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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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2. 독립협회의 조직과 운영
  • 2) 정치활동전개기의 조직과 운영
  • (1)정치활동에서 드러난 독립협회의 정치적 역할 인식

(1)정치활동에서 드러난 독립협회의 정치적 역할 인식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은 1898년 2월 20일의 통상회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토론회를 후일로 미루고 공론의 정당성을 앞세워, 상소형식의 청원권 행사를 결의함으로써 막을 올리게 되었다. 135명의 서명을 받아 다음날 임금에게 제출한 연명상소문에서 독립협회는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으려면 自立하여 남의 나라에 의뢰하지 않고 自修하여 정치와 법률을 온 나라에 한결같이 행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정치현실을 날카롭게 분석·비판하였다. 그런 다음, “안으로는 定章(정해진 章程)을 실천하고 밖으로는 남의 나라에 의뢰함이 없게 하여 皇權을 自主하고 國權을 自立하기” 위해서는 결사적인 민중 대열을 구축하고 정치적 요구를 관철시켜야 할 당위성이 있음을 천명하였다.0601)≪高宗實錄≫권 37, 광무 2년 2월 22일, 獨立協會上疏文(疏首安駉壽) 참조. 이 상소는 아관파천 이후로 외국인 고문관과 군사교련관에 대한 인사권을 확보하여 국가의 재정권과 군사권을 사실상 장악해 왔으며 임금의 환어와 황제 호칭 및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도 이러한 장악적 지배를 계속해서 굳혀나가려고 혈안이 되었던 러시아세력과 이에 영합한 봉건관리들을 민중의 단합된 힘으로 물리치고 자주독립의 기틀을 세우려는 데 주안점이 있었다. 결국 이 상소를 계기로 독립협회는 정치적 실천운동의 활동방향으로 내리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초기의 개화운동은 물론,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독립협회의 활동도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계몽주의에 가해지는 비판적 시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일반적 속성과 결부시켜서 제기되었던 비판론 가운데서 특히 한국의 계몽주의가 普遍的인 文化主義에 치중했던 나머지 脫政治化에 흘러서 정치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하고 그것을 외면하여 버렸다는 논거는 적어도 독립협회에 대해서만은 곧이곧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開明進步라는 방향설정하에서 독립의 상징을 매개로 하여 창립사업과 신문·잡지에 의존했던 초창기의 민중계몽운동은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그러한 대중의 집단적 결속을 강화시키고 민주적 정치훈련을 떠맡는 주간토론회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토론회에 의한 정치교육은 마침내 민중세력이 전면으로 부상하는 집단적인 정치활동을 필연적으로 따르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협회의 활동을 상설화하고 지속시켜 주는 제도적 장치로 등장한 통상회가 처음에는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모여 유익한 講談을 펴기도 하고 이어서 본격적으로 격식을 갖춘 토론회 활동에 전념하다가 구국상소가 정치활동의 신호가 된 뒤로는 차츰 公論을 정치적으로 매개시키는 활동과 토론회를 병행하게 되었다. 물론 뒤에 가서는 토론회 마저 중단시킨 채 정치활동만을 주재하는 모체가 되기에 이르렀다. 독립협회가 당분간 토론회를 중단하고 정치활동에 주력하기로 공식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8월 14일의 통상회 석상에서의 일이었다.0602)≪독립신문≫, 1898년 8월 20일, 잡보. 토요일인 이날의 기사를 보면, “(통샹회)독립 협회 회원들이 도라간 일요일에 의론고 문졔내여 토론는 것은 다른 무가 만 고로 잠시 권도로 뎡지고 다 통샹회 독립관에셔  일요일이면 의례히 기로 작뎡 엿스니 본회 회원들은 연고 잇다 칭탁 말고 다 와셔 참례를 시며 방쳥실 이들도 젼과 치 만히 와셔 드르시요”라고 되어 있다. 4주간이나 계속해서 토론회를 개최하지 못할 정도로 긴박했던 정치문제에 대응하여 대책을 협의하고 공론을 결정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는 상황인식에서 취해진 조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청원권 행사의 결의로 정치활동을 개시하게 된 사실을 들어서 “처음으로 대한에 독립협회가 생겨 거기서 회원들이 혈심으로 맹서하고 위국위민하자는 목적으로 의논하여 공론을 만드니 이런 경축할 일은 大韓史記에나 漢唐사기에도 없는 일이라”0603)≪독립신문≫, 1898년 2월 24일, 논설.고 스스로 신기원의 公論機關임을 자임하고 나섰던 사실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독립협회는 윤치호의 동의로 구국상소를 결의할 당시의 나라되어 가는 형편을 그 동안 줄기차게 역설해왔던 자주독립의 공고화와는 역행하는, 따라서 “황상폐하께서 위국위민하는 신자가 없는 고로 자주독립 권리를 날마다 잃어가는” 상황0604)≪독립신문≫, 1898년 2월 22일, 잡보.으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관인들이 國事를 그르치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로서 공론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처럼 독립협회가 스스로 다짐했던 공론기관으로서의 자의식은 그 앞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제되었던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라마다 공론을 가지고  …인민들이 모히 쳐쇼가 잇서 여럿이 규칙잇게 모혀 졍뎨게 만를 토론야 좌우편 이약이를 다 드른 뒤에 쟉뎡 의론이 공론이라 이런 공론 인민들이 잇슬 것 면 졍부에셔 일 기도 쉽고   일을 그릇칠 리가 업지라 …대한 관인글이 국를…그릇치 일이 만히 잇 것은 공론을 몰으고 다  두 사의 말 듯고  고로 랑를 만히 보고  규칙이 업시 의론을 거드면 공변된 말을 드를 슈가 업 고로 나라마다 각 회가 잇서 회에셔 규칙잇게 의론야 쟉뎡 일은 대개 공변될 밧긔 슈가 업고 여럿이 의론야 쟉뎡 일은  사이나 두 사의 쇼견으로 쟉뎡 것 보다 랑셩이 업슬 터일라(≪독립신문≫, 1898년 2월 24일,<독립협회 회원들의 상소>).

 독립협회는 민주적인 의사진행 규칙에 따라 찬반토론을 반드시 거친 후에 다수결로 결정된 집단의사를 공론으로 보았기 때문에, 민주적인 토론절차로서의 公議와 공의를 거쳐서 얻어진 다수의사로서의 공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한두 사람의 의견은 독선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낭패할 가능성이 많은 반면에, 공론은 공변되어 낭패성이 없다는 공리적인 입론에 바탕하여 그것이 정당하게 정치에 반영되어야 할 당위성을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공론을 결정하는 회의를 열 때마다 관심을 가진 사회일반에 회의참관을 공개하고 신문과 가두연설을 통하여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군중대회의 성격을 지닌 ‘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통상회나 특별회 또는 임시회에서 결정된 공론을 전국민을 표징하는 ‘만민’의 이름으로 지지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재확인시켜 주는 절차를 밟기도 하였다.

 우리가 흔히 역사적으로 독립협회와 연관시켜서 민중역량의 지평을 다져준 본보기로 거론하는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11월초에 강제 해산되었을 때 독립협회에 의하여 수행되던 역할을 떠맡고 나서서 정부의 탄압에 맞서 투쟁하면서 독립협회의 복설운동을 펴나갔던 존재로서만 한정시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을 펴기 시작한 직후부터 등장하였다. 그리고 긴급한 정치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다중의 시정인들이 운집하기 쉬운 장소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연설을 베푼 다음 독립협회의 대정부활동에 공동보조를 취하는 결의문을 독자적으로 채택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책을 강구함으로써 외곽에서 별도로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을 지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지나쳐보아 넘길 수 없다. 3월 10일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서재필의 밀청0605)鄭 喬,≪大韓季年史≫上, 182쪽.에 의하여 탁지부 고문관과 군부 교련관으로 있던 러시아인들을 해임시켜 돌려보내려는 목적으로 종로에서 열렸으며 회장으로 뽑힌 미전의 현덕호 이외에는 연설에 나섰던 玄公廉·洪正厚·李承晩·趙漢禹·文耿鎬와 총대위원으로 뽑힌 이승만·張鵬·현공렴 등0606)≪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 잡보. 여섯 사람 모두가 서재필의 지도로 성장한 협성회출신 독립협회 회원들이었다. 또한 서재필에 대한 정부의 추방공작이 본격화되었던 4월 30일에 독립협회 회원들이 서재필의 재류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숭례문안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0607)鄭 喬,≪大韓季年史≫上, 188쪽.했었던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독립협회는 여론을 조직화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매개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명분상의 專制君權에 대한 사실상의 民權的 제약을 가함으로써 정당이 존재하지 않았던 정치제도의 테두리 밖에서 스스로의 정치활동에 사실상의 정당기능을 원용하였던 것이다. 독립협회가 결성되고 50여 일이 지난 뒤,≪독립신문≫은 논설을 통하여 그해의 역사기록에서 정부에 두 개의 당이 생긴 것을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당시 한국에서 상정할 수 있는 정당의 이념형으로서 ‘완고당’(the Conservative party)과 ‘개혁당’(the Progressive party)을 차별화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꼬집어 밝히지는 않았지만 독립협회의 출범에서 개혁당으로서의 역할 대행을 연상하도록0608)The Independent, August 25 1896, Editorial;≪독립신문≫, 1896년 8월 25일·27일·29일 연속 논설.≪독립신문≫의 한글 논설에서는 甲당과 乙당을 대비시키면서 때로는 갑당을 ‘완고당’으로 표현한 반면에, 을당에 대해서는 영문 논설에서와 같은 구체적 표현을 피하고 있다. 암시하였다.

 그리고 정치활동의 개시와 더불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죠지 워싱톤의 野黨육성의 치적을 찬양하고 야당의 당연한 존재이유를 강조하면서0609)≪독립신문≫, 1898년 2월 22일, 논설. 근대정당정치 일반론에 기초하여 집권세력의 자의적 국정운영을 견제하는 ‘反對黨’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의 정치적 위상으로 전위시키려는 자의식을 표출시켰다. 물론 독립협회가 명시적으로 스스로를 정당으로 자처한 일은 없다. 그러나 갑오개혁이전의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집권세력을 완고당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에 대한 비판·공격·반대·규탄·탄핵에 주력했던 정치활동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주지시켰던 반대당의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던 것이다.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을 때도,≪독립신문≫은 즉각적으로<반대의 공력>이라는 논설을 싣고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사마다 셩인이 아니니 누가 허물이 업스며 졍부 관인들도 역시 사이라 엇지 진션 진미기를 리요 그런 고로 어느 나라 긔를 보던지 졍부가 항샹 다 잘야 국부 병강 것이 아니라 셩들이 항샹 졍부에셔  일을 쥬목야 죠곰이라도 잘못되 일이 잇스면 곧 불평 의론이 불등야 졍부로 야금 잠시라도 방심고 글은 일을 못게 나니 화 나라일쇼록 시비 공론이 만코 시비가 만흘쇼록 화가 졈졈 잘 되난니…

졍치에도 반당이 잇서셔 대쇼를 피고 시비여야 점점 졍치가 발너 가니 반의 공력이 이와 지라 대한 셩들도 이 리치를 다라셔 졍부에셔 는 일을 각별히 쥬의 야 어느 던지 잘못 일이 잇스면 리지 말고 시비며 반야 졍부로 야금 방심 폐단이 업게 지어다(≪독립신문≫, 1898년 11월 7일, 논설).

 다시 말해서, 정부의 관인들도 사람인 이상 허물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인들이 하는 정부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백성이 비판여론(시비하는 공론)을 일으켜서 정부가 방심하거나 일을 그르치지 못하도록 경계하게 만드는 데서 정부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행위의 공익성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인 전제하에서 그때까지 독립협회가 감당해 왔던 정치적 역할, 즉 군주의 절대권을 견제하기0610)T.H. Yun, “Popular Movement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Vol. V, No. 12(December 1898), p.465. 위해서 주저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시비하고 반대하여 정부의 방심하는 폐단을 막아주려고 진력했던 반대당으로서의 역할이 지극히 정당하고도 긴요한 것이었음을 거듭 강변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을 통해서 선명하게 들어냈던 것은 투철한 국민대표의식이었다. 독립협회는 정부측의 거부반응을 무릅쓰고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던 당위성의 근거로서 스스로 자임했던 公論機關으로서의 명분뿐만 아니라 ‘백성의 의논(민의)’을 담당하고 ‘민권’을 수호해야 할 ‘公認機關’으로서의 존재이유를 내세웠다.0611)독립협회는 “大皇帝陛下께서 認可하시고 皇太子殿下께서 懸板을 친히 써서 내리신 獨立協會”라는 데 근거하여 스스로 公認機關임을 주장했다.
≪高宗實錄≫권 37, 광무 2년 10월 23일, 독립협회상소문 참조.
이러한 공인기관으로서의 자기 주장은 스스로 “전국 인민을 대표하는 회”0612)≪매일신문≫, 1898년 7월 1일, 잡보.라든지, “대한 전국 2천만 동포인민을 대표하는 독립협회”0613)≪독립신문≫, 1898년 10월 25일 및 10월 27일, 논설<독립협회소>참조.라는 투철한 국민대표의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대표의식에 근거하여 국민의 절박한 요구를 정부로 이어주는 通路로서, 나아가서는 국민의 참정기회를 열어주는 통로로서 정치적 매개기능을 떠맡아야 할 당위성과 명분을 구축하게 되었다. 독립협회가 8월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현안문제에 관여하기 위하여 정부와의 협의와 공동타결의 필요성을 정부측에 제기하게0614)≪독립신문≫, 1898년 8월 8일, 논설. 되었던 것도 ‘전국 인민을 대표하는’ 정치적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중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독립협회의 제의에 따라 두 차례나 官民연석회의를 개최한 바 있고 특히 정부와 사회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된 잠정적인 국정협의체로서 官民共同會를 개최하고 國民發案의 성격을 지닌 獻議 六條를 마련하여 입법화를 추진하게 되었던 것은 독립협회가 투철하게 體現했던 인민대표의식의 주목할 만한 성과로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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