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1. 열강의 이권쟁탈상
  • 4) 일본의 이권쟁탈상
  • (3) 전선이권

(3) 전선이권

 電線利權은 그 자체의 이득뿐 아니라 한국의 정보를 탐지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열강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특히 일본은 한국 전역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실시함과 아울러 한국의 정세 변동을 신속히 파악하기 위해 통신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임오군란 이후 한국의 전신시설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즉 제물포조약 교섭 중 50만 원의 배상금을 한국이 거부하거나 액수를 줄이려고 할 때에는 광산 채굴권·전선 가설권을 그 대가로 요구할 것을 계획한 바 있었다.0370)≪日本外交文書≫15, 문서번호 127 事變處理ニ關シ再訓令ノ件.
李培鎔,<列强의 이권침탈과 朝鮮의 對應>(≪韓國史市民講座≫7, 一潮閣, 1990), 101∼105쪽.

 결국 1883년 1월<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한국정부와 맺게 되었다. 이 조관은 전문 5조로 되어 있는데, 일본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이후 한국의 전선이권을 침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각 조항마다 담겨져 있었다. 이렇게 독소 조항으로 가득한 조약을 맺어놓고 한국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후에 이 조약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국 정부 사이에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결국은 한국정부의 양보로 매듭지어졌다. 바로 1885년 청나라와 맺은<義州電線合同>으로 인해 문제가 야기되었던 것이다.0371)한편 청은 일본의 급격한 진출에 자극을 받고 이를 견제할 목적과 특히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겪는 동안 본국과 한국 사이에 신속한 통신연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885년 6월<義州電線合同>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해 그들은 중요 경비와 물자를 스스로 부담하여 우리 국내에 電信線을 가설하고 이를 의주에서 중국 전선과 연접게 하였다. 이리하여 1885년 8월 인천·한성간에 최초의 전신시설이 개통되고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1천여 里의 전선이 완성되었다. 이른바 西路電線이라 일컫는 것이다(≪高宗實錄≫권 22, 고종 22년 6월 6일). 그러나 서로전선은 처음부터 청국에서 발안하여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의 자금과 기술로써 가설되었던 만큼 가설 후에도 그 운용과 관리권은 청국정부로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漢城電報總局(華電局)이라는 중국 전보국이 이 땅에 설립되었으며 그 업무에 있어서도 한문 전보를 위주로 하고 국문 전보의 정식 부호는 제정조차 안되었다. 결국 서로전선은 청을 위해 청 위주로 경영되어 우리가 받은 혜택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청에 의한 西路電線의 가설은 일본측을 자극하여 앞서의<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의 제2조와 제3조를 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즉 제2조의 “對抗爭利(대항해서 利를 다투는)하는 성질의 전선을 가설하지 않는다”는 사항과 제3조의 “해외 電線이면 반드시 부산의 일본전신국과 通聯해야 한다”는 사항에 위배되는 점을 들어 즉각 서로전선의 가설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0372)≪日案≫1, 문서번호 550 京義電線架設에 關한 異議·562 京義電線架設에 關한 再次抗議·581 京義電線架設에 關한 三次抗議. 이에 대해 한국정부에서는 의주·인천은 부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對抗爭利하는 전선에 해당될 수 없음과 서로전선은 국내 전선뿐으로 해외 전선에 적용되지 않음을 들어 반박하였다.0373)≪日案≫1, 문서번호 555 京義電線架設異議에 對한 反駁·571 京義電線架設再抗議에 對한 反駁. 그러나 일본측의 끈질긴 항의로 다시<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續約>을 맺게 되었다.0374)≪高宗實錄≫, 고종 22년 11월 16일.
≪日本外交文書≫18, 문서번호 91 海底電線設置條約續約締結ノ旨報告ノ件.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이 조약은 전문 4조로 작성되었는데 인천·의주간 전선을 부산 일본전신국에 통연하는 조건으로 새로이 한성에서 부산에 이르는 南路電線을 가설한다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남로전선은 전선의 재료와 선로 문제를 놓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착수 3년 만인 1888년 6월에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최초로 朝鮮電報總局이 설립되고 우리 정부 주관의 전신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최초의 전신규정인<電報章程>이 제정되고 오늘날까지 이용되는 국문전신부호가 마련되어 자주적인 전신 발전에 계기를 이루는 듯 하였다. 이어서 1891년에는 한성에서 원산에 이르는 北路電線이 개설되어 가설과 관할은 조선전보총국에서 독자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남로전선 가설 후에도 일본은 줄곧 양국 전보국 사이의 電信聯接 및 부산·인천간의 전보 요금을 인천·의주간의 그것과 동일하게 할 것 등을 요구하며 사사건건 한국의 전신사업에 관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電債가 밀리기 시작하여 그것을 갚기 위해 다시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은 전신시설에 별로 투자도 하지 않고 계약문 몇 글자로 막대한 이득을 추구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이를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특히 일본은 군함 7척과 육군 7천 명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고 갑신정변 이후 후퇴한 정치적 입장을 만회하려 하였다. 이에 일본은 무엇보다도 경인지방과 일본 본국간의 신속한 전신 연락이 필요하였고, 그 때문에 남로전선의 통신상태에 대해 특별히 주의하였다. 남로는 전주지방을 통과하기 때문에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한 후에는 전신이 자주 불통되었다.

 일본공사 오토리 가이스케(大鳥圭介)는 남로전선의 불통 상태는<釜山口設海底電線續約>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일본인 전신기술자를 파견하여 수리할 수 있도록 허가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續約>을 과장되고 억지로 해석한 것이지 일본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성·부산간에 남로전선 외에 그들 전용의 군용선을 새로이 따로 설치하겠다고 요구하는 한편으로는 경인간에 한국정부의 허가도 없이 군용전선을 불법 가설하였다.0375)≪統理衙門日記≫, 1894년 6월 8일.

 일본은 이미 경부간 전선 가설을 요구할 때 野戰電信隊 800여 명을 인천과 부산에 상륙시켰다. 즉 인천에 병력을 파견할 때 전선 가설계획도 미리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로서는 일본의 요구는 한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처사라고 강력히 거부하였지만 끝내 일본은 부산에서 대구·충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경부간 군용전선을 불법 가설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暫定合同條款>을 맺어 앞서 불법 가설한 경부·경인간의 군용전선을 강제로 합법화시켰다.0376)≪高宗實錄≫, 고종 31년 7월 20일.
≪日本外交文書≫27, 문서번호 428 朝鮮政府ト假條約締結ノ件·문서번호 442 事變後朝鮮政府ト假條約訂結協議ノ件.

 한편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게 되자 일본은 이제까지 華電局에서 관할하던 서로전선을 전리품으로 접수하여 그들의 군사용으로 전용시켜 버렸다. 엄연히 서로전선도 1885년의 청국과 조약을 맺을 때 관리는 華電局에서 하더라도 소유권은 한국정부에 있었는데도 청국 소유로 못박아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 곧이어 북로전선의 관할권마저 강탈해 갔지만 우리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한국정부의 관할권은 상태 불량의 남로전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전용인 경부간의 군용전선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전지역의 전신 연락은 日本軍用電信所에 의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96년말에는 한국인의 公衆電信을 경인·경부간의 군용전선에서 취급하기도 하였지만 국문전보를 취급하지도 않았거니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쉽사리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민족적 울분으로 일본의 군용전선을 파괴 절단하는 사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침략의 가장 중요한 바탕의 하나로 전신선의 완전 강탈을 획책하여 1895년 1월 이른바<韓日電線設置條款續約改正案>(전 13조)을 만들어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게 그대로 한국정부와 체결할 수 있도록 훈령하였다. 즉 앞서<暫定合同條款>을 더욱 구체적으로 명문화시켜 한국 국내의 남로전선을 비롯한 기존 전선을 탈취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앞으로 건설하는 일체 전선의 수축과 관리 및 업무를 대행함으로써 완전히 한국의 전신사업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려는 목적이었다.0377)≪駐韓公使館記錄≫, 機密送 4호,<日韓電線設置條款續約改正案>.

 그러나 삼국간섭에 접하게 되자 열강의 견제가 심해지고 설상가상 을미사변으로 인해 일본의 정치적 입지가 위축됨에 따라 그들의 야망은 실현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일본의 독점적인 전선 이권침탈에 대한 한국정부의 저항도 거세어짐에 따라 1896년 7월 서로·북로전선은 한국정부에 반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부간 군용전선은 그대로 점거하여 그들의 수비병을 배치하여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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