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3. 참정권운동과 개혁의 추진
  • 6) 의회(상원)설립법의 공포

6) 의회(상원)설립법의 공포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가 독립협회의 의도대로 성공리에 끝나고, 황제 고종도 중추원장정의 개정을 승인했으므로, 박정양 개혁정부는 독립협회가 일찍이 10월 24일 정부에 제출한 의회(상원)설립안(중추원관제개편안)에 기초하여 약간의 字句 수정을 가해서<中樞院新官制(의회설립법)>를 11월 2일자로 만들어서, 11월 3일 황제의 재가를 얻어,1066)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3일. 11월 4일 공포하였다.1067)≪官報≫, 광무 2년 11월 4일. 이것이 19세기말에 한국이 최초로 제정한 의회(상원)설립법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1조 중추원은 다음의 사항을 심사 議定하는 처소로 할 사.

  ①법률과 칙령의 제정·폐지 혹은 개정에 관한 사항

  ②의정부에서 經議 上奏하는 사항

  ③칙령을 因하여 의정부에서 諮詢하는 사항

  ④의정부로서 임시 건의에 대하여 諮詢하는 사항

  ⑤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⑥인민의 獻議하는 사항

 제2조 중추원은 다음의 직원으로 합성할 사.

  의 장 1인  부의장 1인  議 官 50인

  참서관 2인  주 사 4인

 제3조 의장은 대황제폐하께옵서 聖簡으로 勅授하시고, 부의장은 중추원 공천을 因하여 勅授하시고, 의관 半數는 정부에서 勞勩가 일찍이 있는 자로 회의하여 추천하고, 반수는 人民協會에서 27세 이상의 사람이 정치·법률·학식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할 사.

 제4조 의장은 勅任 1등이요, 부의장은 칙임 2등이요, 의관은 奏任이니, 叙等은 無하고, 임기는 각 12개월로 정할 사. 단, 의관의 만기전 1개월에 후임 의관을 豫選할 사.

 제5조 참서관은 奏任이요 主事는 判任이니 叙等은 일반관리와 同할 사.

 제6조 부의장은 중추원 통첩을 侍하여 정부로서 上奏하여 詔勅으로 임명하심을 共竣하고, 의관은 정부에서 상주하여 叙任하고, 참서관은 中樞院薦牒을 侍하여 정부에서 奏任하고, 주사는 의장이 經議하여 專行할 사.

 제7조 의장은 중추원의 대소사무를 총괄하고 일체의 公文에 서명할 사.

 제8조 부의장은 의장의 직무를 보좌하고 의장이 유고한 시는 그 직을 代辨할 사.

 제9조 참서관은 의장 및 부의장의 지휘를 承하여 庶務를 掌할 사.

 제10조 주사는 상관의 지휘를 承하여 서무에 종사할 사.

 제11조 중추원은 각 항 안건에 대하여 의결하는 權만 유하고 上奏 혹은 發令을 直行하지 못할 사.

 제12조 의정부와 중추원이 의견이 不合하는 시는 府와 院이 합석 협의하여 妥當 可決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直行함을 得치 못할 사.

 제13조 국무대신이 위원을 명하여 그 주임하는 사항으로 의정부의 위원이라 하여 중추원에 至하여 의안의 理趣를 辨明할 사.

 제14조 국무대신 및 각부협판은 중추원에 來會하여 의관이 되어 열석할 수 있으나, 단 그 주임사항으로는 의결하는 員數에 加하지 못할 사.

 제15조. 개국 505년 칙령 제40호 中樞院官制는 本官制 반포일로부터 폐지할 사.

 제16조. 본 관제 제3조 중 人民協會는 현금간에는 獨立協會로써 행할 사.

 제17조.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사.

광무 2년 11월 2일

奉勅 議政府參政 朴定陽

(議政府 編,≪奏議≫(奎 17703) 제24책, 광무 2년 11월 2일, 奏本 第234號 및 中樞院官制改正勅令).

 정부가 11월 4일 공포한 이 새로운 중추원관제(의회설립법)는 독립협회가 10월 24일 정부에 제출한 중추원 관제개편안과 골격이 거의 같은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의회설립법안은 정부의 이 새로운 중추원관제에 거의 그대로 충분히 반영된 것이었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독립협회의 중추원 관제개편안에는 민선의관 25명을 선출하는 인민협회를 독립협회로 고정시킨 데 비하여, 정부의 새 중추원관제에서는 이것을 ‘인민협회’라 고쳐서 다른 협회들의 앞으로의 참가의 문을 열어놓고, 제16조에 당분간 독립협회가 이를 담당하도록 한정했으며, 의원의 피선거 자격을 규정해 놓은 정도이다.

 개혁정부가 공포한 새 중추원관제에 의거해 개원하는 중추원은 물론 상원이었고 하원은 아니었다. 즉 그것은 상원으로서의 의회였다. 상원으로서의 의회의 기능은 심의의 기능과 대표의 기능으로 나누어 검증해 볼 수 있다.

 심의의 기능에서 볼 때, 새 중추원의 기능은 근대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의 기능을 모두 갖추었다. 즉 새 중추원은 입법권을 모두 갖고 있었다. 제1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새 중추원은 법률의 제정·폐지·개정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었으며, 군주제하에서 칙령의 제정·폐지·개정의 모든 권리도 갖도록 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의정부가 황제에게 상주하는 일체의 사항은 반드시 사전에 중추원의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즉 새 중추원은 ①입법권, ②조약비준권, ③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심의권, ④심의권을 통한 사실상의 감사권, ⑤건의권, ⑥행정부 건의에 대한 자문권 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의회만이 갖는 권리이며, 19세기말의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모든 나라들의 의회의 권리도 이러한 권리들로 성립되어 있었고,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국정에 대해 행정부와 중추원이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합석하여 이를 충분히 토의한 후에 반드시 중추원에서 가결하여 실시해야지 중추원의 가결없이 행정부가 단독 의견으로 이를 집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심의의 기능면에서는 새 중추원은 19세기말의 모든 초기 민주주의국가들의 의회와 완전히 동일한 입법부의 기능을 갖춘 것이었다.

 한편 대표의 원리에서 볼 때는 새 중추원은 상원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하원은 아니었다.1068)The Independent, 1898년 10월 27일, The Rrivy Council. 의회를 오늘날의 하원(국민의회)으로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상원을 의회로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나올 수도 있으나, 19세기말에는 상원은 당연히 의회로 간주되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처음부터 중추원의 개편 방향을 상원설립으로 추진했었다.1069)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5월 2일. 19세기말의 각국의 상원의 대표성 문제를 보면, 모든 상원은 하원의 일반보통선거의 방법과는 다른 별도의 방법으로 兩院制 의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19세기말 영국의 상원은 모두 귀족으로만 구성되었으며, 모두 국왕 및 정부의 임명제였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일본도 이 시기에 의회를 설립했는데, 상원(참의원)은 국왕이 귀족과 국가공로자 중에서 모두 임명하는 제도였다. 상원의원을 선거하는 경우는 공화국인 프랑스와 미국뿐이었는데, 프랑스는 다수의 상원의원을 국민이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소수의 상원의원을 정부가 탁월한 인물 중에서 추천하여 임명하였다. 19세기말에는 미국만 상원도 하원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거하였다.

 이러한 19세기말의 민주주의 발전의 단계를 고찰할 때, 독립협회가 상원으로서의 새 중추원에 국민의 일반보통직접선거에 의한 의원 선출을 하지 않고 국민대표로서 독립협회가 이를 대신 투표 선출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새 중추원의 상원체제는 50명의 의원을, 25명은 정부가 추천하여 황제가 임명하고, 25명은 국민을 대표하여 독립협회가 투표 선출해서 반분했는데, 이것은 적어도 19세기말에는 공화국인 프랑스와 미국의 상원보다는 후진적인 것이었지만 입헌군주국가인 영국·독일·일본 등의 상원보다는 훨씬 더 공화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선진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상원의 반수는 국민대표이며 민간단체가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대한제국을 전제군주국가로부터 입헌대의군주국가로 개혁하려 하였고, 그들은 입헌군주제를 君民同治制로 해석하고 있었으므로, 상원도 군과 민이 균등하게 동치하는 원리로, 군권이 임명하는 의원 반수와 민권이 임명하는 의원 반수로 구성할 것을 집요하게 추구한 것이었다. 물론 아직 하원이 설립되지 않은 조건에서 상원 설립을 먼저 추진한 것이므로, 국민대표의 참가를 더 주장할 수밖에 없는 조건도 크게 작용하였다. 상원으로서의 이 새 중추원을 19세기말 당시의 영국·독일·일본 등 입헌군주국가들의 상원과 비교해 보면 독립협회가 추진한 상원으로서의 새 중추원은 국민대표가 총의원 정원수의 半數에까지 이른 더 진보적이고 훌륭한 상원이었음을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당시 외국공사들과 외교관들은 이러한 자기 시대의 상원체제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미국공사는 새 중추원을 ‘일종의 국민회의(a sort of Popular Assembly)’라고 본국에 보고했고, 영국공사는 상원을 넘어 절반은 하원의 성격까지 있다고 보아 ‘半下院, 國民議會(Semi-Popular Assmbly)’라고 본국에 보고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협회가 추진하고 개혁정부가 공포한 새 중추원관제에 의한 새 중추원은 당시의 어려운 조건 때문에 이름만 중추원으로 남아 있었지 사실은 훌륭한 상원이요, 훌륭한 의회의 일종이다.

 박정양정부는 이러한 상원으로서의 새 중추원관제를 공포함과 동시에, 11월 4일 독립협회에 공한을 보내어 중추원관제 제3조와 제16조에 의거하여 독립협회에서 다음날까지 25명의 의관을 선출하여 명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1070)鄭 喬,≪大韓季年史≫上, 289쪽. 독립협회는 이에 응하여 11월 5일 독립관에서 투표에 의한 중추원 민선의관 25명 선거 실시를 11월 4일 공고하였다.1071)≪독립신문≫, 1898년 11월 5일, 잡보<투표특별회>.

 그러나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은 성공 일보 직전에서 좌절되었다. 친러수구파들이 모략전술을 사용하여 이를 붕괴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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