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3. 참정권운동과 개혁의 추진
  • 1) 수구파내각 퇴진운동

1) 수구파내각 퇴진운동

 독립협회의 국권수호운동·민권운동·개혁운동에 대하여 친러수구파정부와 황제는 완강하게 저항했을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국권·국익을 훼손하는 시대착오적 정책을 추구하였다.

 우선 1898년 9월의 상황을 보면, 친러수구파와 고종은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의 자문을 받으면서 외국에서 외국인 장교와 퇴역군인들을 불러와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황제와 황실 호위의 나라 운명과 직결된 중대 임무를 맡기려 하였다.0954)≪駐韓日本公使館記錄≫ 8 (國史編纂委員會, 1989),<機密本省往信>, 1898년 10월 5일, 機密 第39號, 歐美人巡査 傭入과 獨立協會의 排斥運動의 件.

 이에 중국 상해에 파견된 張鳳煥과 그레이트하우스는 상해에서 외국인 퇴역군인 30명(영국인 9명, 미국인 9명, 독일인 6명, 프랑스인 5명, 러시아인 2명)을 1인당 월급 70원과 왕복여비를 지불하기로 하고 우선 1년 계약으로 고용하여 데리고 9월 15일 서울로 돌아왔다.0955)鄭 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57), 236∼238쪽.
The Independent, September 7th, 1898, Local Items.

 당시 전제군주제의 대한제국에서 전제권을 가진 황제의 호위를 열강 국적의 외인부대에 맡기는 것은 전제군주의 촛불을 강풍 앞에 맡기는 것과 같이 지극히 위험한 국권·국익 훼손의 정책이었다.

 독립협회는 이를 알고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9월 17일 독립협회 사무소에서 집회를 열고 ‘황실 호위 외인부대’ 창설 반대를 결의했으며, 총대위원으로 군부에는 鄭恒謨 등 3인, 외부에는 趙漢禹 등 3인, 궁내부에는 李承晩 등 3인, 경무청에는 崔廷德 등 3인을 파견하여 외국인 용병들의 즉각 철환을 요청하는 항의문을 전달하였다.0956)鄭 喬,≪大韓季年史≫上, 236쪽.

 ≪독립신문≫은 이에 앞서 외신을 통해서 이 소식을 듣고 놀래어<믿지 못할 일>이라는 논설을 게재했는데, 그 요지는 ①외국인 30명을 고용하여 황실을 보호한다는 것은 국권을 해치는 큰 수치이며, ②이것은 황제와 정부가 친위대의 대한제국 군인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들이 충군 애국의 마음도 없고 황실 호위의 능력도 없음을 세계에 알리는 처사이고, ③정부가 외국 민간인의 행태도 대한의 법률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서양 퇴역군인들을 고용하여 황실 호위의 대권리를 맡겼다가 잘못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들어 통렬하게 비판하고, “이것은 豺狼을 사오십 마리 대궐내에 두는 것 보다 더 위태하다”0957)≪독립신문≫, 1898년 9월 8일,<믿지 못할 일>.고 통탄하였다.

 독립협회는 9월 18일 정부의 구체적인 답변이 없자, 外部의 문 앞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6가지 이유를 들어 황실 호위 외인부대를 즉각 추방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 6가지 이유는 ①자주독립국인 대한제국의 황실에는 외인부대의 호위가 불필요하고, ②외인부대의 창설은 대한제국 군인의 반발을 야기시킬 것이며, ③외인부대의 창설은 황실과 국민을 이간시키고, ④황제와 황실을 외인부대가 호위하면 대한제국의 자주국권을 위협하고 열강과의 국제분쟁을 야기시킬 것이며, ⑤5개국 국적을 가진 외인부대를 대한제국정부가 통제하지 못할 것이고, ⑥외인부대 창설이 바로 황실의 국민과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해석될 것이므로, 외인부대의 즉각 철환을 강경하게 요구한다는 것이었다.0958)The Independent, September 20th, 1898, No Foreign Guard.

 독립협회는 9월 19일에도 외부의 문 앞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황실 호위 외인부대의 즉각 철환에 대한 황제의 결단을 요구하였다.0959)The Independent, September 22nd, 1898, The Foreign Guard.

 독립협회의 반대운동을 도저히 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수구파정부도 마침내 외인부대의 철환을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황제는 할 수 없이 독립협회의 시위와 압력에 굴복하여 9월 24일 외국인 용병들에게 1년치 고용비 25,200원을 지불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었다.0960)外部 編,≪度支部來去案≫ (奎 17792) 제16책, 照會 第76號, 광무 2년 9월 24일.
The Independent, September 29th, 1898, Local Items.

 외국인 용병을 고용하여 황실 호위 외인부대를 창설함으로써 전제권을 가진 황제와 황실을 외국인의 수중에 둘 뻔한 이 위험한 정책은 독립협회의 완강한 운동에 의해 마침내 저지되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쟁취한 대성과의 하나였다.

 이 무렵 러시아공사관의 전 통역이며 친러파 정객인 金鴻陸이 그의 직책에서의 추방과 유배에 원한을 품고, 부하들을 시켜 황제의 찻잔에 아편을 넣은 반역사건이 발생하였다.0961)≪駐韓英國領事報告≫(Reports and Communications from the British Consul in Seoul), 機密報告 제98호, 1898년 10월 7일. 이른바 ‘김홍륙 毒茶事件’이라는 것이다.

 독립협회는 9월 13일 종로에서 특별대회를 열고 이 반역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였다.0962)鄭 喬,≪大韓季年史≫上, 233∼234쪽.

 그런데 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경무사 閔泳綺는 죄인들을 심문할 때 악형을 남용하여 다리가 부러진 자가 나오고 부녀자까지 고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이 9월 23일 재개원한 中樞院은 개회 벽두에 徐相雨 등의 소청으로 신법률을 재개정하여 갑오경장 때 폐지된 孥戮法과 連坐法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했으며,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申箕善 등 34인의 의관이 정부에 이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신기선 등은 작당해서 9월 24일 서상우를 疏頭로 하여 노륙법 및 연좌법의 부활을 요구하는 상소까지 올리었다.0963)≪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8월 9일, 中樞院一等議官徐相雨等疏.

 독립협회는 9월 25일의 통상회에서 법부의 죄인 고문과 중추원의 노륙법 및 연좌법의 부활 시도가 국민의 생명(신체)과 재산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신법률을 개악하는 것이라고 의결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협회는 민권으로서의 신체·생명의 자유권 신장을 위해 죄형법정주의·죄형개인주의·고문제도의 폐지·공개재판주의·판결증거주의를 주장해 왔으므로 비록 김홍륙이라 할지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어야 하며, 연루자들을 고문함은 용납할 수 없다고 결의하였다. 독립협회는 총대위원들을 선정하여 한편으로 경무청에 파견해서 죄인의 고문사건을 엄중히 항의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추원에 공한을 보내어 중추원 의장 신기선의 사임을 권고하였다.0964)≪皇城新聞≫, 1898년 9월 29일, 別報(獨立協會에서 中樞院에 送한 편지). 신기선은 이에 대해 사임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노륙법 및 연좌법의 부활이 필요함을 주장하면서 이의 부활을 추진할 의지를 명백히 하였다.0965)≪매일신문≫, 1898년 9월 30일, 논설.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문제를 둘러싸고, 중추원 의장 신기선 및 그를 지지하는 수구세력과 독립협회의 개혁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1일 중추원 문 앞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신기선의 사임과 고등재판소에의 고발을 의결함과 동시에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 시도를 규탄하였다. 독립협회는 10월 2일에도 고등재판소 문 앞에 철야하여 민중대회를 열고 신기선 고발장을 접수시켰으며, 10월 3일에는 南宮檍 등을 총대위원으로 의정부 의정에게 파견하여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의 파면을 상주토록 요청하였다.0966)≪皇城新聞≫, 1898년 10월 5일, 別報.

 한편 都約所에서는 수구파 유생들이 친러수구파정부와 내통하면서 집단으로 상소를 올리어 신기선을 지지하고, 노륙법 및 연좌법의 부활을 주장했으며, 독립협회의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 저지운동을 규탄하였다.0967)≪독립신문≫, 1898년 10월 5일, 잡보<도약소 상소>.

 독립협회는 친러수구파 정부대신들이 수구파 유생들과 연합해서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을 기어이 관철하려 하자 더욱 강경한 저지운동을 연일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10월 6일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거듭 민중대회를 열고, 의정부 의정과 참정까지 신기선 등을 두호하기만 한다면 황제에게 향해 직접 상소운동을 전개하는 길밖에 없다고 의결했으며, 皇國中央總商會와 연대하여 聯呈上疏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0968)The Independent, October 8th, 1898, The Memorial of the Independence Club.

 독립협회와 황국중앙총상회 회원과 서울 시민 1만여 명은 10월 7일 仁化門 앞에 운집하여 대회를 열고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었다. 독립협회는 이 상소에서 강경한 논조로 친러수구파정부와 중추원의 고문사건과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운동을 규탄하고, 이것이 백성의 민권을 억압하기 위해 시도되는 것임을 지적했으며,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 시도의 중심인물인 신기선의 파면을 요청하였다.0969)≪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8월 22일,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

 그러나 황제는 신기선을 감봉 처분만 한 다음, 파면할 뜻이 없음을 밝혔을 뿐 아니라, 노륙법 및 연좌법의 부활문제는 정부에서 마땅한 것을 제정하는 것이니 백성들이 아래에서 함부로 의논할 일이 아니라고 신기선과 친러수구파정부를 옹호하는 비답을 내리었다.0970)≪皇城新聞≫, 1898년 10월 8일, 別報.

 황제의 비답은 독립협회 회원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이제는 친러수구파정부와 황제가 합력하여 노륙법과 연좌법을 부활시키려 함이 명백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이 사태를 매우 중시하였다. 국민의 요청인 대개혁을 단행하여 민권을 신장시키면서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해서 외침을 막아야 할 시기에 도리어 갑오경장 때 폐지된 악법인 노륙법과 연좌법을 부활시켜 민권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친러수구파 정부대신들의 시대착오적 시도를 독립협회가 묵과해서는 나라가 개혁은커녕 시대착오적인 구체제로의 복구에 귀결되어 도탄에 빠질 것이라고 의논하였다.

 독립협회는 황제의 비답을 놓고 그 동안의 친러수구파정부의 동태를 검토한 끝에 독립협회가 추구하는 자주독립 강화, 국정개혁, 의회설립, 민권신장을 위해서는 먼저 친러수구파정부와 그 대신들을 퇴진시키고 새로이 개혁파 대신들로 구성된 개혁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이에 인화문 앞에 모인 대규모 민중대회를 해산시키지 않고, 이것을 친러수구파 7대신 규탄과 해임에 의한 수구파정부의 퇴진과 새로운 개혁파정부로의 정권교체운동으로 발전시키로 결정하였다.

 독립협회는 10월 7일 밤 인화문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철야시위를 계속한 다음 10월 8일에는 南宮檍과 韓致愈를 製疏위원으로 선정하여 수구파정부 7대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제2차 상소를 작성하여 올리게 하였다. 독립협회는 이 제2차 상소에서 ①현 정부의 재상과 대신들은 그 직을 담당할만한 인물들이 못되어 법률과 규칙이 있어도 기강이 다 문란해졌을 뿐 아니라, ②옛날과 같이 황제에게는 아첨만 하면서 총명을 가리우고 나라와 백성들을 학대하여 병들게 해서 백성들의 원망이 맺혀 있으므로, ③신기선·李寅祐·沈舜澤·尹容善·李載純·沈相薰·민영기 등 7대신의 탐학을 낱낱이 들어 규탄하면서 그들의 파면을 요청하였다.0971)≪매일신문≫, 1898년 10월 10일,<독립협회 재소 소본>.

 당시 정부에 실제 임명되어 있던 대신들이 이들 7대신이었으므로, 독립협회의 이 상소 요구는 친러수구파 대신들을 모두 해임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 달라는 수구파정권 퇴진 요구이었으며 신정부 수립 요구었다.

 독립협회의 7대신 규탄과 정부 교체의 철야상소운동은 즉각 백성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서울 시내와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여 자발적으로 독립협회에 보내온 의연금이 600여 원에 이르렀다.0972)鄭 喬,≪大韓季年史≫上, 248쪽. 몇가지 예를 들면, 과천의 한 나무장수는 나무 한 짐을 30냥에 팔아서 25냥을 독립협회에 의연하고 5냥으로 배삯과 요기를 하겠다고 독립협회운동을 성원하였다. 한 군밤장수 소년은 군밤 판 돈 1냥 2전 5푼을 헌납하여 회원들을 감동시켰다.0973)≪독립신문≫, 1898년 10월 10일, 잡보<충애감동>. 심지어 감옥의 죄수들까지도 독립협회에 편지로 감사와 격려를 보내고 2원 여의 의연금을 헌납하였다.0974)≪皇城新聞≫, 1898년 1월 12일, 雜報<縷人長書>.

 독립협회는 밤에는 50명의 대표를 뽑아 10월 8일과 9일 밤에도 철야시키고, 낮에는 다시 인화문 앞에 모여 민중대회를 개최하면서, 수구파 7대신을 규탄하고 대신들의 교체에 의한 신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면서, 이를 승락하는 황제의 비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제2차 상소에 대하여 황제는 각 대신들에게 경고를 주어 고치도록 하면 되지 해임할 필요는 없다는 비답을 내리었다.0975)鄭 喬,≪大韓季年史≫上, 251쪽. 이와 때를 맞추어 都約所의 유생들이 서울 시내 요소에 방을 붙여서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가 중추원에서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을 건의·결의를 할 때 홀로 찬성치 않은 것은 반역을 비호하는 뜻이 있는 것이라고 독립협회와 회장 윤치호를 규탄하였다.

 독립협회는 여기에 물러서지 않고 인화문 앞에서의 민중대회를 더욱 확대해 가면서 10월 10일 ‘제3차 상소’를 올리었다. 이 상소에서 독립협회는 ①7대신은 황제에게 다만 아첨하기만 일삼아 벼슬자리와 봉록만 보전하려 하고 2천만 백성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는 무리들이며, ②7대신의 국정 문란의 죄가 이미 너무 커서 스스로 잘못을 고치기는 기대할 수 없고, ③“백성이 나라의 근본이요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한 것(民維邦本 本固邦寧)”인바, “백성이 튼튼치 못하고 나라가 평안치 못한 것(本不固而 邦不寧者)”은 7대신의 죄인데 어찌 작은 7대신을 아끼어 3천리의 큼과 2천만 명의 많음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④나라 형세가 위기일발에 있어 비유컨대 급류폭풍에 배가 기울어지고 돛대가 부러지면 반드시 익숙한 사공을 기다릴 것이거늘 어찌 용렬한 사공과 부서진 삿대로 하여금 그 재주가 앞으로 단련하고 그 수단이 익숙하여 구원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지적하고, 7대신의 즉각 파면과 신정부의 수립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0976)≪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8월 26일,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

 이날 독립협회의 인화문 앞 대회에는 法語(프랑스어)學校·日語學校·俄語(러시아어)學校 학생들과 培材學堂 학생들이 참석하여 더욱 대규모화되었다.0977)≪皇城新聞≫, 1898년 10월 12일, 雜報<學園赴會>. 또한 황국중앙총상회의 지도하에 서울 시내의 各廛 상인들이 일제히 철시하여 독립협회의 수구파 7대신 규탄과 친러수구파정부 퇴진 요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0978)≪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잡보<각전폐시>.

 황제는 독립협회의 ‘제3차 상소’에 대하여 이미 앞서 비답을 내렸는데 물러가지 아니하니 백성의 습관이 이에 이르면 차라리 말하지 않겠다고 응답하였다.0979)≪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8월 26일,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批旨.

 황제는 10월 10일 밤에도 독립협회 회원들이 여전히 물러가지 않고 철야하자, 10월 11일 한성판윤 李采淵을 집회에 보내어 칙유를 전하였다. 황제는 이 칙유에서 ①백성들이 대궐 문 바로 곁에서 날을 지내고 밤을 지새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아니하며 즉각 시행을 급히 청함은 일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고, ②방금 정부에 지시하여 배가해서 경계하도록 한즉 정부대신들이 서로 힘써 권면할 터이니 백성들은 물러가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일의 이치에 합당하며, ③황태자의 병환이 아직도 다 낫지 않았는데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편치 않은 일이므로, 이렇게 타일러도 물러가지 아니하면 또한 신민의 도리가 아니니 퇴거 여부를 지켜보리라0980)鄭 喬,≪大韓季年史≫上, 252∼253쪽.
≪皇城新聞≫, 1898년 10월 13일, 別報<奉讀聖諭>.
고 하여, 호소와 위협을 겸한 유시를 전하였다.

 독립협회는 이 칙유에 대하여 즉각 尹夏榮 등 5인을 선출하여 短章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그들은 이 단장에서 ①7대신이 물러가지 아니한즉 백성과 나라의 걱정이 조용해질 때가 없는 고로 백성이 감히 먼저 물러가지 못하며, ②7대신의 평일의 행정은 짐짓 법률과 규칙을 지키지 않고, 인재를 쓰지 않으며, 뇌물 갈취를 오로지 일삼고, 잡세를 어지러이 긁어 들이며,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내쫓지 아니하여 백성이 생명을 보호하기 어렵고, 재산을 빼앗겨 혈분이 맺혀 있으며, ③당장 강한 이웃나라가 엿보고 기다리는데 내정을 개혁하지 않아 민심이 평안치 못하면 오이가 베어지는 염려가 숨쉴 동안에 있으므로 근본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맑게 하기 위하여 7대신을 내쫓고 준언을 구하며 규칙 실시를 바라는 것이며, ④7대신이 하루 물러가지 않으면 신 등도 하루 물러가지 않을 것이고, 7대신이 백일 물러가지 않으면 신 등도 백일 물러가지 않으리라고 하였다.0981)≪皇城新聞≫, 1898년 10월 13일, 別報<奉答聖諭>. 이것은 매우 강경한 논지이며, 7대신을 파면시키지 않으면 결단코 물러가지 않겠다는 굳은 투쟁의 결의를 황제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집회는 이날 학생 및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가 증가하여 더욱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외국인들도 이 민중대회를 구경하면서 독립협회의 정권교체 요구에 큰 관심을 표명하고, 한국 민중의 성장에 놀라움을 표시하였다.0982)The Independent, October 13th, 1898, Local Items.

 뿐만 아니라 10월 10일부터는 독립협회의 정부 교체운동을 지지하여 황국중앙총상회의 지도하에 서울 시내의 각전 상인들이 일제히 철시를 시작하였다.0983)≪皇城新聞≫, 1898년 10월 12일, 雜報<各廛撤市>. 경무청이 놀라서 경관들을 파견하여 상점 문을 열도록 명령했으나, 시전 상인들은 이제는 전과 달라 官人의 무례한 압제를 받지 않겠으며 상점 문을 열고 닫는 것은 그들의 자유권리로 하는 일이니 간섭치 말라고 이를 거부하면서 무기한 철시를 계속하였다.0984)≪독립신문≫, 1898년 10월 13일, 잡보<전인충분>.

 독립협회의 민중대회는 10월 12일 아침부터는 더욱 대규모화되었다. 德語(독일어)學校 학생들도 참가했을 뿐 아니라, 水下洞 관립소학교와 養士洞 관립소학교의 소학생들까지도 모두 독립협회의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0985)鄭 喬,≪大韓季年史≫上, 259쪽. 소학교 학생들의 독립협회 시위장에의 참가는 정부를 경악과 공포에 몰아 넣었다.

 이제 서울 시내는 친러수구파정부의 퇴진과 개혁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독립협회의 지배와 영향하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를 지연시키면 시킬수록 철야 시위군중은 증가하고 시위의 영향은 전국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파급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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