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2. 독립협회 전후 일제의 이권강점
  • 4) 연해어업이권

4) 연해어업이권

 개항 후 한반도 연해어장이 황금어장으로 알려지면서 열강, 특히 일본의 침탈대상이 되었다.0416)청·일 양국의 어민들은 이미 개항이전부터 한국 연해에 잠입하여 불법어로를 자행하였다.
이원순,<한말 제주도의 漁採問題>(≪歷史敎育≫10, 1967).
박구병,<韓國漁業技術史>(≪韓國文化史大系≫3,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8).
1882년 청국이 황해·평안도 연안의 어업권을 획득하고, 1883년 일본이 전라·경상·강원·함경도 4도의 연안어업권을 획득함에 따라 한국의 황금어장이 외국 어선에 의해 유린되기 시작하였다. 즉 1882년<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제3조 규정에 따라 청국이 황해·평안도 연안의 어업권을 획득하고, 한국도 중국의 산동성과 봉천성 연안에서의 통어권을 획득했다. 한편 일본은 1883년 7월<조일통상장정>제41조 규정에 의거 전라·경상·강원·함경도 4도의 연안어업권을 획득한 반면 한국 어선은 肥前·長門·石見·出雲·대마도해안에서 어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어업의 실상은 외국으로 출어할 어선이나 어업기술 여건이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 외국에 의한 어업침탈이 시작되었다.0417)한우근,<개항후 일본어민의 침투>(≪東洋學≫1, 1971) 참조.

 물론 唐船·荒唐船·어채당선 등으로 불리던 청국 선박은 평안·황해도 연안에 나타나 밀무역과 밀어를 자행하였지만 개항 후에는 수백 여 척의 선박이 들어와 서해안에서 주로 준치·조기·새우·갈치 등을 잡으면서 총포로 위협하여 한국인 어망의 생선을 약탈하거나 살상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어선은 삼포왜란으로 한반도 연해에서의 어로행위가 금지된 지 370여 년 만인 1883년에 어업권을 획득한 후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렇지만 어업권이 인정된 초기에는 생선에 대한 기호상의 차이와 어획법 등이 달라 한국인 어업과 일본인 어업이 서로 상충되지 않았다. 일본어민들은 초기에는 지역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많이 활동하였고, 점차 함경도와 강원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던 것이다.

 일본어민들은 기계화된 漁具와 漁船 및 선진 어로기술로 한국어민에 비해 많은 양의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주로 도미·삼치·상어·방어·뱀장어·해삼·전복 등을 잡았는데 이들은 예상 밖의 수익을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1891년에는 117만 원의 수익을, 이듬해인 1892년에는 160만 원으로 그 수익을 늘려갔다.0418)이영학,<개항 이후 일제의 어업 침투와 한국 어민의 대응>(≪역사와 현실≫18, 한국역사연구회, 1995), 16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에서 일본어민으로부터 징수한 어세는 3천 원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도 일본어민들이 어세를 납부하지 않으려고 밀어를 행하는 사례가 많았으니 실제 일본어민들이 어획해 간 어류의 총량과 그들이 거둔 수익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은 1889년 11월 한국정부와<朝日通漁章程>을 조인함으로써 소정의 어업면허세를 납부하면 상기한 4도 연해의 3리 이내에서 자유로이 어업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잡은 어류를 개항장 거류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판매할 수 있게 되어 수송 및 보관의 부담을 덜면서 많은 수익을 올렸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어민들은 어로행위뿐 아니라 어류의 판매분야로까지 그 영역을 넓혀갔다.0419)≪韓國水産誌≫ 1권(農商工部 水産局, 隆熙 2년), 368쪽. 일본상인들이 어류매매에 참여하게 된 이후 한국의 어물전 상인들은 상권을 잃고 도산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일본거류민들은 1889년 8월에 부산항에서 자본금 5만 원의 釜山水産會社를 창설하여 한국에서 어업 경영확대를 위한 기틀을 잡고자 하였다.0420)≪統記≫, 고종 25년 11월 20일 및 고종 28년 4월 27일. 이 회사는 일본어민들의 각종 편의를 돕는 업무이외에 일본어민들이 잡은 어류의 판매를 알선하였는데 심지어는 이를 청국으로 수출하는 중개역할도 맡았다. 이렇게 하여 일본어민들이 고기를 잡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 연해에서 잡은 고기를 한국내의 판매는 물론, 청국에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갔다. 그 결과 한국인은 어류의 생산분야는 물론 유통분야에서도 잠식당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계화된 어구와 어선을 갖춘 선진적인 어법으로 한국어민보다 훨씬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일본인들은 1900년경부터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기·대구·청어·새우·명태 등을 잡아 판매함으로써 한국어민의 어업권을 침해하였다. 그들은 일본정부의 원양어업에 대한 장려금 지불, 어업협회·통어조합·수산조합 등의 조직 강화 등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00년대에 더욱 적극 진출하면서 어획물의 판매에서도 생선·염장·건제 등의 방식으로 한국·청국·일본 3개국에 판매하여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수심 깊은 데까지 들어갈 수 있는 일본인 잠수기선에 의한 전복과 해삼의 남획, 러시아인·영국인·일본인 등에 의해 성행된 노르웨이식 포경법에 의한 고래의 남획 등은 풍부했던 수산자원의 감소를 가져왔다.

 일본어민들의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어로행위는 어민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였다. 1897년 8월에 부산 영사는 “통어자 가운데 3분의 2가 감찰을 받지 않은 자이며, 적어도 과반수는 규칙위반자로 보아도 좋다”라고 일본 외무차관에 보고하고 있다.0421)박구병, 앞의 글, 253쪽. 또한 일본어민들은 조약상에 허가되지 않은 지역까지 불법적으로 진출하여 어로행위를 자행하면서 수익을 올리려 하였다. 이를테면 1901년에 획득한 경기도 연해어업권을 빌미로 충청도 연안으로까지 밀어를 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황해도까지 진출하여 밀어를 행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불법은 어획에 그치지 않고 연해의 외딴 섬의 주민들을 위협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혹은 재산을 약탈하였고, 심지어는 그러한 불법적인 어로작업을 단속하는 관리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하였다.0422)≪皇城新聞≫, 1902년 2월 24일 및 1903년 9월 11일. 그럼에도 한국정부는 이러한 일인들의 불법행위를 효율적으로 단속할 수가 없었으므로 밀어선의 어업세를 확보할 수가 없음은 물론 한국어민들의 어로행위와 생계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였다.

 때문에 한국어민들은 일본어민들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을 호소하는 한편, 나아가 직접 일본어민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즉 부산이나 충청도지역 어민 중에는 자본을 투자하여 일본 漁舟와 일본 漁具를 사용하는 자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일본의 漁艇을 소유한 자도 있었다. 한국어민 스스로가 일본어업의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선진적인 어구와 어획법을 도입하여 경쟁해가기도 하였다.0423)박구병, 앞의 글, 264∼276쪽.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일본인 어민이 발달된 어구와 어획법을 바탕으로 한국 연해의 어장에 대한 침탈을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1년 경기도 연해의 어업권 취득에 이어서 충청·황해·평안도 연안 어업권을 획득하여 한국 연해 전체에서 이익을 얻어갔다. 연안의 定置漁場·양식어장·패조류어장 등 어업면허를 취득하여 어로행위를 하는 어장은 농업에서 농토가 중요시되듯이 아주 중요한 생산수단으로서 토지와 다름없이 소유주가 있었고, 외국인이 소유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감부에서 1908년 10월<漁業에 관한 協定>을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일인도 어업권을 획득하여 어장에서 조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0424)外務省條約局,≪舊條約彙簒≫ 제3권. 이어 일한 어민의 보호·단속이라는 미명하에 일본어민의 朝鮮海水産組合에 매년 보조금을 지급하고 순라선을 구입하여 어업의 실권을 장악케 하였으며 한국어민에 대해서는 억압을 가하였다. 같은 해 11월<漁業法>을 공포하여 면허어업(10년간), 허가어업(1년간), 신고어업(1년간)을 막론하고 통감부에 신청하여 허락을 받아야만 영업할 수 있게 하였다.0425)≪朝鮮法令輯覽≫, 朝鮮總督府, 1932. 이러한 법제는 모두 일인에게 유리하게 허가하는 정책을 실시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선<어업법>을 공포한 후 1909년 4월에서 11월까지 허가된 수는 한국인이 5,436명, 일본인이 2,861명이었다. 그 해 어선수와 어획고를 살피면 어선수는 한국인이 12,567척 일본인이 3,755척이었고, 어획고는 각각 3,690,300원과 3,076,800원이었으며, 인원은 75,063명과 15,749명으로 양국의 어획고나 어선수로 보아서는 한국인이 다소 높지만 인원이 훨씬 많은 까닭에 1인 평균 어획고는 4분의 1에 불과하였다.0426)박경식,≪일본제국주의의 한국지배≫(청아출판사, 1986), 115∼116쪽.

 1910년의 상황을 살펴보면, 허가한 인원수는 한국인이 76,900명 일본인이 16,902명이었고, 1910년의 어선수와 어획고를 보면 한국이 12,749척에 어획량이 3,929,260원이었고, 일본이 3,960척에 어획량이 4,211,312원이었다. 일본인 어업에 비해 어업 인원과 어선수가 각각 4.5배, 3.2배인 한국인 어업이 어획고에서 약간 뒤떨어질 정도로 열악해져 갔다. 1908년부터 1910년의 어업상황을 보면, 한국인 어업은 일본인에 비해 배 1척 당 평균 어획고가 약 3분의 1, 1인당 평균 어획고는 약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통감부 설치이후 일본어민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 중반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1915년에는 전국에 걸쳐 이주 어민수가 1만 2천 명으로 증가하였다.0427)이영학, 앞의 글, 180∼181쪽. 이들은 1904년 이후 한국의 전 연해지역으로 어업영역을 확대해갔고, 또한 한국어민의 어획분야까지 침투하면서 어업을 행하였다.

<李培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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