를 39도선에서 분할하자고 일본에게 제의했기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니콜라이 2세는 러일협상이 실패하자 극동총독 알렉세에프에게 일본함대가 한국의 서부해안에서 39도선을 넘으면 일본의 선제공격 없이도 일본군을 공격해도 좋다는 전문을 보냈다.0283)Vladimir L. Burtsev, Der Zar und die auswaertige Politik Das geheime Memorandum des Grafen Lamsdorff/Das Geheime Orangebuch(Berlin: E. Berhard Frowein Verlag, 1910), p.90. 이것은 1896년 모스크바에서 야마가타대사가 로바노프외상에 한국을 남북으로 분할하자고 제안했을 때 ‘남북’ 2자를 삭제하고 받아들였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정부는 39도 이북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한다고 생각했다는 증거이다.

 한국정부도 러시아황제의 대관식을 계기로 閔泳煥특사를 파견하여 대러교섭을 추진하였다. 6월 5일 민영환대사가 다섯 가지의 요청을 하였을 때는 러일간의 협상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 그의 요청은 로바노프외상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일본과 갈등을 유발시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민영환대사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면 거절하면 한국이 러시아측으로부터 이탈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반쯤 약속하는 태도를 취했다. 7월 2일 러시아정부는 ‘회답메모’ 형식으로 5개 조항을 약속하였다.0284)B. A. Romanov, op.cit., pp.144∼145.

 회답메모로 만족하지 않은 민영환대사는 8월 7일 로바노프외상에게 한·러 방위동맹조약을 제안하였다. 이 조회에서 민영환대사는 말하기를 한국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며, 다년간 양국은 상호친선을 도모하여 왔고, 앞으로 그 친선이 더욱 더 강화되어야 된다고 하였다. 앞으로 타국이 한국의 자주독립을 침해하게 되면 러시아는 병력으로 한국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0285)Boris D. Pak, op.cit., p.132.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민영환대사가 러시아정부와 동맹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없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이 문제에 관하여 토론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의 재가를 받아 로바노프외상은 다음과 같은 조회를 민영환대사에게 권하였다. “本大臣은 귀하의 뜻을 奏上하였고, 러시아정부를 대표하여 한국정부에 대한 불변의 호의를 보증한다. 앞으로 한국 왕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능한 협력을 할 것이다.”0286)Pak Chon Xë, op.cit., pp.53∼54.

 8월 13일의 로바노프 조회와 회답메모는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을 잘 나타낸다.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와 독립을 보장하였고, 한국을 합병하던가 보호국화할 의사가 없었다. 한반도문제로 인하여 러시아는 일본·영국 및 미국과 충돌할 필요가 없었다. 민영환대사가 제안한 한·러 방위동맹은 러·청 방위동맹이 커버했기 때문에 필요가 없었다. 러·청 비밀조약에 의하여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을 경우에 러시아와 청국이 공동으로 한국을 방어하게 되어 있었다.0287)金景昌, 앞의 책, 464∼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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