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1. 열강의 이권쟁탈상
  • 1) 미국의 이권쟁탈상
  • (1) 광산이권

(1) 광산이권

 개항후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침투와 청의 내정간섭으로 국내 정세가 불안했던 한국은 이들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원하고 있었다. 이 때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미국에 대해 한국정부는 각별한 호의와 정치적 협조를 기대하였고, 그 결과 구미 열강 가운데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특히 1884년 내한하여 선교사로, 의사로,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던 미국인 알렌(Horace N. Allen, 安連)은 고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으면서 雲山金鑛 채굴권·경인철도 부설권·전기 가설권 등 주요 이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먼저, 금광은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조약을 맺은 거의 모든 열강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까닭은 첫째로 한국에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둘째로 금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무역의 결제수단과 화폐발행의 준비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산개발은 대규모의 자본과 고도의 과학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한국의 경우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불모지와 다름없었다.0311)李培鎔,≪韓國近代鑛業侵奪史硏究≫(一潮閣, 1989), 1쪽. 이러한 금광이권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획득한 운산금광의 채굴권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雲山鑛約의 내용이 본보기가 되어 다른 열강도 그것을 토대로 채굴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운산금광을 차지하는 데 있어서도 알렌의 역할이 매우 컸다. 갑신정변 당시 부상당한 閔妃의 조카 閔泳翊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고종과 민비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렌은 이후 궁중에 자주 드나들면서 고종의 侍醫로서 뿐만 아니라 국제문제의 자문에도 응하고 있었다. 이미 1883년 5월에 부임한 초대 공사 푸트(Lucius H. Foote, 福德)이래 한국의 광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미국은 마침 1887년 고종으로부터 한국의 막대한 부채와 열강의 정치적 간섭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는데, 고종의 내심은 미국의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0312)Allen to Everett, Microfilm 365, July 2, 1887, Horace N. Allen Paper(韓國硏究院 소장, 마이크로필름) 즉 1880년대 초기부터 미국이 갖고 있던 한국 광산에 대한 관심은 이미 실질적인 탐사와 더불어 다른 나라보다 앞서 광산개발권을 획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욱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게 된 것이 한국왕실과 맺고 있었던 친밀한 관계였다.

 이에 알렌은 즉시 금광이권을 미국상사에게 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며 금의 매장량이 가장 많기로 소문난 평안도 운산금광의 독점적 개발권을 줄 것을 제안하였다. 물론 미국과 정치적·경제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광산이권을 허가해 달라는 알렌의 제의에 고종은 흔쾌히 수락하였지만, 당시 한국의 국내사정은 고종 자신이 마음대로 외국에 이권을 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본가의 물색도 수월치 않자, 결국 차선책으로 알렌은 고종에게 우선 광산개발은 한국정부에서 직접 주관하고 근대식 기술을 습득한 미국인 광산 기술자를 뽑아 보낼 것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종은 금광이권을 미국에게 넘기면 미국이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알렌의 기만에 넘어갔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0313)李培鎔, 앞의 책, 63∼64쪽.

 그리하여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피어스(Aillerd Ide Pierce, 皮於瑞)가 鑛務局에 고용되어 운산금광에서 1년 동안 채굴작업에 종사하였다.0314)Spencer J. Palmer, ed, “Dinsmore to Secretary of State”, No. 196, August 16,
1889, Korean-American Relations Vol. 2(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3).
다음 해에는 비록 문서 전달상의 오류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시 5명의 미국인 광산 기술자와 근대식 채광기계가 도입되어 운산금광으로 보내졌는데,0315)이 5명의 미국인 鑛師 초빙문제는 알렌의 착오였다고 한다. 즉 한국정부는 알렌에게 5명의 광산기술자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One Machinist foreman' 즉 鑛山技師長 1명이라 한 것을 알렌은 ’One Machinist four men'으로 알아듣고 5명의 광사를 보내 한국정부가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된 것이라 한다(F. H. 해링튼 著, 李光麟 譯,≪開化期의 韓美關係≫, 一潮閣, 1973, 147쪽). 이렇듯 미국은 간접적이나마 운산금광 개발과 정보탐지에 적극적이었다. 모든 근대식 기술이 운산에 보급되어, 근대식 채광법은 한국 광산 중 최초로 운산금광에서 실행되었다. 이것은 물론 표면적으로는 한국정부측의 광업 근대화 의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미국측의 운산금광 개발 가치를 측정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미국은 운산금광 개발권을 부여하겠다는 한국왕실의 언질을 받고 그 후 鑛師를 파견하였던 것인데, 실제로 초빙된 광사들은 한국광산의 근대화를 위해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앞으로 미국이 운산금광 개발에 착수하기 위한 예비조사로서 그들의 업무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 동안 알렌은 계속 자본가를 물색하던 중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서 무역 활동을 하고 있는 모오스(J. R. Morse, 毛於時)를 적임자로 선정하여 드디어 1895년 7월 고종의 특명으로 운산금광 채굴 계약이 성립되었다.0316)≪奎章閣契約文書≫(奎 23183),<雲山鑛約草案>.
李培鎔, 앞의 책, 75쪽 및 附錄 참조.
그러나 곧이어 발생되는 을미사변으로 권리만 확보해 놓았지 별다른 광업개발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1896년 4월 정식으로 운산금광 특허권이 한국의 외부대신 李完用과 미국인 모오스 사이에 재조인되었다.

 그 내용 속에는 채굴기한을 25년으로 하는 한편 주식의 4분의 1을 한국왕실이 소유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또한 광업에 필요한 기계와 소용물에는 일체 과세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모오스는 朝鮮鑛業會社를 설립하여 막상 채굴에 착수하려 하고 또 그 자신 한국의 경인철도 이권과 광산이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자본이 취약하여 적극적인 개발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모오스는 뉴욕의 유력한 자본가인 헌트(Leigh S. J. Hunt)와 파세트(J. Sloat Fasset)에게 1897년 3만 불에 양도하게 되었다.0317)철도이권은 일본에게 넘겨주고 있다.
田保橋潔,<國際關係上の朝鮮鐵道利權>(≪歷史地理≫57-4, 1931), 2쪽.
헌트와 파세트는 버지니아州에서 영국의 자본까지 포섭하여 총자본금 500만 불을 모아 東洋鑛業開發株式會社(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를 조직하여 대대적으로 운산금광 개발에 착수하였다.0318)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 Certificate, May 13, 1898. 모오스의 조선광업회사에 비하면 자본금만도 50배나 되는 큰 조직이었다. 이 회사를 설립하면서 곧 채광에 착수하였고 조선광업회사를 완전히 인수한 것은 1898년 5월 18일이었다.

 운산금광이 계속 호조를 보이자 헌트는 한국왕실과 공동소유가 아닌 미국인 단독으로 경영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1899년, 4분의 1의 주식에 대해 10만 불을 한국왕실에 지불하여 모두 사버리고 세금으로 매년 25,000원을 상납하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00년에는 매년 상납금을 내는 대신 일시불로 12,500불을 지불하고 계약기간도 15년을 더 연장하여 1939년 3월 27일까지로 하였다.0319)≪奎章閣契約文書≫(奎 23194),<雲山鑛約改定件>.
이와 더불어 추후 광산시설이 확장되어 더 많은 기간이 요구된다고 인정될 때는 15년을 추가하여 1954년 3월 27일까지 채굴할 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다.
운산금광은 노다지금광으로 유명한데 미국인들이 경영하면서 매우 많이 금이 쏟아져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운산일대의 주민들이 미국인 금광회사의 철조망으로 모여들자 이를 제지하려는 미국인들이 ‘노터치(Notouch-손대지 말라)’를 연발하자 ‘노다지’로 알아듣고 이후에는 금이 많이 나온다는 말이 ‘노다지’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한국이 미국에게 운산금광을 넘겨줄 때는 미국으로 하여금 경제적 관심을 갖게함과 아울러 국제적 갈등속에서 정치적으로 한국에 대한 원조를 구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정부는 미국이 열강의 침략을 저지시켜 주리라는 기대하에서 이권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시종일관 미국은 정치적 불개입의 입장을 견지하고 경제적 이권만을 얻는 데 관심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익과 관계되는 일에는 한국측의 입장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불법행위를 자행하였으며 심지어 한국정부의 인사문제에까지 간섭하였다.

 운산금광에서 약 40년간 채굴을 담당하였던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의 경영진에는 한사람의 한국인도 참여시킴이 없이 미국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금광에서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생산하여 총 5,600만 불의 산출고를 올렸다. 또한 1909년에는 운산 및 그 부근의 삼림 채벌권까지 획득하여 더욱 더 수익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총 경비를 제외한 순이익이 1,500만 불이었으니 쉽게 생각해서 4분의 1의 왕실 소유주를 일찌감치 단 10만 불에 팔아 넘기지 않았으면 한국왕실이 375만 불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여하튼 이로 인한 한국의 경제적 손실은 실로 막대하여 민족자본의 형성 기반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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