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3. 러·일의 한반도 분할 획책
  • 3) 러시아의 한반도 분할 제안

3) 러시아의 한반도 분할 제안

 1897년 12월 중순 러시아 극동함대가 여순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을 달래기 위하여 1898년 1월 러시아정부는 일본정부에 접근하였다. 여순·大連의 확보를 위해 러시아는 어느 정도 한국을 일본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정부가 알렉세예프(K. A. Alexeiev)를 顧問으로 임명한 데 대해서 일본정부는 격분하고 있었다.0288)Seung Kwon Synn, op.cit., p.253.

 2월 중순 일본은 러시아주재 일본공사 하야시를 통하여 대러 협상을 제의하였다. 한국 군대를 훈련시키는 군사교관은 러시아정부가 임명하고 일본정부는 재정고문관을 임명한다는 제안을 하였다.0289)≪日本外交文書≫ 31-1, 문서번호 119 林公使ヨリ露外相ニ手交セル日本側ノ議定書草案寫, 138쪽. 위테재무대신은 일본이 재정고문관을 임명하게 되면 한국 경제는 일본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일본의 제안을 반대했다.0290)B. B. Glinskii, Prolog Russko-Iaponskoi Voiny(Petrograd, 1916), pp.64∼65. 그리고 나서 잠시 러·일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무렵 스페이에르공사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독립협회를 위시한 한국 국민의 저항과 일본 및 영국의 반대로 스페이에르의 강경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였다.0291)Seung Kwon Synn, op.cit., pp.261∼265. 일본의 재정고문관 임명 제안은 위테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알렉세예프 고문관을 서울에서 철수시키면 한국 경제는 일본이 지배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러일전쟁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았다. 알렉세예프의 소환 이후 위테는 露韓銀行을 폐쇄하고 한국과의 경제적 거래를 중단시켰다.0292)B. A. Romanov, op.cit., pp.207∼208. 위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라비예프(M. N. Muraviev)외상의 의견이 승리하였다. 그는 여순·대련에서 러시아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는 일본 및 영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된다고 보았다.0293)Pak Chon Xë, op.cit., p.123. 일본과의 교섭을 촉진시키키 위하여 무라비예프는 스페이에르를 북경공사로 영전시키고 마튜닌(N. G. Matunin)을 공사로 임명하였다.

 3월 18일 니시외상은 일본주재 러시아공사 로젠(R. R. Rosen)에게 만주를 한국과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0294)≪日本外交文書≫ 31-1, 문서번호 141 韓國ノ援助ハ日本ニ一任サルヘキ旨述ヘシロ上書, 153∼154쪽. 3월 29일 러시아정부는 일본의 滿韓交換提案을 거절하였다. 무라비예프외상은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한국을 일본에게 포기하려고 하였다.0295)Sergei I. Witte, Vospominaniia(Berlin, 1922), p.145. 그러나 러시아 군부는 한국에서 일본에게 그렇게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을 부여하는 것이 러시아 연해주 지방을 위협하는 전략적 기지를 일본에게 제공하는 것이므로 절대적으로 이를 반대하였다. 더구나 러시아 해군은 여순항이 러시아 함대의 극동 연료공급지로서는 적당치 않아 한국의 남해안에 다른 해군기지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러시아정부는 만주를 한국과 교환하자는 일본의 제의를 거절하였다.0296)위와 같음.

 알렉세예프를 고문으로 한국정부가 임명한 데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일본이 러시아 함대가 여순항을 점령하자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억제해 온 영국과 공동으로 대응하여 한국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무라비예프외상 생각으로는 일본이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한국을 점령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0297)Pak Chon Xë, op.cit., p.128. 이때 무라비예프는 만약 일본정부가 한반도의 남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려고 결정하면, 러시아도 북한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해야 된다고 국방장관에 청원하였다.0298)위와 같음. 이 사실은 러·일의 한반도 분할획책 정책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1896년 야마가타대사가 39도선에서 한국을 분할하자고 로바노프외상에게 제안했을 때 러시아정부는 반대하고, 그 대신 로바노프·야마가타 議定書 비밀조항에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1898년 러시아가 여순을 점령하였을 때 만약 일본이 남한을 점령하면 러시아는 북한을 점령해야 된다고 무라비예프외상이 주장한 것은 러시아정부가 39도선 이북을 러시아 영향권내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랜 교섭 끝에 4월 25일 로젠-니시 協定(Rosen-西 Convention)이 東京에서 체결되었다. 이 협정 3조에서 러시아는 한·일 양국간의 상업 및 공업의 발달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규정지었다. 만주에서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러시아는 정치적·경제적으로 한국을 일본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무라비예프외상은 마튜닌공사에게 일본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0299)Pak chon Xë, op. cit., p.129. 그 결과 한국은 러시아 극동정책의 중요 지역에서 제외되게 되었다. 러시아 외교정책의 초점은 만주로 집중되었다.

 1900년 여름 청국에서 의화단사건이 발발하자 수만 명의 러시아군이 만주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주러시아 일본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는 의화단사건이 러시아와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데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7월 22일 고무라공사는 滿韓교환 제안을 아오키 슈조(靑木周藏)외상에 건의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과 만주에서 서로 자유행동을 할 수 있도록 세력범위를 획정하자는 제안이었다.0300)≪日本外交文書≫ 33, 문서번호 522 滿韓ニ於ケル日露勢域協定方稟申ノ件. 7월 26일 아오키외상은 滿韓의 勢域協定案을 고무라공사를 통해서 러시아정부에 제안했다.0301)≪日本外交文書≫ 33, 문서번호 531 目下ノトコロ韓國ニ關シ何等行動ヲ執ラザル旨回答ノ件-註.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한반도를 39도선에서 분할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번에는 일본이 39도선 제안을 거절하였다.0302)≪日本外交文書≫ 33-3, 事項 20<雜纂>, 문서번호 2370 山縣侯意見書, 952∼953쪽.

 1900년 7월 중순경 러시아군이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하여 훈춘·하르빈市를 점령한 후 남진하게 되자, 고종은 외국 군대의 한반도 상륙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청국과 같이 한국도 외국 군대의 한국점령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는 외국대표들을 소집하여 유사시 한국을 도와 줄 것을 호소하였다.0303)Boris D. Pak, Rossiia i Koreia(Moscow, 1979), p.175. 이때 러시아정부는 일본이 의화단사건을 이용하여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할까봐 염려하고 있었다. 람스도르프(V. N. Lamsdorf)외상은 동경주재 러시아공사 이즈볼스키(A. P. Izwolskii)를 통하여 만약 일본이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게 된다면,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에 의하여 러시아도 같은 수의 군대를 한국에 파병할 수 있다고 일본정부에 통보하였다. 또한 양국 군대가 출병하였을 때 양국 군대 사이에 점령하지 않는 空地를 설정해야 된다고 하였다.0304)위와 같음. 아오키외상도 람스도르프외상 의견에 동의한다고 이즈볼스키공사에게 말하였다.0305)Boris D. Pak, Rossiia i Koreia(Moscow, 1979), p.176. 여기서 중요한 것은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1896년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의 비밀조항에 의하여 한반도가 39도선을 경계로 분할되어 있었다고 서로 인정한 사실이다.

 러시아정부가 염려한 대로 1900년 여름 일본 야마가타내각은 한국의 점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야마가타는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해야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회피할 것이라고 보았다. 야마가타수상은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찬성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三國干涉때와 같이 러시아·프랑스 및 독일이 반대할 수 도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오오끼수상은 주독일 이노우에공사에게 독일정부의 견해를 타진토록 훈령했다. 일본이 한국을 그의 세력범위에 넣은 경우에 독일은 최소한 호의적 중립을 지켜줄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다.0306)≪日本外交文書≫ 33, 문서번호 526 韓國ヲ日本ノ勢力範圍下ニ保有スル場合ニ於ケル獨國ノ態度及措置ニ付任國ヘ內閣方訓令ノ件. 독일정부는 엄중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야마가타내각이 9월 26일 사직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한반도 점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0307)信夫淸三郞·中山治一 編,≪日露戰爭史の硏究≫(東京:河出書房新社, 1959), 95쪽.

 1901년 1월 7일 동경주재 러시아공사 이즈볼스키는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외상에게 열강의 공동보증하에 한국의 중립화안을 제안하였다. 주청 일본공사 고무라가 가장 현명한 충고를 가토외상에게 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러시아가 한국의 중립화안을 제안한 것은 그들의 만주에서의 자유행동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러시아가 만주까지 중립화하지 않는 한 일본은 한국을 중립화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만약 만주와 한국을 동시에 중립화할 수 없다면, 일본은 한국에서, 러시아는 만주에서 각 세력범위를 분할하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0308)≪日本外交文書≫ 34, 문서번호 398 韓國中立問題ニ關シ外務次官補「バーチー」談話ノ件. 그 후 피터스버그와 동경에서 러·일간의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1901년 11월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피터스버그를 방문하여 러시아 지도자들과 만주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2년 2월 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서두르게 되었다.

 1903년 6월 일본정부는 러시아와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8월 12일 주러공사 쿠리노 신이치로(粟野愼一郞)가 일본정부의 제안을 제출하였다. 이 제안에서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일본 세력하에 둘 것을 요구하고,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권한을 철도경영에 한정시키려고 하였다.0309)John A. White, The Diplomacy of the Russo-Japanese War(New Jersey: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4), pp.351∼352. 10월 3일 대안에서 러시아정부는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0310)≪日本外交文書≫ 36-1, 문서번호 25 露國公使ヨリ露國對案提出ノ件, 22∼23쪽. 이에 대하여 일본은 만주 양국경에 걸쳐 남북 각 50km의 중립지대를 설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러·일간의 교섭은 1904년초까지 계속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러시아가 전쟁준비가 안 된 것을 간파한 일본은 1904년 2월에 전쟁을 시작하였다.

<辛承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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