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2. 국권수호 및 민권보장
  • 1) 구국운동 선언과 국권수호운동

1) 구국운동 선언과 국권수호운동

 독립협회의 운동을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립협회운동의 제1기는 독립협회가 창립된 1896년 7월 2일부터 독립협회의 구국운동 선언 이전인 1898년 2월 20일까지 약 20개월간으로 민중운동 준비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등 독립기념물 건립의 창립사업을 통하여 국민 대중에게 독립 의지와 애국정신을 고취하였고, 신문·잡지·강연회·토론회 등을 통하여 국민 대중을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사상으로 계몽하였다.

 1897년 말기에는 러시아의 재정고문 고빙문제 등과 관련하여 독립협회가 정부의 외세의존적 자세를 비판하게 되자, 보수적인 관료들이 점차 독립협회에서 이탈해 갔고, 독립협회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전환해 갔다.

 독립협회운동의 제2기는 독립협회가 구국운동을 선언한 1898년 2월 21일부터 ‘金鴻陸 毒茶事件’이 일어나기 이전인 그 해 9월 10일까지 약 7개월간으로 국권·민권운동기라 할 수 있다.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1일의 구국운동 선언과 3월 10일의 제1차 萬民共同會를 계기로 민중적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와 같은 민중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열강의 내정간섭·이권요구·토지조차 요구에 반대하여 국권수호·국익수호·국토수호를 포괄하는 자주국권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관인층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국민의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 등 인권·민권을 보장하려는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독립협회는 정부대신에 대한 公翰 등 순리적 주장을 주된 방법으로 하고, 만민공동회 등 민중집회의 물리적 압력을 從된 방법으로 하여 민중적 정치운동을 추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운동의 제3기는 김홍륙 독차사건이 발생한 1898년 9월 11부터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 모든 민회활동이 금지된 12월 25일까지 약 4개월간으로 참정·개혁운동기라 할 수 있다.

 독립협회운동 제3기에는 上疏나 公翰에 의한 순리적 주장보다 만민공동회와 같은 대규모 민중집회에 의한 물리적 압력이 주된 투쟁수단이 되어, 민중대회 중심의 민중운동이 전개되었다.0896)柳永烈,<독립협회의 성격>(≪한국사연구≫73, 1991), 55∼58쪽.
―――,<개화기의 민주주의정치운동>(≪한국사상의 정치형태≫, 일조각, 1993), 260∼270쪽.
독립협회운동의 단계구분에 관해서는 논자에 따라 다소 견해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신용하는 독립협회운동을 독립문 건립운동기(1896. 7. 2∼1897. 8. 28), 토론회 계몽운동기(1897. 8. 29.∼1898. 2. 20), 본격적인 정치개혁 운동기(1898. 2. 21.∼12. 25)로 크게 3단계로 나누고 마지막 단계를 다시 세분하여, 좁은 의미의 자주민권자강 운동시기(1898. 2. 21∼10. 27), 관민공동회 운동시기(1898. 10. 28∼11. 2), 만민공동회 투쟁시기(1898. 11. 3∼12. 25)로 나누고 있다(愼鏞廈,≪한국근대사회의 구조와 변동≫, 일지사, 1994, 181쪽 참조).

 俄館播遷으로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체류하는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조선의 여러 이권을 침탈해 갔다. 아관파천 기간에 조선의 독립은 크게 침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관파천에서 환궁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의 특징은 한국이 적극적으로 러시아의 후원을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대일 정치적 우위가 유지되는 한 한국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정책을 계속 유지한 것이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에서 환궁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만주 확보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0897)權熙英,<아관파천과 한로관계>(≪한민족과 북방과의 관계사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399쪽.

 그런데 러시아는 1897년 9월 2일 주한 러시아공사를 온건한 베베르(karl I. Waeber, 韋貝)로부터 적극적 침략 간섭정책을 주장해 오던 대외 강경파 스페이에르(Alexei de Speyer, 士貝耶)로 교체시켜 식민지 속국화의 정책을 강화시켰다. 러시아는 뒤늦게나마 군사교관을 증파하고 스페이에르공사로 하여금 위압적인 자세로 협박을 가하는가 하면 재정고문을 파견하여 한국의 재정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태도 변화는 조선이 러시아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인 것과 1896년부터 재무대신 위테(S. I. Witte)에 의해 시도된 만주진출이 청과의 교섭과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인 건양 원년(1896) 10월 뿌챠타(D. V. Putiata)대령을 포함한 14명의 러시아의 장교와 하사관이 군사교관으로 고빙되어 그 동안 한국군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1897년 7월 25일 다시 13명의 러시아 군사교관이 인천에 도착했다. 외부대신 이완용이 군사교관 추가 파견을 반대하다가 해임된 후에도 내부대신 南廷哲과 군부협판 閔泳綺가 일본공사의 후원으로 역시 반대를 함으로써 베베르는 한국정부가 13명의 군사교관을 추가로 임명하도록 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러시아 영향력이 상당히 쇠퇴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스페이에르는 도착한 그 다음날, 이미 부결되어 버린 13명의 군사교관 고빙계약서에 조인하라고 한국정부에 종용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각료와 독립협회 회원들이 반대하여 역시 부결되었다. 그런데도 스페이에르는 정부에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13명의 군사교관이 계약없이 한국 군대를 훈련하도록 하는 타협안을 마련하여 성사시켰다. 이와 같은 조치는 조야간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만 심화시켜 주었다.0898)朴熙琥,<대한제국기(1896∼1898)의 한·러관계>(≪史叢≫31, 1987), 21∼22쪽.

 한편 1897년 10월 스페이에르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영국인 브라운(J. M. Brown, 栢卓安)을 탁지부 고문에서 해고하고 러시아의 前大藏大臣代理인 알렉세예프(K. A. Alexeiev)를 그 자리에 임명하려 하였다. 이에 외부는 10월 26일 당시 탁지부 고문 겸 해관 총세무사인 브라운의 해고를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알렉세예프가 파견될 무렵 한국정부내에는 러시아의 도움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스페이에르는 11월 2일 외부대신 閔種黙을 해임시키고 법부대신 趙秉式으로 하여금 외부대신 직을 겸임토록 조치한 다음 조병식과 11월 5일 알렉세예프 고빙계약을 체결하였다.

 브라운의 해고에 조오단(J. N. Jordan, 朱爾典) 주한 영국총영사가 강경하게 항의하고, 영국정부는 12월에 동양함대에 명하여 군함 7척을 인천에 회항시켜 시위토록 했다. 놀란 외부는 브라운의 해관 총세무사 해임 취소를 발표하고, 알렉세예프를 탁지부 고문에만 남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가라앉혔다.

 이같이 러시아는 기존의 군사교관 파견에 이어 재정권마저 확보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러시아 세력의 앞잡이와 친러세력가들에 의하여 관리임면권까지도 장악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침략정책은 독립협회를 비롯한 대한제국내의 개혁파 세력과 직접 충돌하게 되었다.

 1898년에 들어서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러시아는 1월초부터 絶影島(지금의 부산 영도) 조차의 인준을 다시 강력히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1897년 8월부터 절영도에 석탄고 기지 조차를 강압적으로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이같이 밖으로는 러시아의 침략정책의 강화와 열강의 이권침탈이 자행되고, 안으로는 친러내각이 이에 영합하였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침략세력을 배척하지 않고는 자주독립국의 내실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0899)愼鏞廈,≪독립협회연구≫(일조각, 1976), 282∼283쪽.

 대한제국정부가 절영도 조차를 승인하려 하자 계몽단체로 활동하였던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1일 구국운동을 선언하는 강경한 상소문을 올림과 동시에 본격적인 구국 정치운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 2월 7일 저녁에 윤치호는 서재필을 방문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국정문제에 대하여 독립협회 회원들이 고종에게 상소할 것을 제안하여 서재필은 이에 적극 동의하였다.0900)尹致昊,≪尹致昊日記≫ 5 , 1898년 2월 7일.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13일의 제21회 토론회의 주제를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귀하나 남에게 종이 되고 살기를 얻는 것은 지극히 귀한 인명을 천하게 대접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를 얻음”으로 정하고 나라의 독립문제를 토론하였다. 토론회를 마친 다음 윤치호는 국왕에게 상소할 것을 회원들에게 제의하여 50대 4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상소를 준비할 5인의 위원이 지명되었다. 2월 20일 위원들이 작성한 상소 문안을 접수하자 약 200여 명의 회원과 500여 명의 방청인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논쟁을 거쳐 그 문안을 통과시켜 1898년 2월 21일에는 독립협회 회원 135명이 독립관에 모여 결사적인 구국운동을 서약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구국운동 선언 상소를 올려 국가 자주권을 주장하였다.0901)愼鏞廈, 앞의 책(1976), 283∼287쪽 참조.

국가의 국가됨은 둘이 있으니 자립하여 타국에 의뢰치 아니하고 自修하여 일국에 政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립에 있어서는 재정권과 병권·인사권을 자주하지 못하고, 자수에 있어서는 典章과 法度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으니, 국가가 이미 국가가 아닌즉, 원컨대 안으로는 定章을 실천하시고 밖으로는 타국에 의뢰함이 없게 하시어 우리의 皇權을 자주하고 국권을 자립하소서(鄭 喬,≪大韓季年史≫상, 173∼175쪽).

 李商在·李建鎬가 지은 이 상소에서 독립협회는 외국의 군사권과 재정권 그리고 인사권 간섭을 규탄하고, 대외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입헌정치를 주장하면서 탐관오리의 제거와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자립과 자주를 위해서 독립협회는 적극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간곡하게 선언하였다. 이처럼 민중의 동원체제인 만민공동회가 개최되기 이전에 이미 그 행동 실천에 대한 것을 선언하였던 것이다.0902)박용옥,<만민공동회>(≪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84), 226쪽.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는 아관파천 이래로 한국의 재정권·군사권·인사권에 깊이 간섭하고 있던 러시아에 대한 자주가 당연히 제1차적인 목표가 되었다.0903)유영렬,≪개화기의 윤치호연구≫(한길사, 1985), 112쪽.

 독립협회는 구국운동 선언을 한 다음 회원과 국민의 힘을 조직화하여 가면서 다시 긴급하게 대두한 열강의 이권침탈에 본격적으로 대처하여 나갔다.

 독립협회가 국권수호와 내정개혁을 결의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절영도 조차를 거듭 요구하여 왔다. 외부는 2월 5일 의정부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절영도 조차를 러시아에 허가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통상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에 대해 격렬하게 성토하였다. 그 다음 날인 2월 28일 외부에 강경한 항의 공한을 발송하였다.0904)鄭 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71), 176∼177쪽 참조.

 이에 대해 민종묵은 일본에 석탄고를 빌려주었던 전례에 따라 인준하였을 따름이라고 답변서를 보내 사건을 무마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절영도 조차를 독립협회와 의정부에서도 규탄하자 3월 2일 민종묵은 면직되었다. 그리하여 절영도 조차는 저지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공사관과 친러파들은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여 3월 3일 다시 민종묵을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절영도 조차를 인허해 주려 하였다. 독립협회는 이에 격분하여 러시아의 국토 조차 요구를 실력으로 저지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협회는 또한 일본에 조차된 석탄고 기지도 회수할 것을 결의하고, 3월 7일 회수를 요구하는 공한을 외부에 발송하였다.0905)愼鏞廈, 앞의 책(1994), 239∼240쪽 참조.

 러시아측은 절영도 조차 요구와 함께 3월 1일에는 한러은행을 개설하였다. 협회는 3월 6일 독립관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한러은행의 철수 요구를 결의하고, 다음 날 항의문을 탁지부에 발송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확실한 답변을 회피하였다.

 이같이 러시아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정책이 독립협회의 민족운동에 의하여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대러규탄이 점차 가속화되어 마침내 러시아인의 전면적인 철수를 주장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자, 러시아 당국은 이를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러시아의 극동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朝野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짐에 따라 스페이에르공사는 3월 7일 오후 2시에 전신으로 대한제국내의 상황을 본국에 보고·협의한 후, 3월 7일 대한제국 황제의 요청에 따라 士官과 고문관을 파견하였지만 황제와 정부가 이를 필요없다고 여기면 러시아정부는 곧 철수할 용의가 있으므로 24시간 이내에 그 여부를 회신해 달라는 조회를 대한제국 외부에 보내어 왔다.0906)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高麗大 出版部, 1969),≪俄案≫12, 문서번호 997 露敎鍊士官 및 度支部顧問官의 繼續駐韓의 希願與否를 二十四時內에 回答하라는 通牒, 1898년 3월 7일(이후≪舊韓國外交文書≫는 생략하고≪俄案≫으로만 표기함).

 러시아측이 보낸 공한은 러시아 사관과 고문관은 대한제국측의 요청에 의하여 고빙된 것인데, 대한제국 황제가 이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자기들 정책의 정당성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아 그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러시아세력에서 벗어나려던 황제 자신과 조정에서도 막상 갑작스러운 이와 같은 질문에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조회를 받고 황제는 각부 대신과 외국공사들에게 자문을 청하고 또 회답시한을 3일간 연기시켜 달라는 요청서를 러시아공사에게 발송하였다.0907)≪俄案≫12, 문서번호 999, 1898년 3월 8일, 露敎鍊士官 및 度支部顧 問官의 繼續駐韓希望에 대한 照覆.
愼鏞廈, 앞의 책(1976), 296쪽.

 위와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독립협회는 이 기회에 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정부가 즉각 러시아의 사관과 고문관이 불필요하다는 회답을 보내고 그들을 철수시켜 자주독립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라는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大韓季年史≫에 의하면 서재필이 鄭 喬에게 密請하여 만민공동회를 개설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서재필은 정교에게 뿐만 아니라 당시의 간부들에게 모두 민중대회의 필요성을 제의한 것 같다.0908)愼鏞廈, 위의 책, 297쪽.
鄭 喬,≪大韓季年史≫ 上, 182쪽.

 독립협회가 개최한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였다. 이 민중대회에서 시민들은 시전상인 玄德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白木廛 다락 위에 차린 연단에서 玄公廉·洪正厚·李承晩 등 培材學堂과 京城學堂의 學員들이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제국정부가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하여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켜 줄 것을 열망한다는 전문을 러시아공사와 러시아 외부대신에게 발송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키고자 주장하였다. 연사들의 연설을 듣고 난 후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1만여 명의 민중들은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만민공동회의 의사로서 결의하였다.0909)≪독립신문≫, 1898년 3월 13일·15일, 잡보.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에 의해 침탈되고 있는 나라의 병권·재정권 및 관리임명권을 찾아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구국운동 선언에 대한 실천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0910)박용옥, 앞의 글, 227쪽.

 3월 12일 같은 장소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려 러시아와 모든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여 자주독립의 기초를 견고히 하자고 결의하였다. 만민공동회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의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어떠한 중대문제를 다룰 때 시민대회 혹은 국민궐기대회 같은 대중집회를 주최하여 그 명의로 정부에 진정하고 혹은 항의한 것이나 다름없다. 만민공동회는 실로 근대적인 우리 나라 민주정치운동의 선구적인 모습이었음에 틀림없다.0911)震檀學會,≪韓國史≫現代篇(을유문화사, 1963), 861쪽.

 러시아공사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이 만민공동회를 관람하였으며, 만민공동회가 이렇게 대규모 민중대회로서 성공한 사실은 즉각 당시 서울의 외교계와 정부에 큰 충격을 주어, 한국 민중의 성장에 모두 놀라움을 표시하였다.0912)The Independent, 1898년 3월 12일, Local items.
愼鏞廈, 앞의 책(1976), 299쪽.

 고종과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결의와 러시아측의 압력 사이에서 고심하면서 연일 대신회의를 열고 대책수립에 부심하였다.

 고종은 경기도 楊州에 거주하는 金炳始와 加平에 거주하는 趙秉世와 같은 원로대신에게 칙사를 보내어 의견을 물은 결과 그들은 민의에 따라 러시아교관 및 고문을 사절하라고 촉구하였다. 일본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도 러시아사관과 고문을 사절하라고 권하였다.

 황제는 국민의 여론이 이와 같고 원로대신들의 뜻 또한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일본측의 후원도 있었던 까닭에 11일 밤에는 이 문제를 대책회의에서 토의하게 하였다. 대책회의에서 김홍륙·민종묵·鄭洛鎔 등 친러파 인사들은 러시아의 원조가 절실히 필요함을 내세워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는 데 반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민의와 원로대신들의 권유에 따라 러시아의 압력을 사절하자고 주장하였다.

 고종은 결단을 내려 3월 11일 밤 마침내 정부로 하여금 러시아공사관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내도록 했다.0913)≪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89),<機密本省往信>, 1898년 3월 31일, 機密 第16號, 排露加熱 및 露士官·顧問官 등 撤退의 件.
愼鏞廈, 위의 책(1976), 299쪽.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는 이와 같은 회답을 받고 그 회답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려고 아침 8시경에 통역을 대궐에 파견했으나 내관은 황제가 취침 중이라는 이유로 알현을 거절하였다.

 한편 이 시기의 러시아는 한반도보다도 오히려 만주경영이 급선무라 여겼고 또한 한국정부의 답신을 계기로 하여 러시아가 내세울 수 있는 명분도 사라졌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러시아정부는 3월 17일 한국측 답신에 동의한다는 회답전문에서 “이미 한국 민중의 여론이 이와 같으면 고문과 군사교관들을 일제히 解還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여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재정고문과 군사교관들의 철수를 훈령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공사도 대한제국정부에 절영도 석탄고기지 조차 요구의 철회와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하여 왔다.0914)尹致昊,≪尹致昊日記≫ 5 , 1898년 3월 18일.
≪俄案≫12, 문서번호 1002, 1898년 3월 17일, 露士官·顧問官의 撤收 및 韓國大使特派을 拒絶하는 照覆.
대한제국정부는 1898년 3월 19일 러시아의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정식으로 해고하였다. 뒤이어 3월 1일 개설된 한러은행도 문을 닫았다.

 러시아정부는 주한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를 4월 12일자로 마튜닌(N. G. Matunin)으로 교체함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대폭 후퇴하였다. 일본도 그들의 절영도 석탄고 기지를 한국정부에 돌려 보내왔다.

 독립협회는 정부에서 러시아공사에게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사절을 회답하였다는 소식에 접하고 3월 13일 독립관에서 경축회를 열고 만세를 부르며 경축의 분위기에 휩싸였다.0915)≪독립신문≫ 1898년 3월 15일, 잡보. 그 다음 날에는 이를 경축하는 공한을 정부에 보냈다.

 이같이 만민공동회의 항쟁이 큰 성과를 거두게 되니, 일부에서는 독립협회를 시기하며 중상모략도 서슴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재필은 수구파와 러·일공사의 축출 공작으로 중추원 고문관으로부터 해직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해직시킴으로써 러시아의 간섭을 벗어나려고 했던 것은 정부와 국민 전반이 공감하던 바였으므로 황제와 관민상하가 러시아세력 배척을 위하여 일치단결할 수가 있었다.0916)박용옥, 앞의 글, 235쪽. 따라서 독립협회가 러시아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던 1898년 3월까지는 독립협회의 반러적 입장이 결코 정부의 입장과 크게 상반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0917)이민원,<대한제국의 개혁과 그 실태>(≪한국민족운동사연구≫9, 이문사, 1994), 10쪽.

 이같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국권수호운동으로 러시아세력과 일본세력은 한반도에서 크게 후퇴하였다. 러시아의 한반도 후퇴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반대 때문만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요인이 더 있었을까.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외교정책의 주조가 조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다시 만주에 대한 맹렬한 관심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은 1897년 11월 독일의 膠州灣 점령을 계기로 인해서였다.0918)한정숙,<제정러시아 제국주의의 만주·조선정책>(≪역사비평≫, 1996년 겨울호), 233쪽. 러시아는 독일의 교주만 점령에 대한 대책으로 1897년 12월 19일에 旅順·大連을 점거하고 1898년 3월 28일 요동반도를 조차하였다.

 러시아의 이 같은 만주 집중정책은 시간적으로 위테의 방략에 따른 한국에로의 적극적 침략 간섭정책이 완성될 무렵에야 시행되었던 관계로 당시의 열강으로서는 러시아가 한국과 만주를 동시에 침략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여순·대련을 점거한 것을 滿韓 동시 진출로 이해한 영국과 일본은 즉각 대응조치를 취했다. 영국은 극동함대를 제물포항에 정박시켜 시위하는 한편, 일본도 대한해협을 봉쇄하였다. 이같이 영국과 일본이 대응조치를 취하자 러시아 외상 무라비예프(M. N. Muraviev)는 “현금의 정세로서는 한국에서 일본에게 상당한 양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1898년 1월 7일 결국 주러 일본공사 하야시 타다시(林董)에게 “한국에 대해 러시아는 일본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제의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0919)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 31-1(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문서번호 102 韓國問題ニ關スル露國公使トノ談話通告ノ件, 116∼117쪽.

 그리하여 1898년 1월에서부터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을 하여 세력균형에 있어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였다.0920)이광린,≪韓國史講座≫Ⅴ(근대편)(一潮閣, 1984), 392쪽.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滿韓交換論을 제기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는 대신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계기로 한국에 있는 모든 자국 고문관들을 철수시켰다.

 이같이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후퇴하게 된 것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항쟁과 러시아 당국의 만주 집중정책이라는 극동정책의 변경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한반도 소극정책의 주요인은 영·일과 러와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0921)이민원,<독립협회에 대한 列國公使의 간섭>(≪청계사학≫2, 1985), 208쪽.

 러시아의 여순·대련의 점령을 만한 동시진출로 이해한 영·일은 이에 즉각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대응이 나아가 영일동맹까지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러시아의 대응은 한반도에 있어 일본에 대한 양보로 나타났던 것이다.0922)최문형,≪열강의 동아시아정책≫(일조각, 1979), 32∼37쪽.

 한편 독립협회의 강경한 투쟁에 힘입어 대한제국정부에서 러시아측의 철수를 요청하는 단안을 내린 것도 러시아의 한반도 철수를 보다 앞당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러시아의 정책변화도 있지만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실질적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이 물러감과 때를 같이 하여 러시아와 일본은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 협정(Rosen-西 Convention)을 맺었다. 러시아가 로젠-니시 협정에서 조선에 관한 일본의 요구에 크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요동점령으로 인해 러시아로 향하게 된 열강의 적개심을 달래 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0923)한정숙, 앞의 글, 233쪽.

 러시아는 로젠-니시 협정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경제적 우위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군사교관까지 철수시킨 상황에서는 일본에게 외교적 우위까지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0924)최문형,<제국주의열강의 한국침투와 그 영향>(≪한국근대사회와 제국주의≫, 삼지원, 1985), 104쪽.
박희호, 앞의 글, 49쪽.

 러시아가 한국에서 일단 후퇴는 결정하였지만 그것이 곧 완전한 포기는 아니었다.0925)전정해,<대한제국초 한로관계와 한로은행>(≪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하, 논총간행위원회, 1992), 193쪽. 다만 조선을 일본의 세력 범위속에 남겨두고, 러시아는 만주 확보에 치중하려는 對滿 집중정책으로 조선을 만주 방위를 위한 완충지대로서의 중요성밖에 인정치 않으려는 것이었다.

 병권과 재정권을 외세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 자주독립의 첫 걸음이라고 주장한 독립협회에서 그들 최초의 정부에 대한 국민여론의 반영이 성공됨으로써 계획의 첫 단계는 무난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구국운동 선언에서 밝혀진 문제점들의 개혁을 위하여 계속해서 정부에 대한 투쟁을 벌였다.

 한편 러시아의 군사교관을 해고시키고 이를 계기로 외국인 고용을 금지하는 원칙을 세우게 했으며 이 원칙에 따라 황실 보호를 구실로 고용한 외인부대를 몰아냈다.

 고종은 항상 궁정 호위에 불안을 느껴오다 1898년 8월 미국인 법부고문관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와 張鳳煥을 상해에 파견하여 외국인을 모집하여 오게 하였다. 그레이트하우스와 장봉환은 상해에서 1인당 월급 70원과 왕복 여비를 지불키로 하여 우선 1년 계약으로 외국인 30명을 고용하여 이들을 데리고 9월 15일 입경하였다.

 협회는 이를 알고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협회는 9월 17일 협회 사무소에서 외인부대 창설 반대를 결의하고 총대위원들을 선출하여 정부 각 부처에 보내어 외국 용병들의 즉각 철환을 요청하는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또한 협회는 이튿날인 9월 18일 외부 문앞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황실 호위 외인부대를 즉각 추방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또한≪독립신문≫도 이 사실을 규탄하였다.

 협회의 반대운동에 부딪혀 정부 대신들도 외인부대의 철환을 주청하게 되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고종은 할 수 없이 협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외인 부대의 철환을 승인하였다. 정부는 마침내 1898년 9월 24일 이 외국인 용병들에게 1년의 고용비 2만 5천 2백 원을 지불하여 그들을 철환시키었다.0926)愼鏞廈, 앞의 책(1976), 337∼341쪽.
―――,≪독립협회와 개화운동≫(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4), 152∼154쪽.
외국인들은 9월 27일 인천을 출발하였다.

 이같이 외국인 용병을 고용하여 황실을 외국인의 수중에 두려던 기도는 독립협회의 국권수호운동에 의해 저지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