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3. 참정권운동과 개혁의 추진
  • 5) 관민공동회

5) 관민공동회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과 국정 개혁운동에 대하여 수구파와 황제의 각종 저지활동이 집요했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개혁정부와 의회설립에 합의한 것을 계기로 개혁정부와 독립협회와 일반 시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회를 개최해서 이를 공개리에 전국민과 세계에 공포 선언함으로써 수구파와 황제의 반격을 사전에 방지하고 의회설립과 국정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즉 독립협회는 官民共同의 대집회를 개최하여 국정개혁의 대강령을 결의하고 정부(官)와 황제의 동의 선서를 전국민과 세계의 주목 속에 얻음으로써 수구파의 반격을 근본적으로 누르고 회의설립과 대개혁 추진을 대로 위에 올려놓기로 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10월 27일 정부대신들과 각계 각층 국민·단체들에게 청첩장을 발송한 다음,1056)鄭 喬,≪大韓季年史≫上, 278쪽.
≪독립신문≫, 1898년 10월 28일, 잡보<종로별회>.
10월 28일 1시부터 서울 종로에서 官民共同會를 개최하였다.1057)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0월 31일. 이 대회에서 ‘民’의 대표로서는 주로 독립협회 회원들 약 4,000명이 첫날 참석했으며,1058)≪駐韓英國領事館報告≫(Reports and Communications from the British Consul in Seoul), 機密報告書 第108號, 1898년 12월 12일. 황제와 수구파들을 자극하거나 반격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 세심한 주의를 하였다. 이 때문에 이 대회에서는 그 직전까지의 독립협회의 시위에서 보이던 격렬한 수구파 비판과 황제의 전제권에 대한 비판은 엄금되었다. 독립협회는 관민공동회 개최에 임하여 회중이 대회 진행 중 지켜야 할 4가지 조항을 선언하였다.

① 황제와 황실에 대한 불경한 언어를 엄금하며, 민주주의(Democracy)와 공화주의(Republicanism)를 옹호하는 연설을 금한다.

② 우리가 겪는 불행은 우선 우리의 책임이므로 우리와 조약을 맺은 외국을 모독하거나 외교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언행을 금한다.

③ 우리는 양반과 상민이 모두 동포형제로서 이 대회에 모인 것이므로 누구든지 서로 모욕적인 언행은 엄금하며, 우리가 규탄했던 전임 대신들에게도 불쾌한 언행을 금한다.

④ 일부 사람들이 자기 나라보다도 자기의 풍속을 사랑하므로, 상투를 포함한 사회관습 개혁에 대한 논의는 금하며 국가정책에 대한 논의만을 행한다(The Independent, November 1th, 1898, An Assembly of All Caste).

 위의 결의사항은 독립협회가 평소에 ①민주주의(Democracy)와 공화주의(Republicanism)를 옹호하는 주장을 했고, ②외국과 맺은 조약을 비판하고 외국의 침략정책을 비판해 왔으며, ③양반과 상민 사이의 갈등과 수구파 대신들에 대한 비판을 감행해 왔고, ④구습개혁을 주장해 왔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수구파를 물리치고 개혁정부를 수립했으며 의회설립이 성공의 문턱에 다다른 시기에 황제와 수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주장을 적어도 관민공동회가 개최되는 6일간만은 자제할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정부대신들은 10월 20일자의 황제의 칙령이 독립협회의 離次開會 금지였기 때문에 독립협회 사무소가 아닌 종로에서의 대집회에 감히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가, 독립협회가 관민공동회를 강행해 나가자 황제의 허락을 받고 대회 이튿날인 10월 29일에야 이 관민공동회에 참가하였다.1059)≪輪牒存案≫(議政府編), 광무 2년 10월 29일, 通牒.

 1898년 10월 29일 오후 2시의 관민공동회에는 ‘民’측으로서 독립협회뿐만 아니라 皇國中央總商會·贊襄會(順成會)·協成會·광무協會·搢紳會·親睦會·敎育會·國民協會·進明會·日進會·保信社 등 독립협회 계열의 모든 자매단체들이 참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친러수구파의 행동대인 皇國協會까지도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다. 또한 이 날의 관민공동회에는 시민·신사(지식인)·학생·노동자·시전상인·맹인·승려·백정(재설꾼)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하여,1060)鄭 喬,≪大韓季年史≫上, 281∼282쪽. 그 수는 1만여 명이 넘었다.1061)尹致昊,<獨立協會의 活動>(≪東光≫26, 1931년 10월호), 36쪽.

 또한 이날 오후 4시에는 정부대신들인 의정부참정 박정양, 찬정 이종건, 법부대신 徐正淳, 농상공부대신 金明圭, 탁지부대신서리 高永喜, 그리고 중추원의장 한규설, 원임대신 金嘉鎭·민영환·민영기·심상훈·이재순·정낙용, 한성판윤 李采淵, 학부협판 李容稙, 장례원경 趙熙一, 의정부찬정 權在衡, 찬무 르젠드르(Charles W. Legendre, 李善得) 등이 참석하였다.1062)≪독립신문≫, 1898년 11월 1일,<관민공동회 사실>. 정부대신으로서 이 관민공동회에 불참한 사람은 외부대신 朴齊純과 군부대신서리 유기환 뿐이었다. 그 결과 관민공동회는 10월 29일부터는 무려 1만여 명의 민·관이 합석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관민공동대회가 되었다.

 이날의 역사적 관민공동회에서는 주최측에서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먼저 인사를 한 다음, ‘官’측에서는 의정부참정 박정양이 등단하여 간단한 개막연설을 하였고, ‘民’측에서는 새 개혁을 상징하기 위해 종래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출신 朴成春이 등단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개막연설을 하였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편케하는 길인즉 관과 민이 합심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國祚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鄭 喬,≪大韓季年史≫上, 282쪽).

 이 관민공동회에서는 독립협회가 11개조의 국정개혁 대강령을 제출하여, 이중 6개조는 綱으로 하여 공개 결의하고, 5개조는 目으로 하여 다음에 황제에게 품의하기로 하였다. 보통 ‘헌의 6조’라고 부르는 바의 이 때 관민공동회가 공개 결의한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외국인에게 依附하지 아니하고 동심합력하여 전제황권을 견고케 할 사.

② 광산·철도·매탄(석탄)·삼림 및 차관·차병과 모든 정부와 외국인과의 條約의 일을 만일 외부대신과 중추원의장이 합동으로 서명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하지 못할 사.

③ 전국 재정은 어떠한 稅를 물론하고 모두 度支部에서 句管하되 다른 府·部와 私會社는 간섭할 수 없고, 예산과 결산은 인민에게 공표할 사.

④ 지금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중죄범은 공개재판을 행하되 피고가 충분히 설명하여 마침내 자복한 후에야 시행할 사.

⑤ 칙임관은 대황제폐하께서 정부에 諮詢하여 그 과반사를 따라서 임명할 사.

⑥ 章程을 실천할 사.

  (議政府 編,≪奏本存案≫(奎 17704) 제3책, 광무 2년 10월 30일, 奏本 第220號)

 이것이 유명한 이른바 1898년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인 것이다.1063)The Independent, 1898년 11월 1일, An Assembly of All Cast. 관민공동회의 이 ‘헌의 6조’에는 이 공동회에 참석한 정부대신들도 서명하여, 정부수반인 박정양이 10월 30일 황제에게 상주하였다.1064)議政府 編,≪奏本存案≫(奎 17704) 제3책, 광무 2년 10월 30일, 奏本 第220號.

 이 ‘헌의 6조’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인이 있는 조항이 제1조이다. 일부 문헌고증학자들은 ‘外國人에게 의부하지 아니하고 동심합력하여 전제황권을 견고케 할 사’의 ‘전제황권을 견고케’의 글자에 집착하여 독립협회운동이 황권강화운동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그렇지 않다. 이 조항은 ‘외국인에 의부하지 아니하고’에 무게를 실어야 하며, 전체 흐름을 세밀히 관찰하면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당시 전제황권을 갖고 있는 황제 고종의 의회설립에 대한 반대와 의구심을 풀기 위해 독립협회가 전술적으로 사용한 용어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립협회는 이미 의회설립을 위한 만반 준비를 모두 끝내고 이를 다짐하는 관민공동회에 정부대신들과 황국협회까지 참가시키는 데 성공했으므로, 입헌군주국으로 가는 개혁 직전에서 전제군주인 황제 고종의 저항에 부딪혀 의회설립의 대업 성취를 좌절당하지 않으려고 독립강화와 전제황권을 연결시키면서 황제 고종을 안심시키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었다. 또한 독립협회는 이미 군권을 황제가 대외적으로 세계 열강의 황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강한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정의해 왔다.1065)≪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9월 9일,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 중 제1조의 전제황권도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 중에서 의회설립과 직접 관련된 것은 제2조의 ‘광산·철도·매탄(석탄)·삼림 및 차관·차병과 모든 정부와 외국인과의 조약의 일을 만일 각부대신과 중추원의장이 합동으로 서명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치 못할 사’이다. 여기서의 중추원은 의회로의 개편을 전제로 한 중추원이었음은 물론이다. 즉 이 조항은 의회의 조약비준권을 선언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정부의 각부대신과 의회로서의 중추원의 의장이 공동서명해야만 효력을 발생할 수 있도록 결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추원의 의회로의 개편, 즉 의회설립이 비단 민권뿐만 아니라 자주독립 수호의 제도적 장치로서도 추진되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는 ①재정의 탁지부에의 통일과 예산·결산제도의 확립, ②공개재판제도와 증거주의의 확립, ③칙임관 임명에 있어서의 정부자문의 의무화와 전제군주권 제한, ④章程의 실천 등을 규정하여 나라의 자주적 근대화와 민권신장을 결의하였다. 황제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가 황제와 황실에 대한 불경을 금하고 전제황권을 견고케 한다는 데에 만족했던 모양으로, 독립협회가 대강령의 目으로 초안을 만들어 두었던 5개조에 약간 수정을 가해 10월 31일 새벽에 30일자로 다음과 같은 ‘詔勅 5조’를 내려보냄으로써 관민공동회에 대한 지지의 뜻을 표시하였다.

① 諫官 폐지 후 言路가 막히어 상하가 권면경려의 뜻이 없기로 中樞院章程을 函定(개정)하여 실시할 사.

② 각 항 규칙은 일정한 것을 말한 것이 있는데 會와 新聞이 역시 防限이 없을 수 없으므로 會規는 의정부와 중추원에 명하여 시의를 참작해서 제정하도록 하고, 新聞條例는 내부와 농상공부에 令하여 각국 예에 依倣하여 제정 시행할 사.

③ 관찰사 이하 지방관 및 地方隊 長官 등 현임과 이에 遞한 자를 물론하고 公貨를 乾沒한 자는 장률에 의하여 시행하고, 民財를 騙取한 자 중에서 현저한 것은 本主에게 推給한 후 법률에 의하여 징계할 사.

④ 御史와 觀察員 등의 작폐자는 본토 인민이 내부와 법부에 가서 訴할 것을 허락하도록 令하여 조사해서 懲治할 사.

⑤ 商工學校를 설립하여 民業을 권장할 사.

  (≪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9월 9일,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

 이 ‘조칙 5조’는 제1조에서 황제 고종이 중추원장정의 개정을 허락하여 중추원의 의회로의 개편을 사실상 승인하고 있다고 해석되었으므로, 언론·집회의 자유에 대한 황제의 제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관민공동회 회중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독립협회는 관민공동회를 6일만인 11월 2일 성공리에 끝내었다. 이제는 황제의 승인과 관민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중추원장정을 개정하여 의회설립을 실행하는 일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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