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3. 독립협회의 기본사상
  • 3) 자강개혁의 근대화사상
  • (4) 근대문화론

(4) 근대문화론

 독립협회는 문화면에서는 조선시대의 형식적인 인문중심의 문화형태를 실용위주의 근대적 문화형태로 전환시키려 하였다.

 문호개방 이후 서양의 근대문화를 접하게 된 조선정부는 서구문화의 섭취를 위한 근대교육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개화·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민간인들도 근대교육운동을 폭넓게 추진하였다. 한편 조선에 진출한 기독교 선교단체들도 근대학교를 세웠다.0797)姜萬吉,≪고쳐 쓴 한국근대사≫(창작과 비평사, 1994), 287쪽. 조선의 근대교육은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함경도 德源 주민들은 개화파 인사들의 권유에 의하여 元山學舍를 세웠고, 정부는 同文學이라는 영어강습소를 세웠으며, 育英公院을 세워 상류층 자제들에게 근대학문을 교육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세웠다. 1890년대에는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적 교육제도가 마련되고, “국가의 부강은 국민의 교육에 있다”는 敎育立國詔書가 반포되어,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가 세워지면서 근대교육이 본격화되었다.

 첫째로 독립협회는 자강개혁의 근대화를 이루는 데 있어 국민에 대한 근대지식과 근대교육의 보급을 제1차적인 사업으로 제시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독립과 자강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을 普施하여 인민이 실학실업을 연구케”하는 것0798)≪大朝鮮獨立協會會報≫4, 1897년 1월 15일,<北米合衆國의 獨立史를 閱하다가 我大朝鮮國獨立을 論함이라>.이라 하여, 제1회 토론회 주제도 “조선에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임”으로 정하였으며, 정부도 “돈을 들여 첫째 학교를 설시하고, 둘째 각양 제조소를 설립할 것”0799)≪독립신문≫, 1897년 8월 29일, 논설.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입헌정체를 마련하여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도, 근대산업을 개발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에도, 자유민권을 확립하여 시민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그리고 국민에 의한 전반적인 자강개혁을 추진하는 데에도 국민의 근대지식이 필수 불가결의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0800)愼鏞廈, 앞의 책, 644쪽.

 둘째로 독립협회는 우선적으로 어린이 교육과 여성교육을 강조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어릴 때의 교육이 가장 효과가 있으며, “전국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 놓으면 전국 인구가 다 교육될 터”이라 하여, 어린이 교육과 소학교 설립을 가장 시급한 것으로 생각했고, “어머니의 지식과 학문 유무가 자녀의 교육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이며, 지식 있는 부인이 진정한 내조자가 된다고 하여, 남성교육과 똑같이 여성교육과 여학교설립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0801)≪독립신문≫, 1898년 9월 13일,<여인교육>. 이것은 양반중심·남성중심의 전통교육에서 남녀를 포함한 전국민에 대한 보통교육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들은 소학교와 여학교가 어느 정도 전국적으로 설립된 다음에는, 외국의 제도를 참작하여 중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해야 할 것이며,0802)≪大朝鮮獨立協會會報≫14, 1897년 6월 15일,<興新學說>.
≪독립신문≫, 1897년 7월 6일, 논설.
실업학교와 전문학교, 특히 공업기술학교의 설립과 농업학교의 설립이 시급한 것으로 생각하였다.0803)尹致昊,≪尹致昊日記≫ 5, 1897년 2월 7일 및 8월 5일.

 셋째로 독립협회가 강조한 근대교육의 내용은 ‘실상학문’ 또는 ‘실학’이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구지식은 경서·사서·시문·譜學·理氣哲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虛學’에 불과하며, 신지식은 ‘利用厚生 富國强兵 實事求是’를 내용으로 하는 ‘실학’이라고 주장하였다.0804)≪독립신문≫, 1897년 8월 17일,<윤치호 연설> 및 1898년 3월 8일, 논설.
≪大朝鮮獨立協會會報≫1, 1896년 11월 30일,<獨立協會序>.
그리고 그들은 서양 각국은 실학을 숭상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한국은 허학만 숭상하여 빈약한 나라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정부에서 “허학을 없애고 실학을 숭상하여 인민의 공업을 흥황케 가르치는 것이 제일 방책”이라고 주장하였다0805)≪독립신문≫, 1898년 6월 14일, 논설. 이처럼 독립협회 회원들은 서양의 학문과 지식 곧 실상학문을 하여야 근대적인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실상학문·근대교육으로 강조한 교과목은 정치학·경제학·법률학·兵學·의학·理財學·商務學·농학·산림학·공학·기계학·格致學·수학·화학·생물학·천문학·지리학·역사학(세계사, 국사)·국어학·외국어학·체육 등이었다.0806)愼鏞廈, 앞의 책, 226쪽. 여기에는 근대산업 발달과 관계되는 실업계통의 과목, 과학기술의 발달과 관계되는 이공계통의 과목, 그리고 근대국가의 경영과 관계되는 사회과학 계통의 과목이 망라되어 있고, 민족문화나 민족정신과 관계되는 한국학 계통의 과목도 포함되어 있다.

 넷째로 독립협회 회원들은 국가의 자강독립을 위해서는 ‘세계와 時勢’를 알고 ‘자기’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외국 학문’과 더불어 ‘조선의 일을 공부’해야 한다고 하여, 국사와 국어의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0807)≪독립신문≫, 1896년 5월 30일, 논설. 그들은 역사란 “옛적 것만 史記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저께 것도 사기요 아까 것도 사기라”하고, “자기 나라 사기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 사기를 공부하여” 과거 일과 현재 일을 알고 미래 일을 전망하는 데에 역사 공부의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0808)≪독립신문≫, 1898년 4월 2일, 논설. 이처럼 독립협회 회원들은 세계사적 관련속에서 국사를 연구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남의 나라의 사기도 알려니와 자기 나라 사기를 먼저 알아” 조국의 흥쇠를 파악하여 교훈으로 삼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고 하여,0809)≪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 논설. 국사의 연구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가지고 국가의 현실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독립협회 회원들은 종래 ‘諺文’으로 천시되던 한글을 ‘국문’이라 칭하고, 근대적인 문법체계 면에서 볼 때 “조선 글자가 세계에서 제일 좋고 학문이 있는 글자”라고 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고,0810)≪독립신문≫, 1897년 4월 22일,<주상호씨 국문론>. 국문법을 연구 정리했으며, 한글 띄어쓰기를 시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문은 어려워 지식을 특수 계층에 독점케 하고, 한글은 쉬워서 모든 국민이 학문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이유를 들어 ‘국문전용’을 주장했고, 독립신문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0811)≪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논설 및 1897년 8월 5일, 논설.

 이처럼 독립협회는 세계 각국의 실용적인 근대문화를 수용하여 국가의 자강을 실현하고, 우리의 역사·언어·문화를 합리적으로 발전시켜, 중국중심의 한자문화권에서 탈피하여 세계문화권 속에 새로운 한국문화권을 정립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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