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2. 국권수호 및 민권보장
  • 3) 민권보장운동

3) 민권보장운동

 독립협회는 러시아세력의 철수를 계기로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약화됨에 따라 이어 정부를 규탄하면서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국가라고 하는 것은 국민이 모여서 성립된 것이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가 자주독립하여 부강하려면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 개개인이 모두 자주독립하여 부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에게 권리를 주어 그 민권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민권이 신장되어야 국가가 부강해지고 따라서 君權도 강대해진다고 보고 민권의 신장이 군권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국가 자주독립의 기초를 자유민권의 신장에 둔 것은 독립협회 사회사상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은 19세기 후반 이후부터 성장해 온 국내 사상의 조류를 계승하면서 서구 시민사회의 자연법사상·계몽사상·사회진화론의 근대사상을 적극 수용하는 입장에서 형성되었다.0946)姜英心,<독립협회의 신분제 잔재 철폐운동에 관한 고찰>(≪梨大史苑≫26, 1992), 154∼155쪽.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은 국민평등권론으로 제기되었다. 독립협회는 天賦人權說에 의한 인간평등권을 주장하고, 나아가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평등권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국민평등권론과 더불어 국민자유권론을 제기하였다. 독립협회는 사람은 누구나 생명·재산·자유 등 하늘이 부여한 양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천부인권설에 근거하여 국민자유권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국민의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를 지배층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죄형 법률주의·증거 제일주의·영장제도·공개 재판권·피고 변호권 등 근대적 법률과 공정한 재판으로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려 하였다.

 요컨대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은 국민의 평등과 자유 및 국민주권의 확립을 통하여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국권을 수호하며, 나아가 근대 의회민주정치를 구현하여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주주의사상이었다.0947)柳永烈,<독립협회의 성격>(≪한국사연구≫73, 1991), 66∼70쪽.
愼鏞廈, 앞의 책(1976), 175∼204쪽.

 독립협회는 이 같은 자유민권의 민주주의사상을 실천운동으로 전개하였다.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운동은 민권보장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민권보장운동은 처음에는 국민의 신체 자유권과 재산권의 보장운동으로 시작해서 점차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권의 보장 나아가서는 정치적 참정의 요구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898년 민권신장에 대한 독립협회의 요구는 갑오개혁의 성과를 정착시키고, 나아가 전진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그것을 역행시키고자 하는 봉건반동과의 대결이었다.0948)姜在彦,≪近代朝鮮の變革思想≫(日本評論社, 1973), 180쪽.

 1898년 3월 15일 侍從院 시종 金永準의 무고로 독립협회 회원인 李源兢·呂圭亨·池錫永·安沂中 등을 갑자기 구속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협회는 국민의 생명의 자유권 보장을 위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협회는 3월 20일 警務使 金在豊에게 항의 공한을 발송하였다. 공한에서, 사람을 체포할 때에는 체포 24시간내에 재판소로 押交하도록 되어 있는데, 근일 경무청이 사람을 체포하여 여러 날 구금하고도 재판소로 압교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불법이며, 또 협회회원이 체포된 이유가 무엇인지 답변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체포된 회원들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재판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10년 유배’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협회는 3월 26일 법부대신 李裕寅에게 항의 공한을 보내어 재판과 법률에 의한 신체의 자유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해답이 없자 3월 27일에 열린 독립협회의 제24회 토론회에서 “민·국을 안보하려면 일정한 법을 긴급히 준행하여야 함”을 주제로 하여 인권 옹호를 강력히 주장하고 정부의 횡포를 규탄하였다. 정부는 독립협회와 민중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6월 29일 4명의 회원을 석방하였다.0949)鄭 喬,≪大韓季年史≫上, 185∼187쪽.
愼鏞廈, 앞의 책(1976), 311∼31쪽.

 독립협회가 생명의 자유권과 함께 벌인 투쟁 중 중요한 다른 하나는 재산권 보호를 위한 투쟁이었다. 협회는 양반이나 양반관료가 그들의 신분적 특권을 이용해 평민을 억압하는 사례를 비판하고 아울러 투쟁을 전개하였다.

 1898년 5월에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장 李裕寅이 독립협회 회원인 洪在旭이란 사람의 집을 빼앗으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협회는 5월 30일 고등재판소 앞 果廛都家에서 특별회를 개최하고 3명의 대표를 재판소에 보내 공개재판과 방청의 허락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수락되자 회원들이 재판소에 몰려가 재판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판사 馬駿榮이 이유인에게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시키는 것을 보고 회원들은 일제히 재판소에서 퇴장하였다. 5월 31일 다시 회의를 열어 공한을 법부에 발송하여 재판의 공명정대한 시행과 국가의 법률적 적용은 신분·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해야 함을 항의하였다. 그 뒤 법부의 반응이 없자 6월 6일 협회는 판사 마준영을 고등재판소에 피고로 고발하여 재판을 청원하고, 마준영의 법률 위반을 낱낱이 지적한 청원서를 발송하였다. 또한 협회의 대표들이 고등재판소로 가서 이유인을 면담하고 항의하였다. 궁지에 몰린 이유인은 자기의 불법 처사를 사과함에 이르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6월 10일 이유인을 면직시키었다.

 독립협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법부대신이 평민의 재산을 침탈하는 데 동조한 판사 마준영의 파면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고등재판소에 발송하여, 정부로 하여금 드디어 6월 26일자로 마준영을 면직시키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1898년 6월에는 경무사 申奭熙의 불법 처사가 드러나 협회에서 항의하였다. 경무사 신석희는 私鑄錢 기계를 설치했다는 혐의로 崔鶴來라는 사람을 구속하고 그의 가산을 몰수하였다가 무죄가 밝혀지자 그를 석방하였으나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듣고 협회는 6월 20일 회의를 열어 경무청이 무슨 법으로 개인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공한을 발송하여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신석희는 사주전을 하는 자에 대해서는 기계와 가산을 몰수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온 선례인데, 이를 따랐을 뿐이라고 하였다. 협회는 6월 23일 內部大臣 朴定陽에게 공한을 보내 新法으로 보장된 재산권이 폐지된 舊法에 의해서 침해당하는 일은 명백히 나라의 법을 위반한 것이니 시정하라고 요청하였다. 정부는 강력한 협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협회의 요청대로 최학래의 재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7월 8일 신석희도 경무사에서 해임되었다.0950)鄭 喬,≪大韓季年史≫ 上, 197∼201쪽.
愼鏞廈, 앞의 책(1976), 313∼316쪽.

 이같이 독립협회는 평민들이 권세있는 양반관료들에게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을 침해당하는 것에 투쟁하였다. 협회는 죄인에게까지도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협회가 생명의 자유권사상의 실현을 위해 투쟁한 전형적인 예의 하나가 金鴻陸 毒茶事件에 대한 것이다.

 1898년 9월 11일 전 러시아공사관 통역 김홍륙이 고종의 커피잔에 아편을 넣어 독살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주범인 김홍륙은 국왕의 러시아어 통역으로서 고종의 측근에서 러시아세력을 배경으로 온갖 전횡을 자행하다가 8월 25일 해임되면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는 궁중의 요리사 孔洪植으로 하여금 아편을 넣은 커피를 국왕에게 바치게 하였지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협회는 만민공동회까지 개최하면서 그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그런데 범인이 재판도 없이 종신유배에 처해지고, 그 관련자가 고문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독립협회는 비록 김홍륙이라 할지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어야 하고 관련자의 고문도 용납될 수 없다 하여, 관계 법관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공개재판을 요구하였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하여 9월 23일 중추원 회의가 열렸을 때 徐相雨 등이 신법률을 개정하여 孥戮法과 連坐法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노륙법은 극악한 죄인에게 참형을 적용시키는 법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되고 絞刑만 적용되고 있었다. 죄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처벌하는 연좌법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그런데 이 두 법의 부활을 주장하자 법부대신 겸 중추원의장 申箕善 이하 議官 34명이 동조하여 정부에 정식으로 이를 요구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서상우를 疏頭로 하여 상소까지 하였다.

 전통적인 악습인 노륙법과 연좌법을 부활시키자는 것은 단지 형법제도의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개혁의 방향에 역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9월 25일 협회는 통상회를 열어 악형으로 고문한 사실과 노륙법과 연좌법의 부활 기도는 인권과 재산권을 침해하려는 것이며, 신법률을 개악하는 것이라 의결하고, 이에 대한 진상조사와 반대운동을 전개키로 결정하였다.

 9월 26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협회는 중추원의장 신기선에게 공한을 보내 疏請에 서명한 의관과 의장의 사직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신기선이 회답하기를 갑오개혁 이후 역적을 다루는 데 교수형만 적용시키니 逆變이 그치지 않으니 노륙법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고, 또 대신의 진퇴는 民會에서 말할 바가 못된다고 하였다.0951)≪매일신문≫, 1898년 9월 30일, 논설.

 10월 2일 협회는 중추원 앞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대표를 뽑아 신기선에게 보내 또 다시 두 법의 부활의 부당성을 논하고 그의 사직을 권고하였다. 신기선이 불응하는 태도를 보이자 협회는 신기선을 고등재판소에 고발하였다. 고등재판소에서 고발장을 접수하자 협회에 대답하되 법부대신과 협판은 勅任官이므로 그의 구금에는 먼저 법부대신이 황제에게 상주한 후에야 구금할 수 있는데 법부대신 신기선 자신이 피고이므로 상주할 사람이 없어 기술적으로 이를 처리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6일 협회는 고등재판소 앞에서 다시 민중대회를 열어 황제에게 상소하기로 결의하고 7일 상소하였다. 황제는 먼저 신기선에게 감봉처분을 내린 뒤 법률이란 정부에서 때에 맞추어 적절히 제정하는 것이니 野에서 함부로 논의할 바가 못된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와 같은 비답을 받아 보고 협회 회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0952)鄭 喬,≪大韓季年史≫ 上, 240∼247쪽.
愼鏞廈, 앞의 책(1976), 341∼347쪽.

 이 무렵에 독차사건에 관련된 공홍식이 옥중에서 살해된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독립협회는 법부대신 신기선에게 책임을 물어 강력히 그의 인책 사임을 요구하였다. 그후 탄핵운동이 그 범위가 확대되어, 협회는 신기선을 포함한 7대신의 불법을 지적하고 그 파면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운동이 성공하여 10월 10일에서 12일에 걸쳐 7대신이 물러나고 새로운 대신이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노륙법과 연좌법의 부활 기도도 사라졌다.

 독립협회는 이상과 같이 자유민권 사상의 구현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여 경우에 따라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나 완벽하게 모든 국민의 민권이 신장되고 보장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민권이 국권에 종속되고 국민주권 사상의 불투명이라는 한계도 간과할 수는 없다.

 독립협회의 민권론은 민권 자체의 신장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자주독립의 구현이라는 민족주의의 과제를 달성하려는 목표를 매개로 민권신장의 정당화 논거를 확보하였다는 데 큰 특징이 있다.0953)김영작,≪한말내셔널리즘연구≫(청계연구소, 1989), 351쪽. 다시 말하면 민권이 독립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인식되었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독립협회 활동 단계에서 전근대사회의 신분적 질곡을 공식적으로나마 완전히 부정하고 법치에 의한 만민평등사상, 민권보장을 주장하고 계몽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자유민권사상의 토착화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金信在>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