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2. 국권수호 및 민권보장
  • 2) 국토·국익수호운동

2) 국토·국익수호운동

 독립협회는 國權守護運動과 더불어 國土守護運動을 전개하였다.

 광무 원년(1897) 8월 러시아는 석탄고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부산 絶影島의 조차를 요구한 바 있었다. 1898년 1월에는 그 목적을 관철하고자 군함 시우치호를 부산에 입항시키고 수병을 절영도에 상륙시켜 그들의 결의를 과시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1898년 2월 25일 친러파 閔種黙을 외부대신 서리로 임명하고, 의정부 회의를 거치지 않고 절영도 양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나 곧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치고 말았다. 외세의 농간으로 정부의 존재성이 무시된 이 같은 처사에 대하여 의정부 참정·찬정은 2월 27일에 그 불법성을 지적하고 총사직 상소를 올렸다. 독립협회도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가 국토의 조차에 반대한 이유는, 어느 나라에 국토를 조차해 줄 경우 다른 나라가 다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 분쟁이 야기될 가능성이 있으며 청국과 마찬가지로 국토가 삼분오열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0927)≪독립신문≫, 1899년 6월 23일, 논설.

 독립협회는 2월 27일 독립관에서 通常會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반대하는 격렬한 성토를 하였다. 이날 통상회에서 신임 提議인 鄭喬가 외부대신에게 절영도 석탄고 기지의 조차 요구에 대한 전말을 묻는 질의서를 보낼 것을 제안하자, 협회는 이를 받아들여 그 다음 날인 2월 28일 외부대신 서리 민종묵에게 공한을 발송하여 절영도 조차의 근거와 조차 경과, 조차의 항구성 여부 및 의정부 회의를 거치지 않은 외부의 독단 여부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0928)鄭 喬,≪大韓季年史≫上, 176∼177쪽.
愼鏞廈, 앞의 책(1976), 289쪽.

 이에 대해 민종묵은 일본에 석탄고를 빌려주었던 전례에 따라 인준하였을 따름이라고 답변서를 보내 사건을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러시아에 대한 절영도 조차를 독립협회뿐만 아니라 의정부내에서도 반대하고 규탄하자 민종묵은 결국 3월 1일 탁지부대신 겸 외부대신 서리직의 사임을 청하였으며 고종은 3월 2일 민종묵을 탁지부대신 겸 외부대신 서리에서 면직시키었다. 그리하여 절영도 조차는 저지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공사관과 친러파들은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여 3월 3일 사태를 역전시켰다. 고종은 趙秉鎬를 탁지부대신으로 하고 다시 민종묵을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절영도 조차를 인허해 주려 하였다. 정부 각 대신이 글을 올려 반대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저지시키기 위해서는 친러파 관료와 그 뒤에 있는 러시아 세력과 직접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0929)愼鏞廈, 위의 책, 290∼291쪽 참조.

 한편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3일의 특별회에서 일본에 조차된 절영도 석탄고 기지의 반환 문제를 거론하였다. 한 회원은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이권요구를 막기 위하여 일본에 허용된 석탄고의 회수를 독립협회가 정부에 요구할 것을 동의하였다. 윤치호는 먼저 이권에 관련된 모든 구체적 내용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을 지명하여 이 위원의 조사 보고를 들은 다음 독립협회가 공한을 발송하자고 수정안을 제안하여 통과되었다.0930)尹致昊,≪尹致昊日記≫ 5 , 1898년 3월 3일.

 독립협회는 3월 6일 독립관에서 조사위원회의 보고를 듣고 절영도의 일본 석탄고 기지의 철거를 요구하는 공한을 외부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기초위원으로 이상재·정 교·이건호를 선출하였다.0931)鄭 喬,≪大韓季年史≫上, 178쪽.

 독립협회는 3월 7일 러시아의 요구에 있어 선례가 된 일본의 절영도 석탄고 기지의 철거, 한러은행의 폐쇄를 포함한 3개의 공한을 외부에 발송했다.0932)유영렬,<독립협회의 민권운동전개과정>(≪史叢≫17·18합집, 1973), 112∼113쪽. 일본의 절영도 석탄고 기지의 철거 공한에서 독립협회는 “지금 국토 조차의 근원은 일본 석탄고에서 비롯되었으니, 일본 석탄고를 철거하면 안으로는 국권이 공고하여 질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1898년 3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반러투쟁 그리고 러시아의 만주 집중정책으로의 전환으로 인하여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의 철수와 함께 절영도 석탄고 기지 조차 요구의 철회를 통고하여 왔다. 이리하여 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시아는 절영도의 조차에 실패하게 되자, 스페이에르공사는 다시 군항의 확보를 위해 목포와 鎭南浦의 매도를 요구해 왔다.

 1898년 5월 7일에 신임 러시아공사 마튜닌이 군사기지의 설치를 위하여 대한제국 외부에 외교문서를 보내 왔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정부가 1898년 1월 9일자 및 1월 15일자의 문서로 목포와 진남포 조계 밖 사방 10리 안에 있는 모든 섬들을 러시아가 매수함에 동의했었다고 지적하고 스트렐비츠(Strelbitzky)장군을 파견하여 이의 매수를 위한 현지 조사를 실시하니 대한제국정부의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0933)≪俄案≫ 1, 문서번호 1053, 1898년 5월 7일, 木浦의 孤下島地段을 露領事館基址로 購買하는 데 對한 地方官에 協助訓飭 要請.

 이에 대하여 조병직은 조계 밖의 도서지역에 대한 매매조치는 전례와 근거가 없다 하여 그의 요청을 거절하였으나, 러시아와 조정내의 친러파의 압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목포와 진남포의 10리 이내를 택하여 조차문제를 논의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정부에 5월 16일과 22일에 공한을 발송하여, 러시아공사 마튜닌의 요구는 물론 조병직의 수정안까지 모두 반대하면서 “한 조각의 국토라도 타국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운동을 벌여 독립협회의 사상적 기반인 자주국권 사상에 입각한 입장을 강력히 내세워 러시아의 토지매수 요구를 좌절시켰다.0934)鄭 喬,≪大韓季年史≫ 上, 191∼192쪽.

 이외에도 독립협회는 외국 조계지의 각국 상인들이 인근지역을 매입하여 우리 농민들이 경작할 토지와 생업의 터전을 잃고 떠나야 하는 사태에 대하여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등 국토수호를 위한 일련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國土守護運動과 더불어 國益守護運動을 전개했다.

 독립협회의 민족주의의 특징은 국가자주권과 관련하여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의 주장은 나라의 자주독립은 자주경제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하며, 자국의 자원과 산업은 자기가 개발하여야만 자주독립을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원과 국토와 경제적 이권을 외국에 양도하는 것은 자주독립의 일부를 떼어 주는 것이라고 보고 이를 반대하였다.0935)愼鏞廈, 앞의 책(1976), 150∼151쪽.

 그런데 독립협회가 모든 열강의 제국주의적 이권쟁탈에 대해 일관되게 효과적으로 투쟁하는 형태를 취하지는 못했다. 열강의 이권쟁탈에 대한 독립협회의 투쟁 가운데에서 가장 성과를 올린 것은 러시아에 대한 투쟁이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 설립 당시에는 열강, 특히 러시아와 미국의 이권 침투에 대하여 직접적 반응을 거의 나타내지 않고, 다만 국제 신의 및 외국과의 조약의 존중 등을 강조하거나 일반론으로서의 이권 양도의 부당성을 거론하는 데에 그쳤다.≪독립신문≫의 1896년 7월 2일자 논설에서는 이권양도의 결과로서의 철도부설을 문명의 진보, 개화의 실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1896년 11월 5일자 논설에서 러시아에 대한 두만강변의 벌목 허가가 조선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봐도≪독립신문≫이 처음부터 일관성 있게 이권 반대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0936)金珉煥,≪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나남, 1988), 365쪽.

 이같이 협회는 아관파천기에 미·러에 의한 이권침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환궁후 러시아의 침략이 활발해지자, 이권의 침해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독립협회는 이 때에 러시아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할 수 있는 가장 일차적인 적대세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러시아의 침략에는 극히 주의하였다.

 러시아측은 절영도 조차의 요구와 함께 뒤이어 한국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 자본에 의해 한러은행을 설립하였다. 스페이에르 러시아공사는 탁지부고문 알렉세예프로 하여금 전국의 재정을 관할시켜 경제적 이권을 침탈하고자 자본금 50만 루불로 1898년 3월 1일 서울에 한러은행 서울지점을 개설하였다. 이 은행은 본점을 페테르부르그(St. Petersburg)에 두고 있었다.

 은행의 업무로는 예금·대부·송금·환전 등 일반업무 외에 한국의 관세·국고금 취급·화폐 발행 등을 취급하려 하였다.0937)전정해, 앞의 글, 196쪽.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6일의 일본 석탄고 기지 조사위원회의 보고를 들은 다음 李建鎬의 제안으로 한러은행 문제를 토론하였다.

 독립협회는 3월 7일 특별회를 열고 “만약 조선은행과 한성은행 두 곳의 은화와 탁지부 현존의 은을 한러은행에 옮겨 두고 차차 각 府에 한러은행 支所까지 설치하여 전국 납세의 수입과 수출을 오로지 관장시킨다면 이는 전국 재정권을 타국 사람에 양여하는 것이 되어 탁지부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따라서 독립자주의 권리도 스스로 잃게 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해명을 바란다”0938)≪民會實記≫, 광무 2년 음 2월 15일.
鄭 喬,≪大韓季年史≫ 上, 181쪽.
는 공한을 작성하여 탁지부대신 趙秉鎬에게 발송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공한에 대해 탁지부는 확실한 답변을 회피하였다.0939)愼鏞廈, 앞의 책(1976), 293∼296쪽.

 그러다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항쟁과 러시아의 극동정책의 변화로 인하여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이 철수되고 한러은행도 곧 폐쇄되었다.

 광산 이권은 열강이 차지한 이권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특히 관심의 대상은 금광 이권에 집중되었다. 열강은 한국과 광산 특허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의 경우만 鑛地를 선정하고 계약문을 작성하였지 다른 열강은 모두 우선 광산 채굴 특허권만 확보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뒤에 광지를 선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0940)이배용,<열강의 이권침탈과 조선의 대응>(≪韓國史 市民講座≫7, 一潮閣, 1990), 105쪽.

 1898년 5월초에 프랑스공사 플랑시(C. V. de Plancy)가 정부에 공문을 보내어, 1896년 5월 31일 외부대신 이완용으로부터 양여를 약속받은 평양부근을 비롯한 3곳의 광산채굴지를 속히 확정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독립협회는 이 사실을 알고 “금·은·동·철 등의 광산은 우리 나라에 있는 토지이니 우리 인민이 채취하여 스스로 부강책을 기해야 한다”고 정부에 강력히 건의하여 프랑스의 이권 요구를 중지시켰다.0941)鄭 喬,≪大韓季年史≫ 上, 192∼193쪽.

 이 무렵에 또한 독일은 대한제국정부가 1897년 3월에 약속한 독일 世昌洋行에의 金城 堂峴金鑛의 채굴권을 바로 허가하지 않는 데에 불만을 표시하고, 결국 6월 29일 독일 영사관에서 영사 클리인(F. Krien, 口麟)이 외부대신 서리를 모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협회는 일개 외국 영사가 남의 나라 외부대신 서리에게 자기 의사에 따르지 않는다고 모욕한 것을 국가에 대한 모독이라고 간주하고 7월 4일 趙漢禹 등을 총대위원으로 선정하여 정부에 이를 항의하는 공한을 발송하였다. 협회는 이 공한에서 독일영사의 행위가 만국공법에 규정된 바의 주재국 관원을 능멸한 것인즉, 그 나라를 능욕한 것으로 인책이나 추방의 대상이니, 國體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7월 1일과 2일 양일간에 걸쳐 종로에서 개최되어 독일 영사의 무례를 규탄하였다.

 독일영사 클리인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움직임에 매우 당황하였으며, 결국 외부대신 서리를 방문하고 공식으로 사과하여 공식 사죄문을 의정부에 제출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후 고종은 그 전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결국 금성 당현의 금광 이권을 독일 세창양행에게 허가하였다.0942)愼鏞廈, 앞의 책(1976), 328∼329쪽.

 독립협회의 이 같은 완강한 국익수호운동으로 열강의 더 이상의 이권 침탈은 일단 저지되었다. 그리고 협회는 1898년 9월 4일 통상회를 개최하여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조사위원을 선정하여 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윤치호와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국제적 배경인 서구인들과 일본의 지지를 상실할 것을 우려하여 이권수호투쟁에 임하는 태도가 소극적이었다.0943)윤병석, 앞의 글, 213쪽.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나타났으나 급진파의 견해가 채택되어 鄭 喬가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9월 11일 통상회에서 조사위원의 조사 결과를 보고 받았다. 독립협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이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여 모든 이권 침탈을 즉각 중지시키기로 결의하고, 이권 양여에 가담한 전임회장 이완용을 독립협회에서 제명하였다.0944)愼鏞廈, 앞의 책(1976), 329∼331쪽. 그런데 협회의 운동이 이후 참정개혁운동으로 나가게 됨에 따라 이 문제는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였다.

 한편 외세에 대한 이권 양여 반대 논의가 일관적으로 단순하게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현실론과 이상론의 이중 갈등속에서 전개되었다. 즉 첫째는 무계획적인 근대시설 개발로 인한 폐단을 지적하며 시기상조론이 대두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근대시설의 필요성과 조속한 개발을 주장하는 측이 있었고, 둘째로는 이권 양여 절대 불가론과 일부에서는 이권 양여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부정의 논리는 반외세·친외세의 대립적 성향으로 나타날 때도 있었지만 근대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인식과 방법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0945)이배용, 앞의 글, 120∼121쪽.

 이상과 같이 독립협회는 민중을 배경으로 하여 열강의 인사권·재정권·군사권의 간섭을 배격하는 국권수호운동, 열강의 토지조차와 토지매도의 요구를 저지하는 국토수호운동, 그리고 열강의 광산채굴권을 비롯한 각종 이권 요구에 대항하는 국익수호운동 등 자주국권운동을 자유민권운동과 병행하여 전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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