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1. 서재필의 귀국활동과 독립협회 창립
  • 2) 독립신문의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

2) 독립신문의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

 서재필은 귀국 직후부터 김홍집내각을 통제하고 있었던 일본측의 질시와 때로는 신변 위협을 받아왔다. 반면에 서재필은 국제적으로 일본 일변도의 의존관계를 벗어나서 다변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방도를 암중모색하고 있었던 김홍집내각의 입각 권유를 사양하면서도 그들과 긴밀하게 협의하고 지원받는 가운데 독자적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이러한 서재필로서는 일본이라는 커다란 걸림돌을 일거에 해소시켜 준 것이 아관파천이었기 때문에, 한때나마 그로 인해서 좌절을 맛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데 그리 많은 시일이 걸리지는 않았다.

 서재필은 아관파천에 담겨진 반개화적, 보수회귀적 역기류에도 불구하고 새로 입각하거나 요직에 들어간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여전히 중직을 맡고 있었던 개명관료들, 특히 건양협회 임원들의 계속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3월 13일에는 그때까지 맡아오던 중추원 고문관에 더하여, 임시로 농상공부의 고문관직까지 겸하면서 한층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0514)內閣編錄課,≪存案指令≫, 1896년 3월 13일.
≪漢城新報≫, 1896년 3월 19일, 잡보.
그리고 귀국 후의 중요한 활동방향으로 설정했었던 국·영문 신문발간의 숙원도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물포·원산·부산·파주·송도·평양·수원·강화 등지에 分局까지 마련하는 등 기본적인 준비 끝에, 1896년 4월 7일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민간신문인≪독립신문≫의 창간호를 마침내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다.

 물론 아관파천 후 서재필의 독립신문 발간작업이 모두 순탄하게 진행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을 만 했던 것은 쫓겨난 김홍집내각이 약속했었던 신문발간에 대한 정부지원을 새로 들어선 친러 박정양내각이 온전하게 이행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다행히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쫓겨난 내각이나 새로 들어선 내각이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갈아 앉은 다음에는 그것이 원만히 처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정부지원금 5,000원이었다는 통설은 50년이 지난 뒤 서재필의 기억에 의존한 내용이어서 신빙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귀국 후 2년반 뒤에 서재필이 정부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을 때, 10년간의 중추원 고문관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한 잔여기간 7년 10개월에 대한 봉급액과 여비 600원을 합한 28,800원 중에서 독립신문 발간시에 정부가 서재필에게 지급했던 선급금 3,000원과 신문사 사옥구입금 1,400원 도합 4,400원을 공제하고 나머지 돈을 정부가 물어준 일이 있다.0515)≪舊韓國外交文書≫第十一卷(美案2)(고려대 출판부, 1967), 334∼36쪽, 1898년 4월 26일 알렌 미국공사와 조병직 외부대신 간의 거래문건<徐載弼雇約繳還의件>및<徐載弼雇約文領受의件>. 그런데 알렌 미국공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정부와 서재필 사이의 이와 같은 왕래과정에서 중요한 매듭으로 떠오른 것이 고문관 계약 때 작성했던 계약서를 반환하고 반환받는 일이었다. 고문관 계약조건은 구체적으로 문서화되어 있었음에 반하여, 정부가 두 차례에 걸쳐 4,400원의 국고금을 서재필에게 지출했을 때에는 명확한 한계를 긋지 않은 채 처리했다가 후일 잔여기간의 봉급지급이 불가피해지자 기왕의 국고 지출금액을 공제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하튼 서재필로서는 국고에서 지출해 준 이 돈 4,400원이 사옥 구입을 포함한 여러 가지 신문발간 준비를 위해서 요긴하게 사용한 자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한글판과 영문판의 합본 형식0516)1896년 첫해에는 총 4면 중 3면까지의 한글판≪독닙(립)신문≫과 나머지 4면의 영문판 The Independent를 한데 묶어서 화·목·토 주 3회씩 발행하다가 이듬해인 1897년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따로 떼어서 각기 4면씩 발행했다.
그후≪독립신문≫은≪협성회회보≫의 후신으로 등장한≪매일신문≫의 일간화에 자극을 받아 1898년 7월 1일부터는 일요일을 제외한 주 6회의 일간지로 발전하였으며 The Independent는 그후에도 주 3회로 일관하였다.
협성회가 주간의≪회보≫를 창간한 것은 1898년 1월 1일의 일이지만 제14호를 마지막으로 주 6회의≪매일신문≫으로 바뀐 것은 같은 해 4월 9일부터의 일이므로 일간지로서는≪독립신문≫보다 앞섰던 것이다.
으로 첫선을 보였던≪독립신문≫의 출현은 즉각적으로 내외의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창간호에 대한 일반인들과 관리들의 반응이 대단히 호의적이었음은 바로 그 다음호의 기사중에 “길에서 신문지들을 보고 상하 노소 귀천없이 다 말하기를 이 신문지에 한 말이 지극히 옳고 또 볼만한 말이 많다고 하는데 그중 유지각한 이와 각부 관원들이 (말)하기를 신문사원을 보고 이 신문하는 것이 매우 기쁘고 감사하다고 하더라”0517)≪독립신문≫, 1896년 4월 9일, 잡보.라고 보도한 데서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주겠다고 “다섯∼여섯장씩 한번에 사가더라”는0518)≪독립신문≫, 1896년 4월 11일, 잡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신문의 창간호를 접한 외국인들은 단순히 그 형태나 내용면에서가 아니라 전반적인 기획의 측면에서 ‘참 잘된 일’이라거나 ‘조선에 꼭 필요한 일’ 또는 ‘하나의 중대한 혁신’이라는 표현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0519)The Independent, April 9th 1896, Local Items. 한문을 모르는 평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글(諺文) 전용 체제를 채택한 사실에 특별히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던 영문월간지≪조선휘보≫(The Korean Repository)의 기사0520)Editorial Department, “The Seoul Independent,” The Korean Repository, Vol. Ⅲ, No. 4(April, 1896), p.171.에서도 독립신문에 대한 호의적 평가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사람들의 횡포에 대한≪독립신문≫의 폭로기사로 인하여 한 달도 넘기기 전부터 역공세를 펴게 되었던 일본계의≪漢城新報≫조차도 당초에는 신문의 역할을 인체의 耳目에 비유하여≪독립신문≫이 국민의 귀와 눈으로서의 사명을 다해 줄 것을 당부하고 축하하는 뜻을 기사화할0521)≪漢城新報≫, 1896년 4월 9일 3면,<獨立新聞發刊>. 정도였다.

 독립신문은 창간호로 2,000부를 발행했는데, 지방에는 미처 보급하지 못했던 2, 3일 동안에 매진되고 말았다. 호기심에서 구입한 사람들보다도 정기구독 신청자가 쇄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결국 발행부수를 곧바로 3,000부로 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0522)The Independent, April 9th 1896, Local Items. 이해할 만 하다. 서재필 자신도 “발행부수의 증가가 마치 走馬加鞭(by leaps and bounds) 격이었다”0523)F. 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Seoul:Reprinted by the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p.67.고 회고한 일이 있다. 그만큼 독립신문은 “처음부터 조선사람들 사이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0524)Homer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p.152.고 헐버트가 평가한 바 있지만 “항간에 대호평을 사서 사회각층에 널리 읽혀졌다”0525)徐載弼,<滯美五十年>(閔泰瑗,≪甲申政變과 金玉均≫, 國際文化協會, 1947), 91쪽.고 한 것 외에도, “한 구독자가 다 읽은 다음에는 이웃사람들에게 넘겨주고 또 넘겨주는 식으로 해서 한 장의 신문이 최소한 200명에게 읽혀졌다”0526)F. A. Mckenzie, ibid.고 한 서재필의 회고적인 술회가 과장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보급효과나 영향력이 상상이상으로 큰 것이었음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처럼 놀라우리만큼 파급효과가 컸던 대중매체를 통하여 서재필 자신의 독립자존적 계몽주의 이념상과 고도의 대중취향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영문판(The Independent) 창간호에서 신문의 강령으로 꼽은 것은 ①조선 국민을 위한 조선, ②깨끗한 정치, ③대외적 우호관계의 유대증진, ④조선 자본에 의한 조선 자원의 꾸준하고도 점진적인 개발 등이었다. 이러한 강령은 당시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조선을 열강의 이권쟁탈의 소용돌이속에서 벗어 나오게 하면서 민중의 권익을 도모할 수 있는 나라로 발돋음하게 하려는 데 목표를 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에는 개항장 중심으로 일본계 신문들이 발간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의≪한성신보≫와 제물포의≪朝鮮新報≫는 일본상인들의 권익보호를 포함한 일본의 對韓政策 노선을 항상 앞장서서 밀고 나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우리의 신문이 절실했었던 상황에서≪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글판 독립신문의 기사도 그러하지만 특히 영문판 기사들은 일본신문 이외에도 우리 나라 사정을 편견으로 오도하기 일수였던 외국신문들의 기사에 대해서는 일일이 맞대응하여 날카롭게 비판하고 바로잡는 데 주저함이 없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독립신문≫이 국수적인 애국주의의 도구로 자리잡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강령에서 표방하고 있는 ‘조선국민을 위한 조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깨끗한 정치’와 ‘대외적 우호관계의 유대증진’이 요구된다는 인식에서 대내외 정책의 자주적 개혁과 경제자립을 구현하는 데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밑받침하는 데 긴요하다고 인식했던 대중교육 담당매체로서의 기능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서재필이≪독립신문≫을 통하여 대변하고자 했던 조선국민이란 최대 다수의 국민적 이익에 초점을 둔 국민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영문판 창간호의 사설에서 그가 말하는 조선국민은 “단순히 서울과 그 부근의 주민을 의미하거나 특권계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계급과 계층을 망라한 전체국민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양반중심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었고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대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제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서재필은 신문의 기본틀을 마련함에 있어서도 ‘가능한 최대다수(the largest possible number)’의 이익에 가장 잘 부합하는 조건을 강구했다는 사실을 한글판과 영문판 창간호 사설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첫째가 “누구나 배우기 쉽고…상하 귀천이 모두 보고 알아보기 쉬운” 글, 그래서 한문보다 우수하다고 자부하는 한글(a character intelligible to the largest possible number)을 전용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둘째는 가격을 정함에 있어서 가능한 최대다수의 사람들이 부담없이 사볼 수 있게 하고, 셋째는 내용을 다룸에 있어서 가능한 최대다수의 최선이익(the best interests)이 실현될 수 있게 한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서재필은 당시 우리 사회의 과도기적인 특수성을 투시하고 민중을 역사의 지평에 부상시킴으로써 사회세력의 재편을 통하여 새롭게 국민통합의 기틀을 다지려는 목적의식에서 고도의 대중취향성을 들어내 보이게 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독립신문≫발간을 계기로, 서재필이 추구하는 독립자존적 근대의식은 그의 영향력과 함께 대단히 효과적으로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일찍이 헐버트도 지적한 바 있듯이≪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이어서 추진한 “독립협회의 결성을 선도해 준 주요인중의 하나”0527)Homer B. Hulbert, ibid.로 꼽기에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긍정적인 효과만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반사되는 부정적인 시각과 작용도 사회적으로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 또한 여기서 지나칠 수 없다. 아관파천 후의 난기류를 형성했던 여러 가지 사회적 인식의 흐름중에는 自主=反日=反開化라는 시각의 흐름도 섞여있었는데, 대개는 疏章의 형식을 빌어서 표출되었던 그러한 흐름이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독립신문≫이나 서재필에 대한 탄핵의 내용을 겸하여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주적 반개화를 주조로 한 소장중에서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 일련의 정치격변과 관련되었던 중심 인물들과 그 추종세력들을 광범하게 탄핵한 前교리(4품) 李承九의 6월 27일자 상소0528)≪高宗實錄≫권 34, 건양 원년 6월 27일, 590쪽.는 박영효를 필두로 하여 수많은 인물들을 탄핵 대상으로 거명하였다. 미국에 가 있던 박영효가 5월 21일 오후 3시에 미국 우편선 편으로 요코하마항에 도착하였고 곧이어 동경으로 들어가 머물고 있다는 신문보도0529)≪漢城新報≫, 1896년 5월 29일, 잡보.에 자극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승구가 탄핵 대상속에 서재필을 명시적으로 포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상소는 서재필에 대한 우회적인 공격의 예로서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반하여 실록에는 등재되지 않아서 자세한 날짜를 알 수 없으나 비슷한 무렵, 수원에 사는 金顯琪·金昌海·曺錫允 세 사람의 연명으로 올린 상소에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서재필과≪독립신문≫을 집중 공격하고 있었음에 유의하게 된다. 국왕의 還御를 급선무로 내세운 내용 이외에는 갑오경장 이전의 구습으로 되돌아 갈 것을 요구하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러한 줄거리와 맥을 같이하는 가운데 일곱 가지 조목0530)≪漢城新報≫, 1896년 7월 2일 및 4일,<論時務疏>.
이들이 역설한 7가지 조목은 ①還御之急, ②還束髮着網巾事, ③軍隊巡檢兵丁之服色還改事, ④廢諺文官報事, ⑤還用陰曆事, ⑥討甲申逆黨廢獨立新聞事, ⑦廣設鎭衛隊以鎭民心事 등이다.
중의 하나로 “갑신역당을 토죄하고≪독립신문≫을 폐간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탄핵은 독립협회 창립 직후까지 계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진사 鄭惺愚의 論劾疏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정성우는 7월 9일에 올린 소장0531)≪高宗實錄≫권 34, 건양 원년 7월 9일, 591쪽.에서, 앞의 두 탄핵소의 문맥을 대체로 되짚어가면서 逆徒·凶徒·亂徒·亂臣·亂黨·逆黨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의 구사와 함께, 서재필은 “국가 권병을 손끝으로 농간하고 폐하 앞에서 외신을 자칭한다(手弄國柄, 自稱外臣於陛下之前)”는 이유를 앞세우고≪독립신문≫은 “나무라고 비웃기나 할 뿐 도무지 의리가 없다(不過誹訕,都蔑義理)”는 이유를 들어서 맹렬히 규탄하였다. 또한 이미 쫓겨났거나 살해된 박영효·김홍집·어윤중·유길준·정병하·조희연 등을 같은 극언으로 얽어서 비난 공격하는 한편, 아직도 건재한 박정양·김윤식·이윤용·조병직·안경수·김가진을 겸하여 집중 탄핵하였다.0532)박정양과 조병직은 貪官無義·義消亂起로, 이윤용은 功罪兼全·一門貪官으로, 김가진과 안경수는 先唱國病으로 탄핵사유를 밝혔다.

 그러나 “駁論을 具悉한 즉 虛實이 많다”는 당일의 批旨0533)≪官報≫, 1896년 7월 9일, 호외.에 힘입은 서재필은 계속되는 인신공격과 모함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탄핵받은 박정양·이윤용·조병직·안경수·김가진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다음날로 정성우를 고등재판소에 형사 고발하는 한편 명예훼손 배상금으로 서재필은 2,000원을, 그리고 다섯 사람은 공동으로 5,000원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아울러 제기했다. 피고인 정성우는 53세로 相臣을 지낸 鄭映錫의 조카이며 전판서 이경재의 女胥이지만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것이어서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전승지 李最榮과 전참의 金亮漢, 그리고 심지어는 서재필의 장인이었던 전승지 金永錫0534)서재필이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한 후 친정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음독 자살하고 말았던 서재필의 조강지처 광산 김씨의 부친이며 사계 김장생의 후예이다.까지도 그의 배후에서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민사재판은 그 다음날에 시작되어 서재필을 제외한 원고 5명과 피고의 대질심문, 피고의 탄핵사유에 대한 사실심리, 김영석·김양한에 대한 증인심문이 이틀동안 진행된 다음에 원고 전원의 승소판결을 선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어진 형사재판에서는 피고 정성우를 ‘笞 일백·징역 3년’에 처하기로 판결을 선고하고, 임금에게 상주한 결과 ‘3년 유배’로 특지가 내려지는 결말이 나게 되었다.

 서재필로서는 이 재판을 통하여 크게 건진 것이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그가 귀국한지 얼마 뒤부터 시달려온 이른바 국왕 앞에서 스스로를 외신 운운했다는 낭설과 모함이 뜬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4백 여명이 방청하는 공개 재판석상에서 분명하게 가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에 대한 사실과 다른 그러한 인식은 당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뒤에도 상당 기간동안 뿌리깊게 작용해 왔음을 유의하게 된다. 서재필은≪독립신문≫을 발간함으로 해서 기대이상의 긍정적 평가와 그에 따르는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그것은 그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려는 부정적인 의식작용을 자극하게 되었고 따라서 서재필로서는 그 대응전략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서재필은 진작부터 사회의 일각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의 골이 깊게 패여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협회의 창립작업도 그만큼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추진하게 되었던 것임을 이어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독립신문≫의 발간이 궤도에 오름으로써 한숨 돌리게 된 서재필은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공개강연을 일단은 분리시켜서 청중의 동질성에 기초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형태전환을 시도하게 되었다. 5월 21일부터 배재학당 학도들에게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채플시간에 이어서 ‘만국지리와 다른 학문상의 일’0535)≪독립신문≫, 1896년 5월 23일, 잡보.을 정기적으로 강연을 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서재필의 목요강좌’라고 일컬어도 무방할 것이다.0536)서재필의 목요강좌가 배재학당에서 많은 주목을 끌게 되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록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D. A. Bunker, "Pai Chai College", The Korean Repository, Vol. Ⅲ, No. 9(September, 1896), pp.361∼364). 서재필은 이 목요강좌에 참여한 학생들을 계속 지도하여 이 해 12월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학생 토론써클이라 할 수 있는 協成會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김홍집내각의 박영효 계열에 의해서 착수하게 되었던 이른바 事大遺物 제거작업의 일환으로 1895년 2월에 헐어버렸던 迎恩門의 옛터에 獨立門을 세우고 獨立公園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계획을 별도로 추진하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개칭하는 일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던 일련의 독립기념물 건조사업계획은 내각과 집권관리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업을 주관할 결사체의 조직이 시의적절한 일로 인식되어 6월 7일에는 그가 고문직을 맡고 있는 중추원 건물에서 14명으로 구성된 발기인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다소 내밀한 조직의 성격으로 머물러 있었던 건양협회가 발전적으로 탈바꿈하는 독립협회의 예비적인 결성을 보게 된 것이다. 이날 독립협회의 발기인 모임에 참석했던 14명의 발기인은 아래의 명단과 그들의 전직 또는 현직 직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신(장관)급 4명, 협판(차관)급 5명, 국장급 5명으로 전원이 아관파천 이후 현직 고급관리였음을 알 수 있다.0537)亞細亞文化社에서 영인으로 간행한≪舊韓國官報≫3권(1895)과 4권(1896)에서 확인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사회의 최상류급 인사들이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한 인물들이었다고 보겠다.

 발기인 14명의 명단과 그들의 전현직을 살펴보면 安駉壽(전 군부대신, 1896. 2. 11 경무사), 李完用(전 학부대신, 1896. 2. 11 외부대신), 金嘉鎭(전 농상공부대신, 1896. 2. 19 중추원 일등의관), 李允用(전 경무사, 1896. 2. 11 군부대신), 金宗漢(1895. 10. 8 궁내부협판, 1896. 1. 10 겸임 秘書院卿 典醫司長, 1896. 2. 12 궁내부 특진관), 權在衡(전 군부협판, 1896. 2. 22 법부협판), 高永喜(1896. 1. 4 농상공부협판, 1896. 3. 9 외부협판), 閔商鎬(외부교섭국장 1896. 2. 22 勅任四等, 1896. 4. 14 학부협판), 李采淵(전 한성부관찰사, 1896. 3. 23 농상공부협판), 李商在(1895. 12. 26 학부참서관, 1896. 2. 24 내각총서), 玄興澤(전 내장원 莊園司長, 1896. 4. 14 내장사장), 金珏鉉(외부참서관, 1896. 3. 20 외부교섭국장 奏任四等), 李根澔(1896. 3. 12 중추원 일등의관, 1896. 5. 12 내부 위생국장), 南宮檍(1895. 10. 31 내부 토목국장) 등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여기서 짚어두려는 것은 서재필의 독립협회 창립작업이 매우 신중하고도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 관한 영문 계간지≪조선휘보≫가 서재필과의 대담내용을 가지고 작성한 기사0538)Editor, “The Independence Club,” The Korean Repository, Vol. Ⅴ, No. 8 (August, 1898), pp.281∼287.에 의하면,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계획을 부각시키기에 앞서서 당초에는 정부의 고급관리들에게 약간 막연하게 ‘공원 설립의 득책(advisavility of establishing a public park)’을 역설했던 것으로 드러나 있다. 이 제안이 점차적으로 내각과 중견관리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자, 남달리 기회포착에 기민했던 서재필은 자신이 제의한 사업을 밀고 나갈 단체 결성의 필요성을 아울러 역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열 두 서너 사람의 고급관리들이 6월 7일 중추원 건물에서 회합을 갖고 독립협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재필은 이처럼 독립협회의 발기인 모임이 성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비로소 독립협회가 해봄직한 하나의 훌륭한 사업(a grand thing for the society)으로서 독립문 건립계획을 처음으로 발설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 기록의 대강 줄거리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공원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자연스럽게 그 사업을 추진할 단체결성의 필요성을 연계시킨 다음 그의 주장에 찬동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발기인 모임을 마련한 자리에서 비로소 독립문 건립계획을 내어놓은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서재필이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이라는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염두에 두고 건양협회를 탈바꿈시키는 형태로 독립협회의 창립을 새롭게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독립신문≫을 창간한지 얼마 뒤부터가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그만큼 여유있게 구상을 다지고 점검하면서 설득을 펴왔기 때문에 6월 7일의 발기인 모임에서는 기본적인 사업의 윤곽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독립문 건립계획에 관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아낼 때까지는 그에 관한 발설을 최대한으로 억제하여 왔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6월 20일에 이르러서야 그의 신문 영문판 사설에서 “오늘 우리들은 국왕폐하께서 서대문밖에 있는 영은(연주)문 헐린 자리에 독립문이라고 부르게 될 새로운 문을 세우기로 결정을 내려주신 사실을 기쁘게 생각한다”0539)The Independent, June 20th 1896, Editorial.고 처음으로 그 계획의 일단을 명시적으로 표현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임금의 재가를 받아냄으로써 사회 일반이 독립문 건립계획을 마치 정부가 의결한 사업으로,0540)≪漢城新報≫(일어판), 1896년 6월 22일, 잡보<迎恩門と獨立門>. 따라서 정부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사업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효과마저 거두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서재필이 한글판≪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하여 독립문 건립의 목적과 필요성을 사회 일반에 공개적으로 주지시키기 시작했던 것도 바로 같은 날(6월 20일)부터의 일이었다. 청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이 이제는 독립국이 되었으므로 세계 각국의 제왕과 동등하게 된 대군주 폐하에게 각국 인민들과 동등하게 된 조선인민들은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요지를 앞세웠던 이날 논설의 독립문 관련 주요 내용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근일에 들으니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 있든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 문 일홈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가 세우는 뜻은 세계만국에 조선이 아조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② 이왕에 거기 섰던 연주문은 조선사기에 제일 수치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려면 다만 그 문만 헐어버릴 뿐이 아니라 그 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초를 세우는 것이니 우리가 듣기에 이렇게 기쁘고 경사로운 마음이 있을 때에야 하물며 조선인민들이야 오즉 즐거우리요

③ 남의 나라에서 들은 승전을 한다든지 국가에 큰 경사가 있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 높은 문을 짓는다든지 비를 세우는 풍속이라. 그 문과 그 비를 보고 인민이 자기 나라의 권리와 명예와 영광과 위엄을 생각하고 더 튼튼히 길러 후생들이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자는 뜻이요. 또 외국사람들에게도 그 나라 인민의 애국하는 마음을 보이자는 표라

④ 만일 그 독립문이 필력이 되거드면 그날 조선 신민들이 외국 인민을 청하야 독립문 앞에서 크게 연설을 하고 세계에 조선이 독립국이요 조선인민들도 자기들의 나라를 사랑하고 대군주 폐하를 위하야 죽을 일이 있으면 죽기를 두려워 아니 하는 것을 세계에 광고함이 좋을 듯 하더라(≪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 논설).

 서재필이 독립협회의 발기인 모임을 전후하는 기간에 발기인들과 정부관리들을 어떠한 논리와 내용으로 설득하고 이해시켰는가를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겸해서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일에 들으니”라던가, 또는 “우리가 듣기에 이렇게 기쁘고 경사스러운 마음이 있을 때에야”라는 표현들이다. 그것은 신문 발행인으로서의 제3자적인 위치를 객관적으로 견지하려는 서재필의 신중성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때는 발기인 모임을 통해서 독립협회의 내부 결성이 매듭지어진지도 2주가 다 될 무렵이었지만 서재필은 이때까지도 독립협회라는 조직체에 관해서는 일체의 발언을 접어두고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조심성은 독립협회의 결성을 공개적으로 마무리짓기로 되어 있었던, 따라서 독립협회의 공식적인 창립일로 꼽히게 되었던 7월 2일의≪독립신문≫논설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나 있다. “일간에 조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중추원에서 모여 모화관을 고쳐 독립공원지를 만들 일을 의논할 터인데…”라고 서두를 시작하면서 사업자체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의미 부여를 하면서도 독립협회에 대해서는 이름조차도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의 절제와 조심성을 계속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의 공개적인 결사화 이전단계에서 보여주었던 서재필의 이와 같은 신중한 태도는 독립협회의 창립총회가 성공적으로 치루어진 시점까지도 연장된 듯한 감이 없지 않다. 이점은 “아마 조선도 차차 되어가는가 보더라”라는 말을 앞세워 역사적인 의미 부여와 함께 독립자존의식과 공공정신의 발현을 격찬하면서 그러한 뜻깊은 조직체의 창립을 처음으로 보도한 7월 4일자의≪독립신문≫논설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알 수 있다.

 즉 거기에서는 14명의 발기인 명단과 새로 선출된 20명의 임원 명단, 그리고 창립총회석상에서 5백10원의 찬조금을 출연한 15명의 명단과 금액까지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그러한 활동의 구심점이 될 조직체로서의 ‘독립협회’의 이름은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의 논설에서는 두 번씩이나 이들이 벌이는 사업취지에 찬동하는 사람들의 찬조금 출연을 적극 권장하면서 그 명단을 계속해서 신문지상에 발표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에 따라서 7월 7일자의≪독립신문≫잡보에는 2차로 보조금 출연자 9명의 명단과 금액이 발표되었는데, ‘독립협회’의 이름이≪독립신문≫지상에 오른 것도 이 기사가 처음이었다.

 “독립공원지와 독립문 건설하는 데<독립협회>에 이왕 오백십 원 외에 새로 수립한 것이…도합 일백일 원이요 전 것까지 병하여 륙백십일 원이라. 공심있는 사람들은 속히 대정동 은행소에 계신 안경수씨께로<독립협회>보조금을 보내시요”라는 기사에서 독립협회의 이름이 처음으로 두 차례나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앞에서 논급한 바 있듯이, 6월 하순에서 7월 초순은 직간접으로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규탄하는 상소의 전문이≪漢城新報≫의 지상에 두 차례나 보도되던 때였음을 연관시켜서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서재필이 공원 조성안을 제기한 이후로 본격화되었던 독립협회에 대한 조직의 착수는 그가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개시한 5월 하순과 시기를 거의 같이 할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는 서재필이≪독립신문≫의 창간작업에서 어느 정도 헤어나올 수 있었던 시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6월 7일에 열렸던 발기인 모임에 앞서 필요했었을 준비기간으로 보아서도 그러했음직하다. 결국 서재필은 보름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동의를 받아낸 14명의 발기인 모임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 자리에서 독립문(Independence Arch)의 이름은 물론이고 이를 위한 모금운동의 중심체가 될 결사체로서의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의 이름도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은 곧이어 독립문의 건립과 독립협회의 결성에 대한 임금의 재가를 받아냄으로써 그가 추진하는 독립기념물 건조사업에 대한 정치적 보장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공개적인 결성이 기정사실화될 때까지는 철저하게 독립공원 조성과 독립문 건립의 계획만을 전면에 내세우고 독립협회의 창립작업에 대해서는 주위의 시선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독립협회의 출범을 안전하게 유도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독립협회의 창립과정에서 보여준 서재필의 이와 같은 치밀한 신중성은 한편으로는 그의 기민한 판단력과 상관된다고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건양협회의 결성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시련에서 얻은 교훈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귀국직후 서재필은 여러 가지 사업계획을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특히 일본상인들과의 이해대립을 날카롭게 했던 석유직수입회사 설립계획을 병행함으로써, 그리고 ‘사회개량과 풍속교정’을 내세운 사회운동의 중심체가 될 건양협회의 조직을 정면에 내세움으로써, 앞장서서 도와주던 김가진의 구속사태와 그 자신에 대한 일본측의 집중적인 위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결국 건양협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었던 그와 같은 경험은 독립협회를 창립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유념해야 할 값진 교훈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앞서 발기인 모임을 가진지 25일째가 되는 1896년 7월 2일 오후에 새로 外部가 옮겨가기로 예정되어있었던 종전의 중추원 건물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民會로서 주목받게 될 독립협회가 순조롭게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독립협회의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 장:안경수(회계장 겸임) 위원장:이완용 위 원: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 현흥택, 이상재, 이근호 간사원:宋憲斌, 남궁억, 沈宜碩, 鄭顯哲, 彭翰周, 吳世昌, 玄濟復, 李啓弼, 朴承祖, 洪禹觀

 발기인중에서는 군부대신 이윤용, 외부협판 고영희, 외부교섭국장 김각현 등 세 사람이 임원에서 제외되었으며 주요 회무를 심의 의결하도록 되어있는 위원회의 위원 8명 전원은 발기인중에서 선출되었다. 그 대신 실무를 맡게 될 간사원은 남궁억을 제외하고는 발기인이 아닌 새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중에는 남궁억을 포함한 국장급 3명(농상공부 상공국장 송헌빈, 농상공부 통신국장 오세창) 이외에는 참서관(홍우관), 서기관(박승조), 군수(정현철, 이계필), 주사(현제복), 기사(심의석), 번역관(팽한주) 등 奏任官 5등급 또는 6등급에 해당하는 중견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서재필은 귀국 직후 사회개량이라는 목표를 내세운 활동계획의 일환으로 건양협회의 결성을 추진하였던 만큼, 그의 개혁의지에 대한 민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나아가서는 민중의 세력형성을 도모할 활동주체로서의 역할을 거기에다 기대했음직하다. 그것은 갑신정변의 실패에 대한 자기반성의 하나로 그가 뼈저리게 의식했던 ‘일반 민중의 성원’0541)徐載弼,<回顧 甲申政變>(閔泰瑗, 앞의 책), 81쪽.을 새로운 차원에서 모색하려는 욕구의 반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홍집체제의 기존성위에 뿌리를 내리게 하려고 했었던 건양협회는 거기에 착근할 겨를이 마련되기도 전에 그 김홍집체제를 전면 부정하여 버린 아관파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관파천에 담겨진 그러한 부정적 작용은 후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건양협회의 공개적인 발족에도 투사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재필은 민중지향적 운동주체로서 결사체를 결성하려는 욕구만은 계속 추구해 나가면서도 아관파천이 몰고 온 부정적 작용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처방이 필요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즉 내부결성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건양협회가 아관파천 후의 새로운 실세로 부각된 정동구락부 세력까지 포용하는 공개결사로 직접 발돋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적극 수용할 수 있도록 그것을 새로운 발전적 형태로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서 서재필이 새롭게 착수한 것이 독립협회의 창립작업이었다고 하겠다.

 일찍이 문일평은 막연하게나마 건양협회와 독립협회의 관련성을 언급한0542)文一平,≪湖岩全集≫第 1卷(政治外交篇)(朝鮮日報社 出版部, 1938), 209쪽. 일이 있었으며, 姜在彦0543)姜在彦,≪近代朝鮮の 變革思想≫(日本評論社, 1973), 155쪽.
―――,≪韓國近代史硏究≫(한울, 1982), 216쪽.
과 와타나베 마나부(渡部學)0544)渡部學,≪朝鮮近代史≫(勁草書房, 1973).도 문일평의 견해를 받아들여 건양협회를 독립협회의 전신으로 표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건양협회의 결성동기가 서재필에 의하여 직접 마련되었다는 사실까지는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인식의 한계 때문에, 서재필이 본래 자신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별개의 조직체로 존재하고 있었던 건양협회의 기존 세력을 끌어들여서 독립협회 창립 세력의 일부로 삼았다는0545)愼鏞廈,<獨立協會의 創立과 組織>(≪獨立協會硏究≫, 一潮閣, 1978), 82∼83쪽. 판단을 하게 만들 소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건양협회 세력이라고 일컫는 세력은 이전까지는 개별 분산적이었거나 잠재적인 세력에 불과했었으나 서재필의 주도적인 산파역에 의하여 건양협회의 내부결성 단계를 거치면서 비로소 하나의 현재적 세력으로 발돋움할 여지가 마련될 수 있었던 세력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독립협회의 발기인 14명중에는 건양협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정동구락부 계열에만 속했던 인물들이 있다. 이완용·이윤용·민상호·이채연·현흥택이 그들로서, 건양협회 내부결성 당시에는 전해의 춘생문 사건으로 미국공사관이나 러시아공사관에 피신중에 있었기 때문에 귀국한 서재필과는 최소한의 접촉을 해왔으면서도 건양협회에의 참여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관파천 후에 정부의 요직을 맡게 되었으며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는 데 음으로 양으로 많은 힘을 보태준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대표적인 건양협회 인물로서 김가진을 꼽을 수 있는데, 그가 건양협회 결성의 선봉장이었음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안경수를 제외한 그 밖의 발기인들은 서재필이 귀국하여 건양협회의 세력규합에 손을 대던 때에도 정부의 중직을 맡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김종한(궁내부협판), 권재형(내각총서), 고영희(농상공부협판), 이상재(학부참서관),0546)문일평에 의하면, 이상재는 정동구락부회원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정동구락부 회원들이 미국공사관이나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고 있었을 때도 그는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재필의 건양협회 결성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고 하였다. 김각현(외부참서관), 남궁억(내부토목국장)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이 아관파천 후에도 여전히 중요관직을 맡고 있었고 개중에는 더욱 중요한 관직을 맡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예컨대 권재형은 법부협판으로, 이상재는 내각총서로, 김각현은 외부교섭국장으로 승진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교적 중도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입장을 꾸준하게 지켜왔던 이들중에서 건양협회 관여자들이 다수 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예단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건양협회건 독립협회건 모두 서재필에 의하여 직접적인 결성동기가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사화작업이 계획되고 추진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으로 건양협회를 조직한 사람도 서재필이며 독립협회를 결성한 사람도 서재필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은 두 결사체의 이름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다른 두 이름이 표방하는 이념이 한가지로 상통한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청나라에 대한 종속적인 지위를 거부하고 대외적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선양하기 위한 일세일원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건양이란 연호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연호사용에 함축되어 있는 자주독립의 상징적 의미는 건양협회를 거쳐서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이념의 공통적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기의 앞과 뒤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정치변동에 각기 다르게 대응했다는 의미 이외에는 이 두 결사체에서 별개의 조직 동기를 특별하게 가려낼 필요가 제기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건양협회의 경우에는 성급하게 조직을 앞세우다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데에 반하여 독립협회의 경우에는 광범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조직 결성에 쏠리기 쉬운 주위의 경계를 따돌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건양협회를 통해서 겪은 시행착오에 대한 서재필의 자기 성찰은 독립협회의 치밀한 창립 설계로 연결될 수 있었다고 보겠다.

<韓興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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