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1. 독립의식의 계발
  • 3) 강연회·토론회 개최

3) 강연회·토론회 개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창설한 목적이 정치집단을 통한 자유와 민주주의 사상을 대중화하려는 데 있었다.0868)金道泰, 앞의 책, 247∼248쪽. 이러한 동기와 목적은 독립협회가 창설된 이후 전개되는 활동의 방향과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협회는 이러한 설립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반대중의 정치의식을 계발하는 활동을 펴 나가기 시작했다.

 협회의 주요한 활동은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강연은 주로 서재필이 담당했다. 서재필의 강연 중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발췌한 ‘인간의 권리와 의무’, ‘정부의 기원과 본질’ 등과 같은 것이었다. 이 외에도 민주주의적 평등사상을 고취하는 강연내용으로서는 제퍼슨(T. Jefferson)·로크(J. Locke)·루소(J. J. Rousseau)·몽테스키외(C. de S. Montesquieu) 등과 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시민권에 대한 자각의 씨를 한국 땅에 뿌려 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이와 같은 그의 강연은 민주주의의 기본사상을 주로 소개하고 계몽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외국인과 비슷한 억양과 박력이 우리말을 통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서구적 사상을 풍겨 주는 그의 연설은 수많은 청중을 감동시켰다고 한다.0869)尹炳奭,<독립협회의 활동>(≪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73), 190쪽.
James S. Gale, The Vanguard:a tale of korea(New York:Fleming H. Levell Co., 1904), p.224.

 서재필은 아펜젤러목사의 요청을 받고 배재학당에 가서 학생들에게 특별 연속 강의를 하였다. 그 첫 번째 강의는 1896년 5월에 있었고 매주 목요일 열렸다. 강의를 시작한 지 약 반년이 지나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토론회를 열게 하였다. 처음 서재필의 제의에 호응하고 나선 사람은 13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協成會를 조직하여 1896년 11월 30일 첫 모임을 열었다. 협성회는 매주 열려 1898년 3월 중순까지 42회를 열었다. 토론의 제목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택하였다.

 협성회 회원들은≪협성회회보≫라는 회보를 주간으로 간행하기로 하여 1898년 1월 1일자로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더 나아가 얼마 후 주간의 회보를 일간신문으로 발전시켜 간행하는 데 이르렀다. 일간신문의 제호를≪매일신문≫이라 하고 4월 9일에 창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서재필과 윤치호 등 독립협회 지도부는 독립협회 주최 개국기념식에서의 연설, 독립문 정초식에서의 연설, 독립협회 토론회에서의 연설, 만민공동회에서의 연설, 기독교인 주최 高宗 誕日祝賀會에서의 연설, 대한제국 경축연회에서의 연설, 배제학당 토론회의 지도, 정동예배당 청년회의 토론회 지도, 京城學堂 光武協會에서의 연설 등 각종 집회에서의 연설과 토론회 지도를 통하여 민중계몽에 힘쓰고 민중운동의 요원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0870)柳永烈,<독립협회의 성격>(≪한국사연구≫73, 1991), 55쪽.

 이같이 독립협회의 강연회는 민주주의의 기본사상을 일깨워 주고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장시켜 주었다.

 독립협회의 주요한 활동으로서 강연회와 함께 토론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이 실현되기에 이르자 그 사업을 어떻게 확대하며, 독립협회를 어떠한 성격의 협회로 끌고 갈 것인가를 논의하였던 것 같다. 독립협회는 독립관 보수가 끝나자, 1897년 5월 23일 현판식을 갖고 이후 이 독립관을 집회장소로 하여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견문을 넓히고 학문에 도움되는 주제로 강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 토론회나 강연회를 하기보다는 閑談이 전개되는 일이 많았다.0871)愼鏞廈, 앞의 책(1976), 261∼262쪽.

 이러한 독립협회의 성격을 계몽운동 단체로 변화시켜 간 것은 윤치호였다. 윤치호는 8월 5일 서재필을 방문하여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변모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서재필은 윤치호의 구상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8월 8일 독립협회의 정기적 모임인 通常會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회원들에 대하여 독립협회를 좀더 유용한 기구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날의 회의에서 회원들은 일종의 토론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규칙을 작성할 규칙 기초위원으로 權在衡·윤치호·朴世煥을 선출하였다.0872)尹致昊,≪尹致昊日記≫5(국사편찬위원회, 1971), 1897년 8월 8일.

 기초위원들이 규칙을 제정하자 8월 15일 그것을 임원회에서 통과시켜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독립관에 모여 토론회를 열기로 하였다. 독립협회가 토론회를 열기로 결정한 것은 배재학당의 협성회가 토론회를 개최하여 성공하고 있었던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협성회의 토론회는 독립협회 토론회의 원형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서,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배재학당의 협성회의 방식을 대중적 규모로 일반화한 것이다.0873)강재언 저·정창렬 역,≪한국의 개화사상≫(비봉출판사, 1981), 310쪽.

 독립문이 완공되는 1897년말에 와서는 독립협회의 성격이 달라졌고 1897년말부터 서재필과 윤치호가 주도하여 시작한 토론회는 이러한 변모와 관련이 있었다.0874)주진오, 앞의 글, 232∼233쪽.

 1897년 8월 29일부터 독립협회의 매주 정기집회를 토론회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조직도 개편된다. 이제 독립협회는 안경수·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정동구락부 세력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계몽운동 단체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임원진은 여전히 대부분 전·현직 고위관료들이었다.0875)주진오,<1898년 독립협회운동의 주도세력과 지지기반>(≪역사와 현실≫15, 1995), 176∼177쪽.

 1897년 8월 29일 오후 3시 독립관에서 “조선에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을 주제로 처음에는 약 7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하는 가운데 제1회 토론회가 개최되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0876)尹致昊,≪尹致昊日記≫ 5, 1897년 8월 29일.
The Independent, 1897년 8월 31일, Local Items.
제2회 토론회에는 방청인만도 2백 명이나 참석하였으며, 토론회 참가자와 방청인 수는 계속 증가하여 제8회 토론회부터는 약 5백 명이 참가하기에 이르렀다.0877)愼鏞廈,<대한제국 초기의 동북아정세와 자강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92), 154∼155쪽.

 토론회는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르도록 하였다.

① 논쟁이 될 수 있고 회원과 방청인의 지식에 도움되는 주제를 1주일 전에 선정한다. 즉 상대적인 개념이 들어 있는 演題를 정해 놓는다. ② 演士 4명을 1주일 전에 선정하여 주제의 결정을 찬성하는 우편과 반대하는 좌편으로 나누어 각기 자기 편이 옳다는 주장을 하게 한다. ③ 토론회 당일 회원들은 토론자로서 토론에 참가하여 자기가 공명하는 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할 수 있다. ④ 회원 이외의 방청인의 참관을 적극 권장한다. ⑤ 토론 후의 승부는 참석한 회원과 방청인의 다수 의견에 따라 결정한다.

 이것을 게일(James S. Gale)은 ‘yes-no meeting’0878)James S. Gale, op. cit., p.224.이라고 했는데 회원들에게 대중연설을 훈련시키는 데 좋은 성과를 나타냈다.

 회원들은 처음에는 대중 앞에 연설하러 나서는 것을 주저했으나 수백 명의 회원들이 얼마 후에는 아주 효과적인 대중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수의 방청인들이 토론회에 계몽되어 독립협회에 동조 가입하여 독립협회 세력을 급속히 신장시켰다.

 토론회에는 대체로 회원 외에도 방청인이 수백 명 참석하여 대성황이었다.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에 참가하여 토론회는 회원과 방청인의 모임이 되어 진지하고 활기에 넘치게 되었다. 토론회는 매주 일요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광무 2년(1898) 12월 3일까지 총 34회의 토론회가 열렸다. 다루는 주제는 초기에는 사회·문화 등 비정치적인 것들이었으나, 러시아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정치적인 문제를 주로 취급하였다. 이런 토론회를 통해 독립협회 회원들의 정치의식과 조직에 대한 귀속감이 높아졌다.

 독립협회 토론회의 주제를 차례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1회(1897. 8. 29) 조선에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
재2회(1897. 9. 5) 도로 수정하는 것이 위생에 제일 방책.
제3회(1897. 9. 12) 나라를 부강케 하는 데는 상무가 제일.
제4회(1897. 9. 19) 도적을 금하는 데는 길가에 밤이면 등불을 켜는 것이 긴요함.
제5회(1897. 9. 26) 부녀를 교육하는 것이 의리상과 경제상에 마땅함.
제6회(1897. 10. 17) 국문을 한문보다 더 쓰는 것이 인민 교육을 성대케 하는 데 유조하다.
제7회(1897. 10. 24) 국중에 상무를 흥케 하고 자주권을 견고케 하는 데는 輕便하고 실로 보배로운 화폐를 그 나라에서 지어 쓰는 것이 요긴하다.
제8회(1897. 11. 1)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상에 대단히 불가하다.
제9회(1897. 11. 7) 대한이 세계 각국과 비견하여 제일 상등국이 되려면 근일 새 법과 새 학문을 배우지 말고 한·당 풍속과 예절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제10회(1897. 11. 14) 벙어리와 판수들은 정부에서 재예로 교육하는 것이 마땅하다.
제11회(1897. 11. 28) 대한 인민들이 이때까지 부유하고 공명함은 각기 조상의 분묘들을 좋은 땅에 쓴 까닭임.
제12회(1897. 12. 5) 인민을 위생코저 하려면 의약의 학문이 급선무임.
제13회(1897. 12. 12) 인민의 심지를 쾌활케 하고 독립의 권리를 보호하려면 상문하는 것보다 상무하는 것이 더 긴요함.
제14회(1897. 12. 19) 겸년 인민을 구제하려면 채과를 미곡보다 더 많이 무종하는 것이 긴요함.
제15회(1897. 12. 26) 인민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개명케 하려면 우리 나라 신문지며, 다른 나라의 신문지들을 널리 반포하는 것이 제일 긴요함.
제16회(1898. 1. 2) 나라를 영원 태평케 하려면 관민간에 일심 애국하는 것이 제일 긴요함.
제17회(1898. 1. 16) 청국을 각국이 분파하게 되었으니 대한이 조린지의로 가서 구원하는 것이 가하다.
제18회(1898. 1. 23) 국가를 부유케 하려면 금·은·동·철·석탄 등 광산을 확장케 하는 것이 제일 긴요함.
제19회(1898. 1. 30) 공력과 증기력과 전기력을 인력보다 더 힘쓰는 것이 경제학상에 더 유조할 뿐더러 인민의 생애가 더 흥왕함.
제20회(1898. 2. 6) 선악과 이해와 장단을 알면서도 행사는 경계를 알지 못하고 하는 것과 같게 하는 자는 인품이 당초에 분간없는 사람보다 더욱 더러움.
제21회(1898. 2. 13)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귀하나, 남에게 종이 되고 살기를 얻는 것은 지극히 귀한 인명을 천하게 대접하는 것이요,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죄를 얻음.
제22회(1898. 3. 6) 대한국 토지는 선왕의 간신코 크신 업이요, 일천 이백만 인구의 사는 땅이니, 한 자와 한 치라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빌려주면 이는 곧 선왕의 죄인이요, 일천 이백만 동포형제의 원수임.
제23회(1898. 3. 20) 재정은 사람의 일신에 혈맥과 같으니 그 혈맥을 보양하기는 각기 자기들에게 있지 남에게 있지 아니함.
제24회(1898. 3. 27) 민·국을 안보하려면 일정한 법을 긴급히 준행하여야 함.
제25회(1898. 4. 3)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
제26회(1898. 4. 17) 각처에 독립협회 지소를 설립하는 것이 본회의 제일 요무임.
제27회(1898. 5. 1) 실직없는 이가 나라의 정치 가부를 의론하는 것이 獨善하는 도에 불합함
재28회(1898. 5. 8) 백성의 권리가 튼튼할수록 임군의 지위가 더욱 높아지시고 나라의 형세가 더욱 크게 떨침.
제29회(1898. 5. 15) 약한 이를 강한 자가 업수히 여기는 것이 천리와 인정에 당연함.
제30회(1898. 6. 5) 국가를 흥왕케 하기는 관민이 일심으로 하는 데 있지 강토의 대소에 있지 아니함.
제31회(1898. 6. 12) 국법을 튼튼히 지키기는 백성에게 있다.
제32회(1898. 7. 3) 무당과 점장이를 믿어 혹하는 것이 인민의 큰 폐막임.
제33회(1898. 7. 19) 인재의 선하고 악한 것은 천품에 있고 학문에 있지 아니함.
제34회(1898. 12. 3) 신과 의를 튼튼히 지키는 것은 본국을 다스리는 데와 외국들을 사귀는 데 제일 긴요함.

 토론회 주제를 내용별로 분류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신교육진흥에 관한 것 3회, 산업개발 주장 5회, 민족문화 창달에 관한 것 1회, 미신타파 3회, 위생과 치안에 관한 것 3회, 자주독립 3회, 신문보급에 관한 것 1회, 대외정책에 관한 것 1회, 수구파 비판 2회, 이권 반대 2회, 자유 민권에 관한 것 5회, 의회설립 주장 1회, 독립협회 지회설치 1회였다.0879)愼鏞廈, 앞의 책(1976), 263∼267쪽.

 독립협회는 1898년 3월의 만민공동회가 성공리에 끝난 직후, 의회설립운동의 준비로 1898년 4월 3일의 제25회 토론회의 주제를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으로 정하고 회원과 시민들 사이에서 토론과 계몽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그것을 전기와 후기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전기는 1897년 8월 29일의 제1회 토론회부터 1898년 2월 6일 제20회 토론회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주로 당시의 기본적 사회문제들에 대한 주제를 토론하여 회원과 국민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계몽적 주제가 이 시기의 토론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토론회가 개최됨으로써 이 시기에 독립협회의 내부구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선 일반회원들이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유로이 자기의 의사를 발표함으로써 민중회원들이 독립협회의 표면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토론회를 통해서 독립협회의 회원이 현저히 증가하고 독립협회의 세력도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토론회의 토론과정을 통하여 공동의 집단의식을 갖게 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독립협회의 사상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회원들이 집단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회원간의 연대감이 강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후기 토론회는 협회가 구국선언 상소를 하기로 결정한 1898년 2월 13일 제21회부터이다.

 후기 토론회는 독립협회의 자주민권 자강운동과 병행하여 진행되어 토론회의 주제도 독립협회의 운동이 쟁점으로 하는 문제를 주제로 전개되었다. 후기 토론회는 협회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보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0880)愼鏞廈, 위의 책, 269∼273쪽.

 독립협회는 자주민권 자강투쟁과 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토론회를 병행하려고 하였으나 1898년 8월 14일 회합에서 토론회는 “다른 사무가 많은 까닭으로 잠시 권도로 정지하고 다만 통상회만 독립관에서 매 일요일이면 의례히 하기로 작정”하여 토론회를 중단하였다.0881)≪독립신문≫, 1898년 8월 20일, 잡보. 이것이 사실상의 토론회의 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독립협회는 12월 3일 마지막으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0882)≪독립신문≫, 1898년 11월 29일, 잡보.

 이상과 같이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독립협회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민중운동으로 전개토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후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데 기초적 준비작업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토론회의 계몽활동을 통하여 회원과 국민들은 차차 각성하여 자기 사회가 당면한 기본문제를 인식하고 자주민권자강의 필요성과 방법을 알게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연과 토론회를 통해서 고취한 민권사상과 민주정치적 행동양식은 지극히 초보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율과 자아가 무시되어 왔던 역사적인 배경 밑에서 개인의 존엄과 자주 정신의 집단적인 각성, 그리고 새로운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할 국가시책의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새로운 정치적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자극하였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한 활동은 전통적인 조선사회에 근대적 정치의식을 계발하는 데 있어서 기여한 바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동안 독립협회가 전개해 온 강연회와 토론회의 활동은 민권의식을 고양시키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계도함으로써 독립협회를 정치집단화의 길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0883)韓興壽, 앞의 글(1970), 33쪽.

 이상과 같이 독립협회는 독립기념물 건립, 신문과 회보의 간행, 그리고 토론회와 연설의 개최 등을 통하여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의식을 고취시켜 민중을 계몽하였다. 그리하여 민중적 기반을 형성하고, 스스로 민중적 단체로 변모하여 민중운동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0884)柳永烈, 앞의 글,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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