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3. 참정권운동과 개혁의 추진
  • 3) 언론과 집회의 자유 쟁취운동

3) 언론과 집회의 자유 쟁취운동

 독립협회는 이어서 세 방향의 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10월 13일 李建鎬·韓致愈·南宮檍을 총대위원으로 선출해서 의정서리 박정양에게 공한을 발송하고, 의회 설립을 위한 협의를 하고자 하니 시일과 장소를 지정하여 회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0989)鄭 喬,≪大韓季年史≫上, 260쪽.

 또한 독립협회는 10월 16일부터 황국중앙총상회와 합동하여 商權 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0990)愼鏞廈,<獨立協會와 皇國中央總商會의 商權守護運動>(≪獨立協會硏究≫, 일조각, 1976). 그리고 이어서 전개된 것이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쟁취운동이었다.

 그러나 수구파들도 반격과 재진출을 시도하였다. 수구파 단체 皇國協會는 의정부 의정서리 박정양의 집 앞에서 집회를 열고 총대위원을 들여보내어, 박정양이 공정하지 않게 독립협회만 편애하고 황국협회를 차별대우했다고 규탄하였다.0991)≪매일신문≫, 1898년 10월 18일, 별보. 황국협회는 박정양이 의정서리직을 사임할 때까지 그 집 문앞에서 철야농성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박정양이 사직상소를 올리겠다고 약속한 다음에야 물러갔다.0992)≪皇城新聞≫, 1898년 10월 18일, 雜報<長橋消息>.

 또한 황제 고종은 친러수구파의 복직을 꾀해,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해임되었던 趙秉式을 10월 17일 의정부 찬정으로 임명했으며,0993)≪承政院日記≫, 광무 2년 9월 초3일, 詔. 10월 21일에는 역시 독립협회의 비판을 받고 사직하였던 전 의정부 참정 尹容善을 의정부 의정으로 임명하였다.0994)≪承政院日記≫, 광무 2년 9월 초7일, 詔. 이에 따라 정부에는 개혁파 옆으로 다시 일부 수구파가 재친출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제는 10월 20일 “독립협회의 토론은 정치문제 이외의 것만 한정하며 그 집회는 한정처소인 獨立館에서만 허가하고 離次開會(原定處所를 떠나 집회를 여는 것)는 금지한다”는 詔勅을 내렸다.0995)The Independent, October 25th, 1898, An Anti-Club Decree. 황제는 이 조칙에서 ①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국회는 국가의 공립으로 국가와 국민의 이해를 의결하는 곳이요, 협회는 국민의 사설기관으로 공동 講談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②우리 나라에서도 국민이 사설한 협회가 있어서 개명진보에 일조가 안된 것은 아니지만, 政令을 평론하고 대신의 임면을 논하는 것은 원래 협회의 규칙이 아닌데, 離次開會을 하고, 상소를 바치면서 대궐 문을 막고, 大官을 협박하여 전혀 제한이 없는 것은 국회라도 이 권리가 없거늘 하물며 협회에 있을 수 없으며, ③오늘 이후에는 내부·경무사·각 지방관에 명령하여 협회는 어느 협회를 불문하고 무리를 지어 치안을 방해하는 경우에는 엄벌에 처할 것이요, ④오직 원정처소에서 토론하는 것은 저지하지 말고 힘써 인민으로 하여금 지식을 발달케 해서 효험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0996)≪皇城新聞≫, 1898년 10월 24일, 雜報<協會運動>.

 황제의 이 칙령은 독립협회의 인화문 앞에서의 상소시위를 비판하면서, 국민의 정치적 발언, 정치비판, 정부정책 비판을 금지한 것이며,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도 독립관을 떠나서는 개최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으로서,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한한 조치였다.0997)≪駐韓英國領事館報告≫(Reports and Communications from the British Consul in Seoul), 機密報告書 第108號, 1898년 11월 12일.

 독립협회는 이 조칙을 모르는 상태에서 의정부 찬정이었던 수구파 윤용선이 의정으로 새로 임명된 것을 자진 사임시키기로 의결하여, 일부 회원이 윤용선의 집 앞에서 집회를 열고 윤용선으로부터 자진 사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다.0998)≪皇城新聞≫, 1898년 10월 24일, 雜報<協會運動>.

 독립협회는 官報를 통하여 10월 22일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칙을 읽자, 이번에는 독립협회 사무소에서 이를 토론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①국민의 정치문제 토론은 정부의 부정부패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②언론의 자유권은 양보할 수 없는 민권이고, ③관료로 하여금 황제와 국가를 위해 충실히 의무를 수행케 하는 방법은 公論의 자유로운 표현에 있음을 결의하고, 만장일치로서 국민의 언론·집회의 자유의 허락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0999)The Independent, October 27th, 1898, Fight for the Freedom of Speech.

 독립협회 회원들은 또한 그 운동의 하나로 칙령을 읽고서도 사무소에서 집회를 연 것은 분명히 칙령위반이니 회원들이 경무청에 자진 출두하여 처벌받기로 결의하였다.1000)≪매일신문≫, 1898년 10월 25일, 별보. 회원들이 일제히 경무청 앞으로 나아가 두 번이나 총대위원을 보내어서 체포·투옥을 자원했으나, 경무사는 즉각 퇴거하라고 할 뿐 그들을 체포·투옥하지 못하였다.1001)≪독립신문≫, 1898년 10월 24일, 잡보<협회대죄>.

 황제는 이날 저녁 8시경에 경무관을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에 보내어 다시 조칙을 전하였다. 황제는 이 조칙에서 ①離次開會를 금지하는 조칙을 내렸는데도 독립협회 회원들이 잘못하여 집회를 열었다가 대죄한다고 들었으니 이것은 관리들이 조칙을 즉각 거행하여 알리지 못한 때문이므로 내부대신과 경무사를 견책했으니, ②독립협회 회원들은 각자 퇴거하라고 엄명하였다.1002)≪承政院日記≫, 광무 2년 9월 초8일, 詔.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 조칙을 토론한 결과, 황제가 국민의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허락할 때까지 물러가지 않고 철야 농성하기로 결의하였다.1003)≪제국신문≫, 1898년 10월 24일,<재작일 독립협회 사건>.

 황제는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경무관을 독립협회 철야 장소에 보내어 칙어를 전하였다. 황제는 이 칙어에서 ①백성들이 모인 것은 조칙을 반포하기 전인즉 반포를 지체한 잘못이 내부·경무청·한성부에 있지 백성들의 죄가 아니므로 내부대신·경무사·한성판윤을 조칙으로 견책한 것이며, ②백성들이 상소를 하겠다 하니 그 진언한 바에 따라서 비답을 내리려니와 상소는 내일 백성중 몇 명만 와서 바칠 것이요, ③밤이 깊었으니 스스로 죄가 있다 하지 말고 안심하여 퇴거하라고 달래어 유시하였다.1004)≪皇城新聞≫, 1898년 10월 25일, 雜報<敬承勅語>.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에 대해 ①우리들이 모인 것은 조칙 반포 후이니 조칙을 위반한 죄가 있으며, ②우리 집회의 본의는 황실을 보호하고 인민의 도탄을 구하며 강국의 모욕을 막기 위한 것이므로 정치의 득실을 논란하는 것은 만부득이 한 것이고, ③삼천리 강토의 안위가 급박하므로 일신의 안전만 생각하여 국가의 위망에도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다는 답서를 올리고 물러가지 않았다.1005)鄭 喬,≪大韓季年史≫上, 269∼270쪽.

 황제는 다급하게 되어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경무청 전화로 불러서 회원을 해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을 허락해 줄 때까지 물러가지 않겠다고 결의하고, 이날 밤을 추위속에서도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하였다.1006)The Independent, October 27th, 1898, Fight for the Freedom of Speech.

 독립협회 회원들은 10월 23일 제소위원 韓致愈가 지은 상소문을 올리었다. 그들은 이 상소에서 황제의 10월 20일자 조칙에 반박하기를, ①저 배척받은 신하들이 아첨만 일삼아 (황제의 총명을) 가리워서 안으로는 민심을 분울케 하고 밖으로는 이웃 나라가 엿보도록 하며, 법률과 장정을 지키지 않아 2천만 인구는 도탄에 빠지고 3천리 강토는 오이쪽 같이 나뉠 염려가 있기 때문에 離次開會하고 대궐을 지켜 상소를 올린 것이며, ②저 배척받은 신하들이 죄를 마땅히 뉘우칠 생각은 않고 논핵받은 것만 원수로 여겨 모함하기만 일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政令을 평론하고 대신 임면에 참예하며 대신 협박을 탕탕히 하여 제한이 없다고 일러서 함부로 전횡한 데로 몰고자 하는데, 폐하는 어찌 아첨하는 것만 기뻐하고 정직한 말은 미워하는지 분통 격절하며, ③외국의 예에도 民會는 행정에 失政이 있으면 전국에 알려서 민중을 회집하여 질문하고 논핵해서 백성이 승복하는 바가 아니면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는 것이니 강담만 하는 곳이 아니며, ④독립협회는 독립을 기초로 하고 충애를 목적으로 하여 공립한 회이니 정직한 말로 죄를 지었으나 1인이 죽으면 10인이 그 뒤를 잇고 10인이 죽으면 100인, 1,000인이 그 뒤를 이을 것이며, ⑤권리로 논하면 6대주에 동등하여 만국에 평행하는 것은 폐하의 권리요, 폐하의 강토를 지키고 정법을 문란케 하는 신하가 있으면 탄핵하여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인데 民權이 성하면 君權이 반드시 덜리라고 하는 자가 있으니 무식함이 더 이상 심할 수 없으며, ⑥오늘날 이와 같은 民議가 없으면 정치·법률이 따라서 무너져 어떠한 재앙이 어느 땅에서 일어날지 알지 못하겠으니 이를 살피시라고 항의하였다.1007)≪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9월 9일,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

 이것은 국민의 언론·집회의 자유의 중요성과 그 승인을 주장한 매우 강경한 상소였다.1008)≪駐韓日本公使館記錄≫9,<機密本省往1·2·3>, 1899년 5월 17일, 機密 第36號, 加藤公使在任中 事務經過大要 記述具申의 件 가운데 21번 獨立協會運動.

 황제는 이 상소에 대해 “言路를 열고 어려움을 책하여 진보할 것은 이미 생각을 정한 바 있으니 그리 알고 물러가서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1009)≪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9월 9일,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批旨.는 批旨를 내리었다. 황제가 언로를 열 생각을 정한 바가 있다고 한 것은 중추원을 새로이 개편할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이 때 정부는 한편으로 개혁파 관료들이 독립협회와 협상을 하면서 독립협회의 주장에 따라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려고 협의하고 있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10월 24일 경무청 문 앞에서 황제의 비지를 읽고, 황제의 칙유는 전후가 일치하지 않으니 대죄를 계속하여 ‘언론의 자유’를 명백히 승인받은 후에 물러가기로 결의하고, 이날 밤도 경무청 문 앞에서 계속 철야하였다.1010)鄭 喬,≪大韓季年史≫上, 272쪽.

 독립협회 회원들은 10월 25일에도 다시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었다. 그들은 이 상소에서, ①심상훈·민영기·윤용선·이인우·閔景植·장봉환·吉永洙·閔康鎬·崔炳桓 등과 같은 간세배가 서로 체결하여 궁궐을 둘러싸고 민정의 상달을 막고 있으니 궁궐 주위를 숙청하여 민심을 쾌하게 해주시기 바라며, ②폐하의 사람 씀은 은혜가 의로움을 이기고, 애정이 엄격함을 이기어, 마땅히 축출할 것도 차마 못하시고 그 마땅히 쓰실 것을 보고도 용기가 적으시니 애석한 일이며, ③간세배들이 이르기를 정부대신을 탄핵하는 것과 정령을 의논하는 것이 마땅히 국민의 권리가 아니라 하니 이것은 군주를 현혹하고 고위 관리를 충동질하려는 망언이며, ④초야의 백성에게 묻고 미친 지아비의 말도 가리어 듣는 것은 훌륭한 군주의 항상 하는 일이므로 백성이 말을 아니하면 몰라도 말을 하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인데 간세배들이 백성의 입을 막아 자갈을 물리고 혀를 묶고자 하나 우리들은 아직 의로움을 열심히 아뢰되 오히려 다 아뢰지 못한 것이 있으며, ⑤10인의 집회에도 스스로 좋은 말이 있고 한 곳의 집회에도 또한 公論이 있으니 이것은 언론의 자유권이 스스로 갖추어 있기 때문이며, ⑥간세배들이 백성의 입에 자갈을 물리어 압제한 후에야 君權이 높아지리라 하는 것은 도리어 군권을 마침내 잃으라는 것과 같으며, ⑦우리들의 집회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서울과 시골에서 뭇 백성의 마음이 모두 한 가지로 되어 모인 것이니 폐하는 정신을 머물러 맑게 살피어 이름없는 백성이라도 언론의 자유권을 누리도록 허락하시라고 하였다.1011)위와 같음.

 독립협회의 이 상소는 지난번 상소보다도 더 공격적인 것이었다.

 황제 고종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경무청 문 앞에서 연 4일을 철야 대죄시위를 하면서 점점 더 강경하게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언론의 자유만이라도 허락해야 백성들이 물러갈 것임을 알았다. 황제는 마침내 비지를 내리어 “무릇 신민의 도리에 폐막이 있으면 교정코자 하는 것이 있어 스스로 반드시 언론을 아뢰는 의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1012)≪承政院日記≫, 광무 2년 9월 11일, 中樞院副議長尹致昊等疏批旨.고 하고, 독립협회 주장의 의로움을 인정하였다.

 황제의 비지의 표현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영문 번역에서 “특정한 거짓과 악을 교정하려 할 때 자기의 의견 표현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신하의 의무”1013)The Independent, October 27th, 1898, Fight for the Freedom of Speech.라고 번안한 바와 같이, 집회의 자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지만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는 황제가 이를 허락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황제의 비지를 해석하기를 “대한 전국 2천만 동포를 대표한 우리 독립협회 회원들로 하여금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일과 무릇 정부나 내외 관리들의 혹 정치 잘못하는 것이나 장정과 규칙과 법률을 위반하는 것은 보고 듣고 아는 대로 평론하여 교정하라 하신 말씀”1014)≪독립신문≫, 1898년 10월 27일,<독립협회재소(전호연속)>.이라고 해석하였다. 외국공사들도 독립협회가 황제에 대항하여 “언론의 자유를 쟁취했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1015)≪駐韓美國公使館報告≫(Communications to the Secretary of State from U. S. Represeutatives in Korea;H. N. Allen), 문서번호 14, 1898년 10월 27일, Recent Taken by the Independence Club of Korea.

 독립협회 회원들은 만세를 부르고 10월 25일 오후 만 4일간의 철야 시위집회를 해산하고 사무소로 돌아왔다. 독립협회가 황제의 비지를 표현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은 10월 24일 독립협회 대표와 정부 사이에 중추원 개편에 의한 의회설립 협상이 타결되어 의회 개설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표현이면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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