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2. 독립협회의 조직과 운영
  • 1) 모금·계몽운동기의 조직과 운영
  • (1) 창립사업과 모금운동체제

(1) 창립사업과 모금운동체제

 창립 당시의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등 독립기념물 건조사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이를 위해서 필요한 모금운동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그 조직상의 구조나 운영방침도 그러한 활동방향에 걸맞도록 마련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96년 7월 2일 창립총회에서는 ‘규칙’ 통과에 이어서 임원 선출과 설립취지홍보문(獨立協會輪告) 채택이 있었는데, 이 세 가지(규칙·임원구성·윤고)의 내용속에서 창립 초기 독립협회의 활동과 조직·운영 사이의 연관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당초의 독립협회 설립목적은 다음의 취지문에 잘 집약되었다고 볼 수 있다.

「獨立協會輪告」

敬啓者라. 我國이 僻히 一隅에 在야 壤地가 褊히 小으로 蠼屈龍蟄의 歎이 不無야 久히 人下에 居지라. 被 西坰을 膽진 門을 名야 曰迎恩이라고 館을 名야 曰慕華라음(은) 何故야오. 嗚呼痛哉라. 此는 有志 士의 慷慨嘆息 바이러니 天運니(이) 循環샤 昔屈을 今伸야 我 大朝鮮國이 獨立國이되야 世界萬邦으로 並肩니 此 我 大君主陛下의 威德이 曠絶샤 百王에 卓冠심이오 我 大朝鮮國의 互萬古 未曾有 光榮이오 我同胞兄弟 二千萬 人口의 今日 適丁 幸福이니 倚歟誠矣라. 然이나 尙今토록 紀念 實蹟이 無은 盛一欠典이라. 玆에 公共 議로 獨立協會 發起야 前迎恩門 遺址에 獨立門을 新建고 前慕華館을 脩改야 獨立館이라야 舊日의 耻辱을 洗고 後人의 標準을 作코저이오. 其附近地 曠棄치 못으(므)로 仍야 獨立公園을 順便刱設야 써 其門과 館을 保管코져오니 盛擧라 아니치 못지라. 顧컨 其工役이 浩大야 巨款을 費리니 衆力으로 幫成치 아니면 成就기를 期치 못거시오. 我國臣民된 者가 樂聞樂赴치 아니리 無지라. 玆庸函告오니 照亮오셔 補助金을 多少間에 隨意送付시고 本會會員에 參入실 意가 有시 거든 示明심을 望니다.

 建陽元年 七月 日 獨立協會

 會長      安駉壽

 事務委員長   李完用

 再 補助金은 京城 大貞洞 朝鮮銀行으로 送交시되 日曜日外에 每日午前十時로 午後三時지 領受고 獨立新聞에 廣告갓나니다(≪大朝鮮獨立協會會報≫1호, 1896년 11월 30일, 8∼10쪽).0547)구두점, 띄어쓰기, ( )안의 바로잡기 등은 필자의 것이다. 여기서 ‘輪告’라고 한 것은 ‘널리 알리는 말씀’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협회를 이끌어 나갔던 주역들은 지난날 외세에 종속적이었던 우리 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몸을 구부리고 움추리는 ‘蠼屈龍蟄’0548)이것은≪周易≫,<繫辭下傳>에 나오는 “尺蠖之屈 以求伸也 龍蛇之蟄 以存身也”(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펴기를 강구하기 위함이요 용과 뱀이 움추리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다)라는 글귀중에서 추려낼 수 있는 ‘蠖屈’과 같은 뜻으로 ‘蠼屈’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첫자(蠼)는 달리 집게벌레를 뜻하는 蠼螋의 첫자이기도 하므로, 위의 주역에서 말하는 집게벌레(蠖)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蠼屈’과 ‘龍蟄’은 한묶음으로 나라의 대외적 종속성을 의념화한 개념으로 이해된다.의 상황이었음을 전제하면서, 영은문과 모화관을 그러한 굴욕적인 위상의 상징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예전의 굴욕적 상황(昔屈)과 그것을 극복한 오늘의 당당한 독립국가의 위상(今伸)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지난날의 치욕을 씻고 후손들에게 독립국가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는 그러한 굴욕적인 상징물들을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과 같은 영광의 상징물로 자리바꿈시키는 일이 절실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여건으로서는 그와 같은 독립기념물 건조공사(工役)의 규모가 대단히 큰 것이어서 거액(巨款)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다중의 힘(衆力)으로 정성과 협조를 일구어내지(幫成) 못한다면 성취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것은 독립협회 창립의 취지를 널리 알리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성금(補助金)의 출연을 거듭해서 촉구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창립총회에서 통과된 아래의 총 21조의「독립협회 규칙」은 이와 같은 설립목적을 구체적으로 추진시켜 나가려는 의도를 그대로 담고 있다.

「獨立協會規則」

 第 1條  本會 獨立協會로 稱 事

 第 2條  獨立協會에셔 獨立門과 獨立公園 建設하 事務 管掌 事

 第 3條  獨立協會의 職員은 左開 로 定 事

      一. 會長 一人     一. 委員長 一人

      一. 委員 二十人 內外

      一. 幹事 二十人 內外(內에 若干人은 書記 掌簿 看役 等 差備 掌 事)

      一. 會計長 一人    一. 會員 無定數

 第 4條  會長은 會議時에 叅席야 議件에 決裁 事

 第 5條  會長이 有實故時에 委員長이 臨時代辦 事

 第 6條  會議時에 議員中 失儀와 或 違章 者는 輕重을 隨야 或 罰金或黜會되 罰金은 一元以上 五元以下로 定 事

 第 7條  會議 日時 每土曜日 午後二時로 고 但 特別會議時에 書記로 야금 各員에게 通知 事

 第 8條  會長以下 諸員이 原定會日 或 特別會日에 實病實故外에 반다시 叅席〔〕事

 第 9條  委員長은 委員의 首席이라 會中 大小事務를 반다시 各委員의 議를 收야 會長에게 決裁를 請 事

 第10條 委員長이 有故 時에는 之次委員이 代辦 事

 第11條 委員은 工役의 計劃과 制度와 式樣과 圖形과 費用을 議定 事

 第12條 委員은 何項事件이던지 各기 意見을 具야 會席에 提出야 可否間 多數로 議決 事

 第13條 各項費用은 各委員이 協議야 委員長을 經야 會長에게 決裁 後 에 會計長이 支出 事

 第14條 原定會議時에 支出及 收納 文簿를 詳細이 修正야 議席에 供 事

 第15조 補助金은 收納을 隨야 銀行에 任置되 獨立協會條로 謄記出納 事

 第16條 計長은 印章을 另(영)造야 各項費用을 出納 時에 捺印署名 事

 第17條 幹事 大小事務를 委員의 指揮 承 야 從事 事

 第18條 幹事 各項士〔土〕木鐵石等物을 購入 時에 願賣各商工의 打筭標를 受集야 最廉者를 擇用 事

 第19條 幹事員中에 書記와 掌簿와 看役等 各差備는 會席에 議定야 塡差 或 改定 事

 第20條 會員은 補助金 送付 人員으로 定 事

 第21條 會員은 獨立協會大會에 會叅 事

      (≪大朝鮮獨立協會會報≫1호, 6∼8쪽).

 즉「독립협회 규칙」은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설사무를 관장하는 일(제 2조)”이 조직의 기본목표임을 명시적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목적수행을 위한 초창기 독립협회의 지도체계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틀로 구축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 첫째가 상층부의 지휘체계(최고 집행기관)라 할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정기적으로 여는 ‘原定會議’(후일 通常會로 명칭을 바꿈)와 필요에 따라서 임시로 여는 ‘特別會議’(후일 特別會와 臨時會로 나누어짐)를 주재하고 그러한 회의시의 議件과 대소사무 집행에 대한 안건 및 비용지출에 관한 안건 등에 대하여 결제권을 행사하는 會長, 위원의 首席으로서 유고시에는 회장의 직무를 대행하고 사무집행과 비용지출에 관한 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회장의 결제를 청구하는 委員長, 그리고 회장의 결제에 따라 각종 비용을 지출하는 會計長이 이에 해당하는 임원이었다.

 둘째는 모든 안건을 다수결에 따라서 처리하는 20명 내외의 위원들을 들 수 있다. 독립기념물 건조를 위한 工役의 계획·제도·式樣·도형·비용을 의결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도록 되어 있었던 이들의 임무중에는 위원장을 도와서 회중 대소사무를 의결하고 각종 비용을 협의하는 일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주요정책을 심의·의결하면서 동시에 간사들을 지휘하는 이중적 성격의 기관이었다.

 셋째는 위원들의 지휘를 받아서 회중의 대소사무에 직접 종사하는 역시 20명 내외의 간사원들(실무관리기관)을 들 수 있다. 이들중에서 서기, 장부(수납·지출의 文簿 정리), 看役(공사감독) 등의 임무를 맡게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공사에 필요한 각종 토목·철물·석물 등을 구입하는 일을 맡아서 수행하되, 공개입찰의 절차를 통하여 최염가로 구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이러한 지도체계와는 다른 각도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이 독립협회의 하부구조라고 할 수 있다. 앞의「輪告」에서 목표달성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 특히 강조되었던 것이 “衆力으로 幫成하는 것”이었거니와 이것이「규칙」에서는 “회원은 보조금을 송부한 인원으로 정할 것”을 규정했던 ‘無定數’의 會員制로 반영되었던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이러한 대중지향적 개방성 때문에, 보조금 납입자를 자동적으로 무조건 회원이 되게 했었던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경우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조건이 전제되었던 것임을 지나쳐보아 넘길 수 없다.

 하나는 같은「윤고」말미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보조금 납입자라 하더라도 무조건 회원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회원으로 가입할 의사가 있는지의 여부를 명시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서 회원으로 정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립협회의 창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서재필이 스스로 시범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는 창립총회 석상에서 30원의 보조금을 찬조했으면서도 미국시민권자임을 이유로 회원의 자격을 극구 사양하고 고문의 역할로 일관했기 때문에0549)鄭 喬,≪大韓季年史≫ 上(국사편찬위원회, 1957), 146쪽. 후일 독립협회의 취지에 동조하여 보조금을 냈던 다른 외국인들도 회원이 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관례로 인식하고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창립총회에서 선임된 20명의 임원진 가운데 먼저 안경수(회장 겸 회계장)와 이완용(위원장)이 지휘사령탑을 맡게되었음에 유념하고자 한다. 군부대신을 역임한 안경수는 춘생문사건의 주모자로 3년형을 언도받고 징계중에 있다가, 그리고 정동파의 일원으로 학부대신을 역임했던 이완용은 민비시해 사건 후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다가, 각기 아관파천 당일로 경무사와 외부대신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당시로서는 정치·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갑오개혁이후 근대적 화폐금융제도의 자리매김을 위한 근대화작업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던 은행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6월로 접어들면서 ‘조선은행’ 설립에 뜻을 모으고 광통교에 사무실을 마련한 다음 6월 25일부터는 발기인으로서의 업무를 추진하고 나서던 때였다. 독립협회의 발기인중에서 金宗漢과 李采淵, 그리고 한성상무회의소와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에 관여했었던 상업자본가 李根培·尹奎燮·李承業 등도 은행창립 발기인으로 동참하고0550)≪독립신문≫, 1896년 6월 27일 이후로 12월 31일까지 총 81회에 걸쳐서 실렸었던<대죠션은 챵립소 광고문>에 의하면, 조선은행 창립소 발기인은 김종한·안경수·이완용·이채연·이근배·윤규섭·이승업 7인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은행이 이듬해 정부의 인가를 받고 2월 10일 정식으로 영업을 개시하기까지는 은행창립 발기인의 구성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 김종한과 이승업은 따로 갈려나와 漢城銀行을 설립하고 2월 19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서재필의 격려와 지원이 있었음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국 김종한과 함께 은행장 물망에 올랐던 두 사람중에서 더욱 유력시되었던 안경수0551)≪漢城新報≫, 1896년 6월 24일, 잡보<朝鮮銀行之設立>참조.가 독립협회 회장 겸 회계장으로 선임되었고 그 자리에서 독립협회 모금의 수납업무를 ‘조선은행소’가 떠맡도록 결정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러한 내용들이 미리부터 긴밀하게 협의되었을 것임을 예단할 수 있겠다. 안경수는, 계속 관직에 집착했었던 이완용과는 달리, 근대 기업(會社)과 殖産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인식한 更張期 이후 다각도로 그 실천방법을 모색하는 데 진력했었던0552)그는 1895년 9월부터 제물포에 大朝鮮水産會社를, 그리고 서울에 京城株式會社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아관파천 직후 警務使에서 중추원 일등의관 자리로 옮겨가 있는 동안에는 1896년 6월부터 조선은행의 창업에 진력했다. 조선은행이 1897년 2월에 영업을 개시한 후로는 馬車會社·電燈會社·蔘圃會社 등에도 관여하는 한편,≪農務要覽≫을 편찬 간행하기도 하였다. 韓興壽,≪近代韓國民族主義硏究≫(연세대 출판부, 1977), 141∼142쪽 참조. 사실도 연관시켜서 음미해 볼 만한 일이다.

 그리고 위원으로 선임된 8명(김가진·김종한·민상호·이채연·권재형·현흥택·이상재·이근호)은 전원이 발기인들이어서, 14명의 발기인중에서는 회장과 위원장, 그리고 간사원으로 배정된 남궁억과 임원에 포함되지 않은 3명(군부대신 이윤용·외부협판 고영희·외부교섭국장 김각현)이 제외되었던 셈이다. 국장급 이상의 고급관리들(대신·협판 등 勅任官 5명, 국장급 奏任官 3명)이었던 이들 발기인들을 위원으로 집중 배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초창기 독립협회에서 심의·의결기관으로서의 중추적 역할을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한편 독립기념물 건조사업의 실무를 전담하도록 선임된 10명의 간사원들은, 남궁억을 빼고는 발기인모임(6월 7일) 이후, 특히 국왕의 재가가 있은 후에 집중적인 접촉과 협의를 거쳐 합류하기로 작정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중 남궁억 이외의 국장급으로는 工務衙門의 기술직으로 시작하여 농상공부 상공국장의 자리에 오른 宋憲斌과, 吳慶錫의 아들로 博文局 주사에서 농상공부 통신국장까지 오르게 되었던 吳世昌을 들 수 있다. 이들보다는 다소 낮지만 外衙門에서 영어를 배우고 인천항 번역관으로 출발하여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면서 학부 참서관으로 있었던 洪禹觀, 내부 技手를 거쳐 技師에 올랐던 도목수 沈宜碩, 외부 번역관보를 거쳐서 번역관이 되었던 彭翰周, 司譯院 奉事로 시작하여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던 玄濟復, 慶興군수를 지낸 鄭顯哲과 雲山군수를 지낸 李啓弼, 그리고 원산항 서기관과 외부의 電飭업무를 담당했던 朴承祖 등도 거의가 奏任官에 해당하는 중견관리들이었다. 전통적으로는 中人들이 담당했었으나 개항기의 시대변화와 더불어 새롭게 중요시되었던 통상·산업·기술 분야의 전문가로서 활약하던 인물들이었다.

 창립 당일 서재필과 발기인 전원 그리고 외부 통상국장 趙性協 등 16명이 시범적으로 510원의 보조금을 갹출하여 힘차게 출발을 장식하였던 독립협회의 창립사업은 즉각적으로 사회각계의 폭넓은 호응을 받아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나갔다. 20일도 채 안되어 100여 명 이상으로부터 적게는 20전에서 많게는 100원에 이르는 성금이 답지했다. 그 중에는 알렌 미국대리공사, 미국인 의사 커들러부인, 웨버 러시아공사 부부와 같은 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하동관립소학교 학동들과 달성교회 신도들은 푼돈을 모아 집단으로 출연하였다.0553)≪독립신문≫, 1896년 7월 4일부터 23일까지 실린 잡보의 내용을 종합한 것임. 이를 갸륵하게 여긴 왕태자는 1,000원을 하사하여0554)≪독립신문≫, 1896년 7월 21일, 잡보. 독립협회의 사업을 격려해 주었다. 그리하여 7월 20일까지의 짧은 동안에 2,200여 원이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0555)The Independent, July 23rd 1896, brief notice.

 그리고 왕태자의 하사금을 계기로 독립협회의 조직도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7월 18일(토) 오후 2시에는 탁지부 협판을 지낸 李在正을 위원으로 영입한 가운데 한성부 觀平閣에 모여 새 위원들을 확대 충원하는 문제를 협의하였고 다음날(7월 19일)에는 조선은행 누상에 모여 독립문 설계방향에 대하여 토의하였다.0556)≪독립신문≫, 1896년 7월 23일, 잡보.
≪漢城新報≫, 1896년 7월 20·24일, 잡보.
8월 1일(토)에 다시 한성부에서 열린 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결정하였다. 즉 ① 세 가지의 공사계획중 제일 먼저 독립문을 起工할 것, ② 독립문은 헐어버린 영은문의 옛터에 서울의 각 성문과 같이 돌로 포개 쌓되 17피트의 穹形 문을 내고 높이는 42피트, 깊이는 14피트, 좌우측 벽 폭은 8.5피트를 기본 골격으로 삼을 것, ③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매주 토요일에 위원들의 모임을 가질 것 등0557)≪漢城新報≫, 1896년 8월 3일,<獨立協會 委員會>참조. 실제로도 독립문의 높이와 아취 입구의 폭은 이 때의 구상대로 되었으나 깊이는 21피트로 늘어났으며 문 전체의 정면 폭은 33피트로 축조되었다(“The Independence Club,” The Korean Repository Vol. V, No. 8(August 1898), p.285).이었다. 그리하여 한달간의 집중적인 준비작업 끝에 8월 31일에는 안경수회장과 정부고관들(이윤용 군부대신, 민영기 군부협판, 이채연 농상공부협판, 권재형 법부협판)이 실무담당 간사원들과 匠工들의 수행하에 현장을 답사하여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위치와 입지조건들을 세밀하게 점검하고 공사비 예상액까지 산출하게 되었다.0558)≪독립신문≫, 1896년 9월 3일, 잡보.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된 독립문 설계작업도 당시 서울에 와서 살고 있었던 러시아의 건축기사 사바틴(Sabatin)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서재필의 책임하에서 마무리되었다.0559)“The Independence Club,” The Korean Repository Vol. V, No. 8, p.285. 결국 독립협회는 예정을 바꾸어 독립관을 사무실 겸 집회장소로 전용하기 위해서 6∼7칠백 여 원의 비용이 예상되었던 모화관 개수공사를 먼저 착수하는 한편, 9월 6일에는 별도로 총공사비 3,825원의 독립문건립 계약을 서재필과 맺고0560)鄭 喬,≪大韓季年史≫上, 146쪽. 필요한 석재를 운반해 들여오면서 9월 16일부터는 마침내 독립문 기초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0561)≪漢城新報≫, 1896년 9월 14일 및≪독립신문≫, 1896년 9월 15일, 잡보.

 이처럼 독립협회의 창립사업은 불과 두달만에 궤도에 오르게 되었지만, 8월말까지의 모금총액 3,067원0562)본고 각주 23)에 소개되는<本會補助金及會報價收入表>의 내역을 참조할 것.은 독립관 개수와 독립문 건립에 필요한 예상공사비 4,525원 보다 1,500여 원이나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9월로 접어들면서 다시금 모금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명의 임원으로 출발했던 독립협회는 10월 19일까지 4명의 위원(이재정·兪箕煥·朴箕陽·金昇圭)과 8명의 간사원(李建鎬·徐彰輔·李根永·文台源·具然韶·朴鎔奎·安寧洙·李鍾夏)을 늘려가면서 진용을 보강하는 한편, 독자적인 대중매체로서 半月刊≪大朝鮮獨立協會會報≫를 11월말부터 발행하기로 10월 19일 위원회에서 결정하게 되었다.0563)≪大朝鮮獨立協會會報≫ 1호, 10∼11쪽 참조.

 독립협회는 11월 9일 한성부에서 열린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1월 21일에 장엄하고도 성대한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초창기 독립협회 활동에 대한 일차적인 평가의 자리로서 내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식전에 참석한 사람들만도 “외국민 병야 오륙천명”0564)≪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논설.이라거나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來會者 無慮千餘人이요 圜張外而觀聽者 不知幾萬人”0565)≪大朝鮮獨立協會會報≫2호(1896년 11월 30일), 會事記, 10쪽.이라 했는가 하면 영문잡지도 “최대의 관심과 열광으로 가득했고…수천 명의 조선사람과 외국인들이 참집했다”0566)“The Independence Club,” The Korean Repository Vol. V, No. 8(August 1898), p.286.고 하였으니 그간의 독립협회 창립사업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면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는가를 짐작할만 하다. 때 마침 11월 20일에는 친러파 金鴻陸의 직계세력이었던 내부 지방국장 金重煥까지 각 지방 관찰사와 지방관에게 공문을 발송하여 독립협회의 사업을 적극 지원해 주도록 촉구했던 사실0567)≪大朝鮮獨立協會會報≫2호(1896년 12월 15일), 會事記, 11·12쪽.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公認性이 확고해진 독립협회는 1896년말에 이르면서 2,000여 명의 회원을 과시할 만큼0568)1896년의 한해를 돌이켜 보는 그 해 12월 31일의≪독립신문≫논설 내용중에 독립협회를 가리켜서 “지금은 회원이 근 이쳔명이오…”라는 표현이 있다. 대규모의 사회단체로 급성장하였고 보조금 수입도 4,716원 59전으로 늘어났으며 일년간의 결산서를 작성했던 이듬해(1897년) 8월 26일까지는 7천여 명으로부터 5,897원 19전 2리0569)≪大朝鮮獨立協會會報≫16호(1897년 7월 15일), 本會補助金及會報價收入表, 11∼12쪽. 이것은 독립협회가 1897년 8월 26일에 작성한 1년간의 결산서(수입부문)이므로, 7월 15일로 되어있는≪회보≫16호가 실제로 발간된 것은 8월 26일 이후임이 분명하다. 자료를 겸하여 내역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開國五百五年七月朔爲始獨立協會補助金收入」
銀 二千三百四十八元 七月朔入
銀 七百十九元 八月朔入
銀 三百三十四元七十錢 九月朔入
銀 二百五十八元十八錢 十月朔入
銀 六百五十七元二十一錢二厘 十一月朔入
銀 三百九十九元五十錢 十二月朔入
銀 四百三十元七十錢 六年一月朔入
銀 二百八元十錢 二月朔入
銀 一百三十七元四十錢 三月朔入
銀 八十六元 四月朔入
銀 一百六十六元八十錢 會報價入
銀 一百二十元四十錢 五月朔入
銀 七十七元七十九錢二厘 會報價入
銀 四十元九十錢 六月朔入
銀 一百二十九元六十錢 七月朔入
銀 二十七元五十錢 光武元年八月朔入
銀 一百六十六元八十錢 會報價入
   入合六千三百八원十八錢四厘 五千八百九十七元十九錢二厘補助金
                  四百十一元三十九錢二厘回報價
라는 거액의 모금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창립 당시는 모금의 최대치를 막연히 2만원까지도 기대했었던 흔적0570)≪독립신문≫, 1896년 7월 4일 논설중에 “…만일 돈이  이만원 드러 오거드면 크게 셕탑을 모흐고 셕탑에다가 일홈들을 일줄노 의론이 되엿다더라”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이 보이지만, 사업계획이 구체화되었던 그해 9월초에는 일차적인 모금목표를 5천 원 정도로 잡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5,900여 원의 모금성과는 초과달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넘기기 쉽다. 그러나 결산서 지출부문을 살펴보면,0571)≪大朝鮮獨立協會會報≫ 16호, 自開國五百五年七月至光武元年八月會中各項上下, 12∼17쪽. 당초의 목표액에는 計上되지 않았었지만 독립기념물 건조사업에 함축된 대중적 상징조작의 효과를 상승적으로 제고시켜주었던 독립문 정초식과 기원절 경축식 행사비(570원)를 비롯하여 독립관 內外部 부대시설공사 및 집기류 구입비(450원), 천연정 수리비(136원), 공원지조성 조경비(348원), 인건비(534원), 사무용품비(62원), 월동비(30원), 기타 잡비 등으로 2,200여 원이 별도로 지출되었고 회보발간에서도 300여 원 이상의 적자0572)韓興壽,<獨立協會 會報의 內容分析>(≪社會科學論集≫6, 延世大 社會科學硏究所, 1973), 23쪽 참조.를 보았다. 개수공사를 마치고 5월 23일에 현판식을 거행한 독립관의 수리비(570원)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독립문 공사비는 3,825원 중 2,300원만이 선급금으로 지출되었을 뿐인데 결산서상의 남은 돈은 604원 71전 5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독립문이 완공된 1897년말에 가서는 920여 원의 공사비 미급액을 시급하게 메꾸어야 할 일이 중대과제로 제기되었고, 이 때문에 새해 벽두에 다시금 모금운동을 펼치게 되었다.0573)≪독립신문≫, 1898년 1월 18일, 잡보 참조.

 그리하여 그것이 완전히 마무리 지어지게 되었던 것은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을 본격화하고도 상당한 시일이 경과된 뒤의 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독립협회가 1898년 2월 20일부터 정치활동을 개시했지만 4월 초순까지 44명이 103원 10전을 찬조하는 데 그쳤고,0574)≪독립신문≫, 1898년 1월 18일, 잡보에 3명이 19원, 2월 1일 잡보에 6명이 9원 50전, 그리고 4월 7일 잡보에 35명이 74원 60전이라는 보조금 출연자 명단과 금액이 기사화되어 있다. 따라서 9월 초순까지도 독립문 역비(공사비) 부족액을 충당하기 위하여 보조금 출연을 호소하는 신문광고를 계속해서 내야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0575)독립협회의 독립문 공사비 부족액에 대한 보조금 찬조를 권유하는 잡보 기사가≪독립신문≫1898년 1월 27일부터 2월 24일까지 계속되었고, 다시 4월 26일 부터 찬조금을 호소하는 정식광고가≪독립신문≫4면에 실리기 시작하여 9월 6일까지 34회나 반복되다가 그쳤다. 그러나 8월 초순까지 평양진위대에서 443명이 57원 20전을, 그리고 개인별로 31명이 54원(합계 474명 111원 20전)을 추가로 출연했던 사실로0576)≪독립신문≫, 1898년 8월 10일, 잡보<독립문 역비보조>. 미루어 본다면, 정치활동이 심화되었던 9월까지 말끔하게 해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어찌했던 독립협회의 창립사업과 연계되었던 모금운동은 모금성과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간과할 수 없겠지만 대중적인 조직기반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사실상 모금액의 60% 이상을 차지한 5원 이상의 고액헌납자들은 전체 헌납자의 4%에도 미치지 못했다. 반면에, 1원 이상 5원 미만의 헌납자가 약 11%를 차지했는가 하면 1원 미만의 소액헌납자는 85% 이상이라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체로 일괄 출연한 친위대 兵關員들과 경무청 보조원들 3,727명 이외에도 濟衆院 학도들을 비롯한 大貞洞 구세교학당·水下洞소학교·安東소학교·銅峴소학교·養賢洞소학교·관립 安洞소학교의 학원들과 교원들, 紙廛·鞋廛·笠廛·衣廛·雜穀廛·下米廛·壽進床廛·望門床廛·苧布廛·靑布廛·綿紬廛·白木廛·布廛·果實廛 등 각 시전의 상인들(都中), 達成會堂 교인들, 인천 相鳳樓 기생들, 그리고 楊口 군민들이 각기 십 전씩 또는 몇 십 전씩의 푼돈을 모아 집단적으로 헌납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강원도 양구 군민들은 한번에 180명이 74원 60전을 보내는 등 세 번에 걸쳐 150여 원을 출연0577)≪독립신문≫, 1897년 7월 22일, 잡보.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出捐한 일반 서민들과 함께 도시와 농촌을 망라한 광범한 서민 대중과 근대 지식층 소시민·소상공인·하급관원들이 새로운 개화의식층으로 급부상하면서 독립협회의 대중적 기반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이들은 시세에 영합하여 고액의 보조금을 헌납하고 위원으로 영입되기까지 하였다가 오히려 세가 불리해지자 주저없이 등을 돌리고 말았던 보수관리들과는 달리, 후일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을 활성화시키고 마지막까지 대정부 투쟁을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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