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1. 독립의식의 계발
  • 4) 국학교육장려

4) 국학교육장려

 독립협회는 자주 독립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도 자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세계 각국의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를 보다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독립협회의 민족문화론이 전개되었다. 독립협회의 민족문화론은 前期 개화사상가의 민족문화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독립협회가 민족문화의 근대적 확립을 위하여 역점을 두고 강조한 것은 국문의 전용 또는 사용을 강력하게 주창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한≪독립신문≫은 국문 전용과 띄어쓰기를 실행하여 발행되면서 독립협회의 민족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계몽하였다.

 ≪독립신문≫의 국문 전용에 의거한 창간의 배경에는 서재필의 민중을 위한 민중이 읽을 수 있는 계몽적 신문을 만들겠다는 민주주의적 결단과 周時經의 자기 나라 말은 알기 쉽고 배우기 쉬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인 국문전용으로 표현하자는 민족주의사상 및 1893년 이래의 국문 연구의 노력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0885)愼鏞廈,<주시경의 애국계몽사상>(≪한국근대사회사상사연구≫, 일지사, 1987), 390쪽 참조. 그런데 이기문은 신용하의 관점은 서재필과 주시경의 합작설로 주시경쪽으로 무게가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고,≪독립신문≫의 한글 전용이 서재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 빈칸 띄어쓰기는 서재필의 주장에서 나왔고 국문 전용의 취지를 밝힌 창간호의 논설을 서재필이 직접 작성하였으며 나아가 1897년 8월 5일에 서재필이 쓴 것으로 보이는 국문에 관한 논설에서 그는 언문일치의 이상을 천명하고 사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등 국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단지 주시경은≪독립신문≫을 통해서 그의 국문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혔을 것이라는 것이다(이기문,<독립신문과 한글문화>,≪주시경학보≫4, 탑출판사, 1989 참조).

 19세기 말엽의 우리 나라 문자생활의 전반적 상황을 놓고 볼 때, 우리 나라의 진보적 지식층으로서 1896년에 새 신문을 내면서 선택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국한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때에≪독립신문≫을 국문으로 발행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결단이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하나의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0886)이기문, 위의 글, 7쪽.

 ≪독립신문≫의 국문전용은 우리말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독립신문≫의 국문판 助筆로서 국문판 편집·제작을 담당했던 주시경은 1896년 독립신문사 안에다 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국문법의 공동 연구를 시작하였다. 독립협회는 주시경·池錫永·申海泳·崔光玉 등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인 국문의 근대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①국문법을 만들고 맞춤법을 통일시킬 것, ②국문의 띄어쓰기를 실행할 것, ③국어사전을 편찬할 것, ④국문 전용을 가급적 시행할 것, ⑤국문 가로쓰기를 시행할 것 등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어느 것이나 당시에는 획기적인 생각이었으며, 그들의 국문운동은 실제로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0887)愼鏞廈, 앞의 책(1976), 168∼172쪽.

 독립협회는 국문 사용이 독립사상을 확고하게 하는 길이고 민권을 신장시키고 전국민에게 지식을 갖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국문 사용이 문자 습득 시간을 대폭 절약하여 나라의 자강에 필요한 실상학문을 공부하는 시간을 얻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했다.0888)≪독립신문≫, 1897년 4월 24일·8월 5일, 논설.

 ≪독립신문≫이 얼마나 국문을 강조했는가에 관해서는 창간호의 1면에 게재되었던 광고에서도 알 수가 있다. 즉, 거기에서는 “물론 누구든지 물어 볼 말이 있든지 세상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 신문사에 간단한 문장으로 편지를 보내 주시면 답장을 해주며, 신문에 게재할 필요가 있으면 게재한다. 그러나 한문으로 쓴 편지는 처음부터 받지 않는다”고 한문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독립협회는 그들의 공식 초청장이나 기록을 국문 전용으로 하고 상소문도 당시 관행을 깨어 국한문 혼용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상소는 아직도 한문이었고 일부가 국한문 혼용체였다. 그리고≪대조선독립협회회보≫는 호를 거듭할수록 문자 사용이 한글과 국·한문 혼용체에서 순한문으로 기울고 있다. 이는 그 시대가 아직 한문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독립협회는 또한 민족의 자기발견과 독립적 발전의 기초로서 자기의 언어와 동시에 자기의 역사를 재발견하여 배워야 한다고 주창하였다.≪독립신문≫은 국사교육에 의하여 민족의 자주적 발전에 필요한 민중의 긍지와 에너지를 끌어낼 것을 강조하였다.0889)강재언 저·정창렬 역, 앞의 책, 322쪽.≪독립신문≫의 도처에서 자기 나라 역사의 공부를 주장하고 있다.

 독립협회는 종래의 우리 역사에 대한 공부는 문벌이나 외우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비판하고 새로운 우리 역사를 체계화하여 그 안에서 훌륭한 사람들의 행적을 배울 것을 강조하였다. 독립협회가 한국 역사의 재발견을 주창한 것은 당시 문화계에 중국 역사와 尊華史觀이 지배한 현실 때문이었다. 독립협회는 정신적으로 나라가 어둡고 약하게 된 것은 국민들이 존화사관에 젖어 중국 역사만 배우고 자기의 역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당시 이미 누구보다도 뚜렷한 역사의식을 갖고 자기 나라 역사의 공부를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자주적인 역사관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던 동시에 이를 기초로 애국을 강조하였다. 독립협회는 자기 역사를 잘 알아야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독립신문≫이 “전국 인민은 다른 나라의 역사도 알아야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먼저 배워 어느 때에 나라가 번영했고 어느 때 나라가 쇠퇴하였는가를 명확히 알아서, 선조가 범한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그 부끄러움을 반드시 불식하도록 하고 바른 점은 본받아 그것을 능가할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0890)≪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 논설.라고 자국의 역사를 학습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였던 것도 그 일례이다.

 독립협회는 새로운 역사관으로서, 첫째 존화사관을 철저히 비판하고 자주사관을 주장했다. 둘째로 尙古史觀을 비판하고 진보사관을 주장했다. 셋째 虛相 학문으로서의 역사를 비판하고 實相 학문으로서의 역사를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라 역사공부는 애국심·자부심과 교훈과 지혜를 얻기 위한 실상학문으로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0891)≪독립신문≫, 1896년 7월 25일, 논설. 넷째로 과거를 회고하기 위한 역사가 아니라, 현재를 역사로서의 현재로서 탐구하고, 미래를 역사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 역사를 배우고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섯째로 국사를 고립시켜 탐구할 것이 아니라 세계사와 연관시켜 탐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국수적으로 국사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사를 알고 외국 사정을 알 것을 재삼 강조하면서, 민족적 활력의 원천으로서 국사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타국사에 우선하여 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또 그들은 외국 사정에 우선하여 본국 사정을 알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892)강재언 저·정창렬 역, 앞의 책, 323쪽.
愼鏞廈, 앞의 책(1976), 166∼167쪽.

 이러한 역사관에 의거해서 첫 성과로 나온 것이 崔景煥의≪大東歷史≫5권이었다. 이 책은 한국의 고대사 인식을 새롭게 체계화한 것으로서 한국의 고대국가가 중국과 나란히 경쟁한 고도의 문명한 독립국가임을 밝힌 것이었다. 또한 이 책은 중국을 中華라고 하지 않고 支那라고 부르면서 중화사관에서 탈피하여 민족사관을 전개하였다.0893)그런데 이 책에서 개화기의 일본을 우리와 同文同種之國이고 이와 입술의 관계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의 對日意識의 한계를 찾아볼 수 있다(趙東杰,<한말사서와 그의 계몽주의적 허실(상)>,≪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173쪽).

 ≪대동역사≫는 최경환이 1896년 원고를 완성하고, 다른 회원들의 검토를 거쳤으며, 玄 采의 책임하에 학부 편집국에서 2,000부를 인쇄하여 전국에 보급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학부대신 申箕善이 이 책을 너무 자주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발간을 금지시켜 단지 필사본이 회원의 교양용으로 나돌고 있었다. 그 필사본이 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은 1905년이었다.

 독립협회는 또한 처음으로 애국가를 제정하여 식순에 넣어 경축식 등에서 사용하였다. 그리고 漢詩나 時調 대신에 나라의 독립을 지키며 문명개화를 이룩하려는 내용으로 애국적 가사 짓기와 창가를 장려하였다.

 독립협회의 이러한 근대적 민족문화의 창조와 발전에 대한 주장은 단지 국문·역사·창가 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학문과 문화의 모든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종래 우리 나라의 학문이 虛學虛文에 치중했음을 신랄히 비판하고 ‘利用厚生과 富國强兵과 實事求是’하는 학문을 주창하였다. 그리하여 실학사상을 재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그들은 茶山 丁若鏞을 비롯한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을 처음으로 재발견하여 국민에게 소개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독립협회가 이러한 민족문화와 실상학문·실학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그들의 신교육의 체계 안에 넣었다는 사실이다.0894)愼鏞廈, 앞의 책(1994), 204∼205쪽. 독립협회는 교과내용을 전면 개혁하여 근대 자연과학·사회과학·어학·체육 등을 중심으로 교과과정을 편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동양 經書와 중국 史書 중심의 교과 내용에 비교하면 근본적인 일대변혁이었다.

 종래의 구교육이 천자문에서 시작하여 한문의 경서와 중국의 사서를 기본으로 하였고, 그것이 사대주의의 온상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국문과 국사에 의한 한국 본위의 교육의 강조와 그 교재 작성을 위한 연구가 가지는 의미는 극히 중대한 것이다. 이것을 빼어 버린 근대교육의 강조는 몰주체적인 새로운 형태의 사대주의를 재생산할 것임에 틀림없다.0895)강재언 저·정창렬 역, 앞의 책, 318쪽.

 이같이 독립협회는 민족문화를 근대교육 체계 안에 넣어 교육함으로써 자주 부강한 민족국가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대주의적 유교문화를 지양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에 바탕을 둔 자주적인 문화를 구축해야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를 확립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즉 중국 중심의 한자문화권에서 탈피하여 세계문화권속에서 새로운 한국문화권을 정립하려는 것이었다.

<金信在>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