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3. 독립협회의 기본사상
  • 3) 자강개혁의 근대화사상
  • (5) 자주국방론

(5) 자주국방론

 독립협회는 군사면에서는 종래의 치안유지체제를 자주국방체제로 전환하려 하였다.

 일본의 무력에 의한 문호개방 이래로 조선의 뜻 있는 개화인사들은 외세의 침략에 위기감을 가지고 국방력 강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김옥균은 1886년의 상소를 통하여, 청국과 일본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 하고, 근대적 정치개혁과 부국강병을 통하여 열강의 침략을 방지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0812)姜在彦, 앞의 책, 108쪽. 박영효도 1888년의 상소를 통하여, 당시 국제사회를 약육강식의 사회로 파악하고, 兵學校의 설치, 군제의 통일, 水軍의 중흥, 무기의 제조, 수만 명의 양병 등 10개항의 국방대책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0813)<朴泳孝上疏文>중 宇內之形勢條 및 治武備保民護國條 참조. 또한 갑오개혁 추진자들은 근대적인 상비군을 양성 유지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였다.0814)柳永益, 앞의 책, 212∼214쪽.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협회의 자주국방론이 제기되었다.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독립은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균형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으며, 조선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군사력의 급속한 증강보다 자주적이고 중립적인 선린외교가 중요하다는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0815)≪독립신문≫, 1896년 12월 19일, 논설 및 1897년 5월 25일, 논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은, 시베리아철도를 부설하여 남하하는 러시아와 군비확장에 부심하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충돌할 위험을 경계하고, 조선이 군사적 자위체제를 갖출 필요성이 있음을 논했으며,0816)尹致昊,≪尹致昊日記≫ 5, 1897년 8월 17일.
≪皇城新聞≫, 1898년 11월 25일,<俄國强兵會論>.
≪독립신문≫, 1897년 1월 14일, 논설.
근대 영국과 독일 등 열강의 선례를 들어 상업과 공업 발전의 토대 위에서 ‘武力’ 양성의 중요성을 논하였다.0817)≪大朝鮮獨立協會會報≫7, 1897년 2월 28일,<敎育의 急務>. 사실상 독립협회가 구상한 자주독립의 본질적인 방법은, 한반도에서 열강의 세력균형이 유지되는 동안에 개화·자강을 실현하여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립하고,0818)愼鏞廈, 앞의 글, 160∼161쪽. 병력과 군비를 충실히 갖추어 외적의 침략을 예방해야 한다는 ‘군사적 자강독립론’이었다.0819)≪독립신문≫, 1897년 8월 12일, 논설.

 첫째로 독립협회는 군대는 ‘국민의 군대’라는 근대적 국민군대관을 가졌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국민은 국가의 근본이고 통치권의 근거이며 국가의 주인이라 하고, 결국 국가는 국민의 국가라는 ‘국민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0820)柳永烈,<獨立協會의 性格>(≪한국사연구≫ 73, 1991), 68쪽. 그리고 그들은 군사는 본질적으로 국왕을 위한 국왕의 군대가 아니고,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라고 주장하였다.

군사라 하는 것은…정부보다도 백성을 위하여 만든 것이라, …군사의 직 무는 백성을 위하려니까 님군께 충신들이 되어야 할 터이오(≪독립신문≫, 1896년 7월 9일, 논설).

 이와 같은 새로운 국민국가관과 국민군대관에 의하여, 독립협회는 왕조체제의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고, 국민국가의 방위를 위한 근대적 국방체제를 제창하였다.

 둘째로 독립협회는 해군의 창설에 의한 강력한 국방체제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국토의 3면이 바다이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조국방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그 후 조선의 수군은 유명무실하였다. 박영효는 국방 대책으로 수군의 재건을 강조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인민의 재산이 부요하고 해육군이 강해야 조선사람들이 타국인과 동등하게 된다”고 하고,0821)≪독립신문≫, 1897년 2월 27일, 논설. “해육군을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822)≪독립신문≫, 1897년 6월 1일, 논설. 이것은 근대적 해군을 창설하여, 국방의 기본체제를 육군 단일체제에서 육해군 竝立體制로 전환하려는 의도이며, 종래 민란 대비를 위주로 하는 왕조국가의 치안유지체제에서 외국침략 대비를 위주로 하는 국민국가의 자주국방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로 독립협회는 군비의 강화와 병력의 확충에 의한 강력한 국방체제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외적보다 나은 신식무기와 군사장비를 갖추어야 외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방치 상태에 있는 機器局을 강화하고, 機器廠을 보수 확장하여 군비를 충실하게 갖출 것을 주장하였다.0823)≪독립신문≫, 1897년 8월 12일, 논설.
愼鏞廈, 앞의 책, 241쪽 참조.
한편 당시 조선의 군대는 친위대와 지방대로 편성되었는데, 군대의 수적인 면만 보아도 대외적 방위체제가 너무 취약하였다. 그러므로 독립협회 회원들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병력을 증가시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824)≪독립신문≫, 1897년 5월 11일,<시무론>.

 넷째로 독립협회는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자주적 군사훈련에 의한 강력한 국방체제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강한 군대는 그 수에 있지 않고 그 교육에 있으며, 군사교육에 있어 병술교육 뿐만 아니라, 忠義·기율 등 정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0825)≪독립신문≫, 1896년 7월 9일, 논설.
≪大朝鮮獨立協會會報≫13, 1897년 5월 31일,<獨立論>.
그들은 당시 조선정부가 군사훈련을 위해 러시아 교관을 고빙하는 데 대하여, 조선을 위한 정신교육뿐만 아니라, 외국어 구령에 의한 병술교육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군사 조련하는 일보다 군사 조련할 사관을 가르치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고, 무관학교의 설립을 주장하였다.0826)≪독립신문≫, 1897년 9월 21일, 논설. 그들은 무관학교를 세워 장교를 양성하여, 조선의 장교가 조선의 구령으로 군사교육을 실시해야 조선정신을 가진 강력한 군대를 양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독립협회는 국내의 치안유지에 급급하던 전통적 왕조군대를 대외적 국토방위에 주력하는 근대적 국민군대로 개편하여 자주국방체제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요컨대 독립협회의 기본사상은 자주국권사상·자유민권사상·자강개혁사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협회의 자주국권사상은 국가의 평등과 자주 및 국가주권을 확립하여 외세의 침탈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대외적인 민족주의사상이었으며, 나아가 민주국민을 육성하여 민주적 국민의 힘으로 자주국권을 확립하려 한 점에서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포괄하는 근대 민족주의사상이었다.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은 국민의 평등과 자유 및 국민주권을 확립하여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국권을 수호하며, 나아가 근대의회정치를 구현하여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주주의사상이었다. 독립협회의 자강개혁사상은 열강의 근대적 침탈체제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지배층의 봉건적 압제체제로부터 민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국정 전 분야에 걸쳐 선진 열강과 동일한 근대체제를 갖추려는 근대화사상이었다. 독립협회의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사상은 유기적인 하나의 사상체계로 형성되어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계몽사상으로 계승되었다.

<柳永烈>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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