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3. 이권수호운동
  • 2) 언론 및 지식인의 이권양여 반대운동

2) 언론 및 지식인의 이권양여 반대운동

 외국인에 대한 이권양여 반대 논의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시기는 독립협회의 활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왜냐하면 1896년 이후 한국의 근대시설과 자원개발을 위한 주요 이권이 아주 값싼 조건아래 차례로 열강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의 이권양여 반대운동은 이권침탈의 대응방안과 반외세 논의가 전국적으로 여론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측 대응이 국력의 위축으로 미온적일 수밖에 없는 반면, 이 운동은 보다 더욱 강경하고 신랄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권침탈을 막기 위한 지식인들의 대처방안은 언론과 만민공동회를 통한 여론화운동, 교육을 통한 자체기술자 양성, 민족자본에 의한 회사설립 등으로 제시되었다. 독립협회의 주장은 나라의 자주독립은 자주경제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하며, 자국의 자원과 산업은 자기가 개발하여야만 자주독립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의 자원과 국토와 경제적 이권을 외국에 양도하는 것은 자주독립의 일보를 떼어주는 것이라고 보고 한사코 이를 반대하였다.0432)愼鏞廈,≪獨立協會硏究≫(一潮閣, 1976), 150∼151쪽.

 이러한 여론 조성과 함께 독립협회는 정부의 반대 태도가 확고하지 못하자 “만일 외국이 청구하는 대로 다 시행하면 인민은 어디가 살며 나라는 무엇을 가지고 나라노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서를 外部에 제출하여 자각을 촉구하였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 침탈당한 이권과 그 관계자를 조사하고 즉각 중지시킬 것을 결의하였다.0433)≪독립신문≫, 1898년 9월 13일.

 그런데 외세에 대한 이권양여 반대 논의가 항상 일관적으로 단순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현실론과 이상론의 이중 갈등속에서 전개되었다. 즉 첫째는 무계획한 근대시설 개발로 인한 폐단을 지적하며 시기상조론이 대두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근대시설의 필요성과 조속한 개발을 주장하는 측이 있었고, 둘째로는 이권양여 절대 불가론과 일부에서는 이권양여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부정의 논리는 반외세·친외세의 대립적 성향으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근대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인식과 방법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을 비롯한 국민의 여론은 외국인의 이권침탈에 대한 분노가 대단하였다.≪독립신문≫뿐 아니라≪皇城新聞≫에도 정부의 속수무책인 무능함과 외국의 이권침탈을 맹렬히 공격하는 기사가 실리고 있다.

 독립협회에 의하면 나라의 자주독립은 자주경제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하며, 자국의 자원과 산업을 자기가 개발하여야 지켜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자원과 국토와 경제적 이권을 외국에 양여하는 것은 자주독립의 일부를 양여하는 것이라고 보고 한사코 이를 반대하였다. 즉 외국에 의존하지도 않고 배척하지도 않고 오직 친선해야 하지만 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898년 3월 6일 토론회의 주제를 이권양여 반대로 정하여 “大韓國의 토지는 선왕의 가장 크신 업이요, 1천 2백만 인구가 사는 땅이니, 한 자와 한 치라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이는 곧 선왕의 죄인이요, 1천 2백만 동포 형제의 원수”라 하여 열강의 이권침탈을 강력히 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특히 독일이 金城 堂峴金鑛을 청구하는 과정에서 독일영사 클리인(F. Krien, 口麟)이 그의 요청을 거부하는 우리측 외부대신 서리 兪箕煥에게 무례한 언동을 한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글을 계속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에 클리인의 행위를 규탄하는 여론이 빗발치듯 일어났고, 결국 클리인은 내방 면담시 무례행위에 대한 사과문을 외부대신 서리 유기환에게 보내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완강한 이권양여 반대운동에 힘입어 이전에 침탈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단 저지되었다. 또한 1898년 10월 28일 官民共同會를 개최하고 회원들이 각각 의견서를 진술한 다음 11개조의 결의안을 성안하였다. 이중에서 6개조를 綱으로 하여 入奏키로 하였는데, 그 내용은 광산과 철도와 石灰와 삼림과 빚 얻어 쓰는 일과 군사비는 정부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하여 도장을 찍지 않으면 외국과 조약이 수립되지 않을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외국인을 무조건 경계하여 풍부한 자원을 그대로 무한정으로 방치해 두는 것보다는 외국자본을 이용해서 부강에 힘쓰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처사라고 의견을 제시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을 비롯한 국민의 여론은 외국인의 한국 광산침탈에 대한 분노가 대단하였다. 국내 산업이 한국인보다 외국인에 의해 착수되는 것이 더 많음을 우려하였다. 이미 당시의 여론은 계속 외국인에게 광산·삼림 등의 권리를 준허하고 토지를 양여하면 결국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길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황성신문≫에도 정부의 속수무책인 무능함과 외국의 이권침탈을 맹렬히 공격하는 기사가 자주 실리고 있다.

 1904년 3월 당시의 지식인을 대표하여 장지연 등이 정부에 시정개혁에 관한 50조를 건의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미 인허한 외국인의 이권을 회수하는 방안도 강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이 때는 일본인들이 한국에게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여 그 반대여론이 고조되고 있었다. 같은 해 7월 당시 지식인들과 민간실업가들에 의해 개간사업과 광업 전반을 직접 한국인 스스로가 담당할 農鑛會社 설립을 추진하였다.0434)尹炳奭,<日本人의 荒蕪地開拓權 要求에 대하여>(≪歷史學報≫22, 1964). 아울러 輔安會를 결성하고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는 철회되었다.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되자 유생들의 항일 의병운동이 고조되면서 전국의 유생들은 각국 외국공사관에 서한을 보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만국공법으로 제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0435)≪大韓每日申報≫, 1905년 9월 26일.

 점차 언론이나 지식인들의 이권양여 반대 논의는 시기가 갈수록 고조되고 구체화되었다. 신문에 투고하는 층도 각 지역의 광범한 계층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 이론적 한계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체적인 학술조사나 경제이론이 결여된 한계성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국민에게 감지시키고 또한 저항운동을 조직화·집단화하여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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