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3. 독립협회의 기본사상
  • 3) 자강개혁의 근대화사상
  • (1) 입헌정체론

(1) 입헌정체론

 독립협회는 정치면에 있어서 조선의 전통적인 전제군주제를 근대적인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민주주의 정치론을 폈던 독립협회 회원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체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신문 논설을 통하여, 동양적 전제정치는 정부가 국가의 권리를 독단하고 민권을 유린하여, 국가 유사시에 인민의 협력을 얻을 수 없게 되어 국가를 빈번히 쇠망케 한다고 하여 전제군주제를 부정하였다.0753)≪독립신문≫, 1898년 12월 15일,<민권론>. 그리고 그들은 국가란 국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국가의 자주·자강도 결국 국민의 힘에 의하여 달성되는 것이라 믿고, 인권·민권이 보장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추구하였다.0754)≪독립신문≫, 1897년 3월 9일, 논설 및 1898년 7월 15일,<독립하는 상책>.

 독립협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서재필과 윤치호는 원래 미국식 민주주의 정치를 선호하는 인물들이었다. 윤치호는 일찍이 미국 유학시절에, 세계에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로부터 조선의 지독한 독재정치에 이르는 여러 형태의 정치체제가 있다고 전제하고, “어느 누구도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결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장 좋은 정부형태임을 부인치 않을 것이다”고 하여, 미국식 정치체제 곧 공화정체가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생각하였다.0755)尹致昊,≪尹致昊日記≫3, 1893년 9월 23일. 1898년 10월 28일 관인과 인민의 국정개혁 협의를 위하여 마련한 관민공동회 첫날에,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의도에서, 오늘은 “민주주의와 공화정치에 대한 주장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언명한 사실은, 독립협회의 급진소장파가 공화제를 선망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0756)The Independent, November 1, 1898, An Assembly of All Castes.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은, 인민의 권리로 나라가 된다고 하지만 3천 년 이래로 정부에 빼앗겼던 민권을 일시에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창졸간에 백성의 권리를 모두 주어 나라 일을 하라 할 것도 아니오, 官民이 합심하여 정부와 백성의 권리가 相半된 후에야 대한이 만억 년 부강할 줄로 아노라(≪독립신문≫, 1898년 12월 15일,<민권론>).

 즉, 관·민의 권리가 조화를 이루는 관민공치·군민공치의 정치체제 곧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탈리아에서 전제정치를 폐하고 입헌정치를 행하여, 인민에게 자유권을 주었기에 이탈리아가 통일하였는지라”0757)≪독립신문≫, 1898년 12월 7일,<정치가론>.고 하여 입헌군주제 옹호론을 폈다. 윤치호도 회고담에서, 당시 “협회의 주장은 중추원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입헌정치를 하자는 것”이었다0758)尹致昊,<獨立協會의 活動>(≪東光≫ 26, 1931년 10월호), 36쪽.고 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지향을 확인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입헌군주제에 대한 선호 의식은 이미 개화 초기부터 나타났다.≪漢城旬報≫는 입헌정체에는 君民同治와 合衆共和가 있는데, 조선에는 군민동치의 입헌정체 곧 입헌군주제가 바람직하다는 논조를 보였다.0759)姜在彦, 앞의 글, 93쪽 참조. 박영효는 상소에서, 우리 나라에도 과거에 정부와 府縣이 각각 民望에 의해 선발된 山林·座首와 국사를 협의했던 君民共治의 풍습이 있다0760)<朴泳孝上疏文> 중 正政治使民國有定條 참조.고 하여, 우리의 전통과 연결하여 군민공치정체 곧 입헌군주제를 건의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정부가 개혁요강에 “대신과 참찬은 매일 閤門 안의 議政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논의 결정하여 집행할 것”0761)金玉均,≪甲申日錄≫, 149쪽.이라 규정했고, 박영효가 상소에서 “국왕의 萬機親裁를 중지하고 각 각료에게 이를 위임할 것”0762)<朴泳孝上疏文> 중 正政治使民國有定條 참조.을 건의했듯이, 갑신정변 주도자들은 군주전제정치를 내각중심정치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갑오개혁의 이론가인 유길준은≪西遊見聞≫에서, 군민공치정체는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인민의 진취적 기상을 발양하여, 국가를 부강케 하는 最美의 정체라 하고, 그 중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간주하였다.0763)兪吉濬,<政府의 種類>≪西遊見聞≫, 145쪽 및 148∼151쪽. 그리고 갑오개혁 당시에는 내각제도와 근대적 관료제도가 도입되고 왕실과 국왕의 권한이 크게 축소되어 내각중심의 입헌군주제적 정치가 실시되었다.0764)柳永益,≪甲午更張硏究≫(일조각, 1990), 158쪽. 갑오개혁 추진자들은 제1차 개혁에서는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회(議事部)로 만들고자 하였고, 제2차 개혁에서는 중추원을 명실상부한 官選立法部로 개편코자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협회의 입헌정체론이 전개된 것이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법률이란 국민의 권리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근본이므로 준수되어야 하고, 법령은 일종의 헌법인 홍범을 준행해야 한다고 하여 입헌주의·입헌정치를 주장하였다.0765)柳永烈, 앞의 글(1973), 65∼66쪽. 그들은 입헌정체의 요체인 의회에 대해서는, 선진 국가의 선례에 따라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회를 설립하여 입헌대의정치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준수할 것을 강조한 新法과 헌법으로 간주한 홍범은 근대적인 법률과 헌법으로서 그 내용이 극히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법과 홍범은 어느 정도 인권 보장과 군주권 제약 및 법치주의 등 근대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시행만 되면 최소한의 민권 보장과 정치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적 성격을 지닌 홍범과 신법을 시행하여 아직도 적용되고 있던 反입헌주의적인 구법을 청산시키고 근대적 법률의 지배를 실현코자 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의회로 간주한 중추원은 관선 절반, 민선 절반으로 구성되고 민선은 독립협회 會衆에서 실시토록 하여, 그 구성 형식에 있어 국민 대표성이 극히 미흡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립협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단체로 공인되어 있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의 중추원 설립도 근대국가의 의회적 기능을 가진 국민의 대표기관을 목표로 구상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입헌정체론은 사실상 전통적 군주국가를 근대적 국민국가로의 변혁을 추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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