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3. 이권수호운동
  • 3) 현지민의 저항

3) 현지민의 저항

 지식인들의 반대운동이 주로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였다면 현지민들의 대응은 생업권과 관계되기 때문에 무력충돌까지 야기될 정도로 적극적이고 강력하였다. 대체로 현지민들의 저항은 1890년대 이후 열강의 이권침탈이 가중될 때 전국 곳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지에서의 저항은 시설 파괴, 고용 거부, 기존 생업권 보장요구, 토지배상 반대, 고용임금 인상요구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청·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이 한국의 電信을 장악하고 그들의 군용전선을 가설하자 현지민들의 저항은 격렬하였다. 일본 전신망 파괴공작은 전선의 절단과 전공에 대한 활동 저지로 나타났다. 즉 전선을 가설하는 일본인 전공을 투석으로 살해하거나, 여인숙에서 숙박을 거절하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경부간 군용전선은 개통할 단계에 절단 사태가 발생하여 개통을 하루 이틀 지연시켜야만 하였다.0436)≪日案≫3, 문서번호 3183 京釜間 日軍電線 切斷犯의 嚴懲과 常時防護 要求.

 특히 전선사고는 1894년 9월 이후에 더욱 빈번히 일어났는데 이는 동학군의 재봉기와 관련이 있었다. 전주∼강진간, 전주∼군산간의 호남선 가설계획이 중지된 것도 반일봉기가 활발해져 일본 병참부 및 일본 전신선을 습격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0437)≪高宗實錄≫, 고종 31년 9월 19일.

 한편 일본은 한국정부에 대해 이러한 사고를 방지하도록 경비 강화를 독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절단에 대한 밀고를 장려하여 상금을 주거나 전신 연변의 촌락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워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전신 습격은 조금도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았으며 결국 이러한 현지민들의 저항과 한국정부의 반환요구로 서로·북로전선은 1896년 7월 환수되었다. 그러나 경부 군용전선은 계속 일본이 점거하였다.

 광업의 경우 외국인들이 특허를 받은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많은 토착 광업권자들이 채금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많은 자본을 투자하였는데 갑작스러운 외국인들의 침입으로 채금작업을 중단하게 됨에 따라 심한 반발을 하였다.

 영국이 차지한 殷山金鑛이나 일본의 稷山金鑛은 정식으로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불법적인 무력침탈을 자행하였다.

 영국인들의 불법침탈에 대해 은산군수는 무단 채굴행위를 중지하라는 정부측 의사를 전달하고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砂金 채취작업을 하는 한국인 토착광부들을 독려하였다. 영국인에 의해 일터를 빼앗긴 한국인 광부들은 영국인들이 고용한 인부들이 주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배일감정까지 겹쳐 더욱 저항의식이 고조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국인이 한국인 광무감리를 납치해 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즉시 그 일대 수천 명의 한국인 광부들이 집결하여 무력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끝내는 총격전까지 벌어져 은산군 일대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무법지대로 화하였다.0438)≪平安南北道來去案≫(奎 17988-4), 1900년 2월 20일·22∼24일. 한국정부측에서도 사태의 악화를 우려하여 진위대 100명을 급파하여 광부들을 해산시키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즉 고용인의 10분의 9를 한국인으로 한다는 것과, 원래 채광작업에 종사하던 한국인 토착광부들에게 1년의 여유를 주어 잠정적으로 채굴권을 부여한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았다.

 일본이 차지한 직산금광의 경우에서도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즉 영국과 똑같은 경로를 밟아 “먼저 채굴을 강행한 다음 특허권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일본인들은 항상 그 지역의 토착광부를 매수하여 한국인 광부 사이를 이간시키는 작전으로 간교하게 한국 광산에 침투해 들어갔다. 원래 직산금광에는 1900년경에 이르러서는 1만여 명의 광부가 채광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영남과 평안도 광부들이 집단을 이루면서 채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영남인 광부들의 광지를 매입하여 자본주가 되어 불법으로 광지 확장을 감행하면서 인근 주민들과 한국인 광부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결국 평안도 광부들과 인근 주민들의 항일감정이 폭발하여 무력충돌이 야기되었다. 그것은 일본인을 후견인으로 하여 작폐를 일으켰던 買辦 덕대와 일본인에 대한 지역민들의 폭발적인 저항이었다.0439)≪宮內府案≫(奎 17801), 광무 4년 6월 28일.

 한편 합법적으로 특허 계약을 맺고 채굴하는 경우에도, 기존 광업권에 대한 배상문제라든가, 토지보상문제, 고용임금문제 등에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마찰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예를 들면 운산금광이나 당현금광의 경우 기존 광업권에 대한 배상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토착광부들이 집단으로 상경하여 外部에 항의하기도 하였고 현지에서는 고용거부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0440)≪平安北道來去案≫(奎 17988-4), 1897년 6월 28일 및 10월 25일. 이러한 경우에는 해당지역 군수의 지휘하에 임금인상을 위한 집단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외국인들에게 계란·닭 등 생활필수품을 팔지 않는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외국인에 대한 직접적인 실력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각 광산에서는 민족자본에 의한 자활의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것은 거대한 외국인 자본의 침투에 대항하려는 민족자본의 결집운동이었다. 遂安金鑛의 경우 토착광업권자들이 자본을 모아 수안금광합자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인들이 설치한 시설·기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여 그들을 축출할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다.0441)≪黃海道遂安金鑛章程≫(奎 18977), 1903년 8월. 이외에도 각처에서 합자회사가 설립 운영되었다. 또한 각 광산촌 유지들이 자본을 모아 기술자 양성을 위한 근대식 광업교육학교를 설립하는 사례도 많이 나타났다. 이것은 광산촌에서 일어났던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한 철도부설 과정은 그 자체가 방대한 토지와 물자 및 노동력의 수탈과정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저항 역시 치열하였다.

 일본은 경부·경의철도를 부설하면서 선로와 정거장 부지로서 총 2,000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시가의 10분의 1 내지 20분의 1에 해당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약탈하였다. 일제가 철도부지를 이처럼 광대하게 확보한 것은 경부·경의철도를 한국 침략과 대륙 진출을 위한 동맥으로서 건설한다는 목적 이외에도 철도연변을 일본의 농민과 상인의 집단 이주지역으로 재편성하겠다는 강력한 식민 의지가 숨어 있었다. 이에 대해 서울과 평양의 도시민 및 沿線의 농민들은 청원과 집단시위 등의 방법으로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철도건설 노동자의 장기간에 걸친 대량 동원은 철도 연선지역을 극도로 피폐시켜 폐농현상이 심각하였다. 농민의 강제 동원으로 때를 놓쳐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속출하였고 철도재료 운반을 위한 소와 말 등 가축의 징발도 행해져 농사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반면 철도연선에의 일본인의 입주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철도연선의 영등포·수원·밀양·구포·대구지역에는 일찍부터 일본인 부락이 건설되었다.0442)鄭在貞, 앞의 글, 234쪽.

 자력으로 철도부설이 곤란했던 한국정부는 철도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철도의 경영에 공동참여하고 규정된 기한이 지난 후 철도를 매입하고자 하였다. 특허회사에 일정기간 영업권만을 인정해 주고 궁극적인 소유권은 한국정부가 갖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0443)朴萬圭,<韓末 日帝의 鐵道敷設支配와 韓國人 動向>(≪韓國史論≫8, 서울大 국사학과, 1982), 250쪽. 그러나 일본은 철도용지의 무상 수취라는 이점을 최대한 살려 광대한 철도부지를 확보한 후 정거장에는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철도 연선을 한국에 대한 군사, 경제적 침략기지로 육성하고자 하였다.0444)鄭在貞, 앞의 글, 167쪽. 일본측의 광대한 철도부지 요구에 대해 한국정부는 선로부지와 정거장 용지의 규모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일본측과 교섭을 계속하였다. 광대한 철도부지를 제공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재정적 부담이 컸으므로 한국정부는 1896년 금후 1년간 외국인에의 철도 합동을 불허하였다. 결국 남대문정거장 부지는 51,819평, 영등포정거장 41,000평, 초량정거장 50,000여 평, 부산진정거장 30,000평, 그 외 군소 정거장은 각 30,000평으로 합의하였다.0445)朝鮮鐵道史編纂委員會,≪朝鮮鐵道史≫1(朝鮮總督府 鐵道局, 1937), 667∼671쪽. 선로의 모든 구간은 단선철도로 건설하기로 하고 그에 필요한 폭 18m의 부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0446)鄭在貞, 앞의 글, 175쪽. 일제는 경부 철도용지로 선로용지 319만 2천 평, 정거장부지로 127만 3천 평(각 정거장당 2만 9천 평) 도합 484만 5,741평을 수용하였다.

 경의철도는 군용철도로 전쟁기간 중에 부설되었으므로 부지 수용의 규모와 수용방법에 있어 더욱 약탈적이었다. 한일의정서에 의해 일본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隨機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경의선·마산선을 군용철도로 지정함으로써 부설에 필요한 부지를 군용목적의 철도용지로 수용할 수 있었다.0447)朴萬圭, 앞의 글, 252쪽. 경부철도의 경우는 일본이 제공한 차관으로 한국정부가 토지를 매수하는 형태였으나, 경의철도의 경우는 일본정부가 헐값으로 직접 매수하는 형식을 취하였다.0448)일제는 경의선 부설에 착수하면서 필요한 地段에 대해서는 개인의 건축물을 훼철 이전하는 데 대한 배상만을 지급하고, 토지에 대해서는 그 소유주 여하를 불문하고 일체 보상없이 수용하여 사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朴萬圭, 위의 글, 263∼264쪽). 일본군이 매수하려던 군용 철도용지는 경의선·마산선·경원선을 포함해 1,795만 평에 달하였다. 특히 용산정거장 45만 평, 평양정거장 73만 평, 신의주정거장 105만 평, 각 정거장 당 72,060평이라는 광대한 부지를 요구하였다.0449)鄭在貞, 앞의 글, 183쪽. 일본측은 최종적으로 각 정거장 당 15,892평을 확보하였고 용산은 50만 평, 평양은 35만 평, 신의주는 62만 평을 확보하였다.

 일본의 방대한 철도부지 요구는 한국인의 민심을 자극해 집단적인 저항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철도부지에 들어가는 토지는 대부분 일반인의 사유전답이었으므로 부지 수용과 보상비의 지급문제를 둘러싸고 분규가 발생하였다. 한국정부가 제시한 보상가액이 평당 17전이었으나 실지 보상액은 시가의 2분의 1내지 5분의 1에 불과한 평당 7.6전이었으므로 한국인의 반발이 강력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거의 무상으로 철도부지를 약탈하였다.

 토지를 빼앗긴 주민의 저항은 강력하여 平壤外城民 4∼5천 명이 會集하여 관찰부로 몰려가 평안남도 관찰사와 담판을 벌이기도 하고,0450)鄭在貞, 위의 글, 208쪽. 남대문정거장 예정지 주민 수백 명이 가옥·분묘의 철거에 반대해 한성부에 몰려가 호소하기도 하고0451)鄭在貞, 위의 글, 172쪽. 정거장을 용산으로 옮겨 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하였으나0452)朴萬圭, 앞의 글, 256쪽. 주민들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결국 철도연선의 주민들은 방대한 토지와 가옥을 상실하고 강제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철도건설에 대한 한국인의 방해와 공격이 행해졌다. 이러한 반철도투쟁은 의병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04년 7월 이후 서울·경기도·평안도 지역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군용지·철도용지 수용과 물자·재료의 징발 및 노동력 수탈에 저항하는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철도와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일진회원을 공격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0453)鄭在貞, 앞의 글, 243쪽. 대표적인 사건으로 1904년 8월의 경부철도 연선의 시흥군 주민 1만여 명의 봉기와 경의철도 연선의 곡산군 주민의 봉기를 들 수 있다.0454)鄭在貞, 위의 글, 249∼253쪽. 이들 봉기는 강제적인 노동자 동원과 이에 편승한 지방관의 수탈 및 저렴한 임금 등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05년 경부철도의 영업 개시이래 줄기차게 전개된 연선 주민들의 철도에 대한 저항은 열차 통행의 방해라는 소극적 행동에서부터 정거장의 습격 파괴라는 적극적인 행동까지 다양하였다. 달리는 기차에 투석을 한다거나, 철도선상에 바윗돌을 장치하여 열차를 전복시키고 철도연변의 전신주를 파괴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0455)≪大韓每日申報≫, 1907년 8월 5·13·30일 및 9월 24일. 이것은 철도의 부설과 그 운수가 다름아닌 한국민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연선 주민들의 분노의 표시였다.

 경의철도 선로에 대해서도 파괴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연선 주민들과 의병들의 철도 공격 중 상징적인 것은 철도 정거장의 공격과 파괴였다. 철도 정거장이야말로 일제의 한국지배의 거점이자 수탈의 창구였으며, 일본인의 대량 이주로 한·일 양국민의 갈등과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한일합병 때까지 연선 주민들과 의병의 공격을 받고 파괴 또는 소실된 철도 정거장은 경의선의 一山驛, 경부선의 小井里驛·若木驛·伊院驛 등인데, 공격미수로 그친 곳은 수없이 많았다.0456)≪大韓每日申報≫, 1907년 9월 10·14일. 이와 같이 철도연선 주민들과 의병들에 의한 열차운행의 방해와 철도역에 대한 공격은 한국인들의 생존권 투쟁임과 아울러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무력 항일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현지 관리와 현지 주민, 철도·전선연변의 주민, 철도역부, 광업종사자의 생존권 수호투쟁은 나아가서는 민족보존 의식으로 성장하였고 민족운동의 한 역량을 갖추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한편 1883년<조일통상장정>체결 이후 일본어민의 通漁가 활발해지자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던 한국어민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청, 특히 일본어민들은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통상장정에서 허가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어로행위를 하거나 소정의 어업면허세조차도 내지 않으려고 불법 密漁를 행하거나 심지어 한국어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생명을 빼앗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지방관들은 일본어민의 불법 어로를 제대로 단속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범죄자가 발생하면 일본영사의 재판에 맡기게 한 규정에 따라 고작 일본영사관에 항의하는 정도였고 범법자를 체포하여 단속하는 일은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외국 어민의 불법어로와 침탈은 더욱 횡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많은 일본인들이 免狀(면허장)없이 불법적으로 출어하였고, 한국어민들이 설치해 놓은 어장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방해하거나 어장 등을 훼손하고 우월한 어구와 어법으로 전복 등을 모조리 잡아 종자가 멸종될 지경에 이르게 하기도 하였다.0457)이영학,<개항이후 일제의 어업침투와 한국어민의 대응>(≪역사와 현실≫ 18, 한국역사연구회, 1995), 164쪽.

 더구나 일본어민들은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어서 부녀자들이 함께 조업하는 곳에서까지 꺼리지 않고 나체로 어로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 연안의 촌락에 들어가 물품을 구입할 때에도 나체로 다녀 한국인의 혐오감과 경멸을 사는 등 풍습을 해쳤다.0458)≪通商彙纂≫ 2호, 明治 26년 1월호.

 이러한 일본어민들의 불법행위로 인해 한국어민과 일본어민 간에는 상호 갈등과 충돌이 끊임없었다. 특히 제주도의 경우는 내륙의 한국어민들조차도 출어가 금지된 곳이었으나, 일본어민이 어업을 행하기 시작하자 제주도어민들이 타격을 크게 입었으므로 갈등이 더욱 심하였다. 1883년이래 제주도어민들은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으며, 1884년에는 統理衙門에 일본어민의 조업을 금지시켜 달라는 집단적 상소문을 올리는 등 수시로 중앙정부에 일본어민의 출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1890년 5월에는 제주도에 일본어선 100여 척이 떼를 지어 상륙해 민가 약탈, 부녀자의 겁탈, 관리·민간인의 살상 등을 일삼는 일본어선의 횡포에 대해 제주도민들은 목재와 물의 공급을 거부하고 대항하였다. 또한 제주도민은 수차에 걸쳐 집단으로 상경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려서 일본인의 만행을 규탄하였으며, 정부에 대해서 일본 어민의 제주도 통어를 완전히 금지시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0459)박구병,<韓日近代漁業關係>(≪부산수산대학 연구보고≫ 7-1, 1967) 참조. 제주도민들은 통어 금지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자 1891년 3월 정부에서 현지 실정을 조사하도록 파견한 巡審官을 습격하여 구타하고 내쫓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한국어민들은 일본어민들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을 호소하는 한편, 나아가 직접 일본어민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즉 부산이나 충청도지역 어민 중에는 자본을 투자하여 일본 漁舟와 일본 漁具를 사용하는 자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일본의 漁艇을 소유한 자도 있었다. 한국어민 스스로가 일본 어업의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선진적인 어구와 어획법을 도입하여 경쟁해가기도 하였다.0460)박구병,<韓國漁業技術史>(≪韓國文化史大系≫3,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8), 264∼276쪽.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일본인 어민이 발달된 어구와 어획법을 바탕으로 한국 연해의 어장에 대한 침탈을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주도어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일본은 군함을 파견하여 연해의 섬을 순시하면서 무력시위를 행하여 한국인에게 위압감을 주어 진압하기도 하였다.0461)이영학, 앞의 글.

<李培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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