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1. 만민공동회의 활동
  • 1) 만민공동회의 성립

1) 만민공동회의 성립

 독립협회가 1898년 11월 5일 독립관에서 上院으로 개편된 중추원의 의관을 선출하고 ‘의회’가 설립된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한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와 국회 개설에 기쁨을 누르지 못하여 아침부터 구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러수구파들은 독립협회와 개혁정부의 의회설립에 방관만 하지는 않았다. 친러수구파들은 만일 의회가 설립되고 입헌대의정치가 실시되어 독립협회와 개혁정부가 연합해서 국정 전반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하면 자기들은 정권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게 된다고 보고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파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었다.≪尹致昊日記≫에 의하면 친러수구파의 배후에서 러시아측과 일본측이 이권침탈을 목적으로 그들을 조종하고 지원하였다.1072)尹致昊,≪尹致昊日記≫5(國史編纂委員會, 1975), 1898년 11월 3·5일.

 개혁정부가 상원으로서의 새 중추원관제를 공포한 바로 그날인 11월 4일 밤, 황제에 의해 개혁정부에 일부 재진출한 수구파들인 의정부 찬정 趙秉式, 군부대신 서리 兪箕煥, 법부협판 李基東 등은 밀모하여, 광화문 밖과 시내 요소 요소에 소위 ‘匿名書’를 내다 붙이게 하였다.1073)鄭 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57), 289쪽.

 익명서의 내용 요지는 조선 왕조가 이미 쇠퇴했으므로 만민공동하여 尹致昊를 ‘大統領’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서민이 모두 승복하고 국민이 각성하여 개명진보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었다.1074)尹致昊,<獨立協會의 始終>(≪新民≫14, 1926년 6월호), 59쪽.
金永義,≪佐翁尹致昊先生略傳≫(京城:基督敎朝鮮監理會總理院, 1934), 121∼122쪽의 익명서 사진.

 이 익명서는 수구파들이 예측한 대로 경무청에 발견되어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경악한 황제에게 이날 밤 궁궐에서 일부러 머물고 있던 조병식은 유기환·이기동 등과 밀모한 다음, 독립협회가 11월 5일 독립관에서 대회를 열어 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李商在를 내부대신, 鄭 喬를 외부대신, 기타 독립협회 간부들을 대신과 협판으로 선출하고 국체를 共和政으로 개변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상주하였다.1075)The Independent, Novermber 10th, 1898, Molayo's Accounts of Recent Events in Seoul.
鄭 喬,≪大韓季年史≫上, 289쪽.

 황제 고종은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의 개혁운동을 두려워하고 상소투쟁을 매우 꺼리고 있는 판국에 자기를 폐위하고 정치체제를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즉각 독립협회 간부들을 긴급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식 등 수구파들은 경무사를 申泰休로부터 金禎根으로 교체하고, 조병식과 김정근이 밀의하여 20명의 독립협회 체포대상 지도자 명단을 작성하였다.1076)法部 編,≪起案≫(奎 17277의 1·2) 제68책, 광무 2년 11월 7일, 訓令高等裁判所 第136號.

 경무사 김정근은 경무청 병력을 총동원하여 11월 4일 밤중부터 11월 5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상재(독립협회 부회장, 의정부 총무국장), 정 교(독립협회 평의원 겸 사법위원), 南宮檍(독립협회 평의원 겸 사법위원, 내부 토목국장), 李建鎬(독립협회 평의원, 중추원 의관), 方漢德(독립협회 평의원, 농상공부 광산국장), 金斗鉉(독립협회 평의원), 尹夏榮(독립협회 평의원, 중추원 의관), 廉仲模(독립협회 평의원, 탁지부 재무관), 韓致愈(독립협회 제소위원, 내부 참서관), 劉 猛(독립협회 평의원), 玄濟昶(독립협회 평의원, 중추원 의관), 鄭恒謨(독립협회 평의원), 洪正厚(독립협회 평의원) 등을 체포하였다.1077)鄭 喬,≪大韓季年史≫上, 290쪽. 윤치호(독립협회 회장, 중추원 부의장), 崔廷德(독립협회 평의원, 관립소학교 교사), 安寧洙(독립협회 평의원) 등은 체포당하기 직전에 도피하였다.1078)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4·5일.

 경무관은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사무소를 수색하여 독립협회의 모든 문서들과 도장들을 압수하였다.1079)法部 編,≪起案≫(奎 17277의 1·2) 제68책, 광무 2년 11월 7일, 訓令高等裁判所 第136號. 또 사무원 崔允根을 체포해 갔으며, 회원이 사무소에 오는 것을 엄금했으나 兪鶴柱가 사무소에 나타나자 체포하였다.1080)法部 編,≪司法稟報(乙)≫(奎 17279) 제3책, 광무 2년 11월 7일, 報告書 第58號.
≪독립신문≫, 1898년 11월 7일, 잡보<경무사 첫 정사>.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신했던 趙漢禹(독립협회 평의원)·卞河進(독립협회 평의원) 등은 스스로 나타나 함께 체포당하기를 원했으므로 이들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이 때 체포된 독립협회 지도자는 17명이요, 미체포자가 3명이 되었다.1081)法部 編,≪起案≫(奎 17277의 1·2) 제69책, 광무 2년 11월 10일, 訓令高等裁判所 第139號.

 조병식 등 수구파들은 원래 독립협회 지도자 20명을 밤중에 일거 체포하여 구명운동을 할 시간을 주지 않고 사형에 처해버릴 계획이었다.1082)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12일.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물인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체포하지 못하여 계획에 근본적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으므로, 조병식 등은 경무청에 다시 특명을 내려서 회장 윤치호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1083)法部 編,≪起案≫(奎 17277의 1·2) 제68책, 광무 2년 11월 7일, 訓令警務廳 第40號. 윤치호는 자기 집에서 11월 5일 새벽 5시경에 일어나 새 중추원 의관 선거준비를 하다가 순검들이 자기 집을 포위하고 있음을 알고, 비밀리 만들어 둔 뒷문으로 탈출하여 외국인 집에 은신해 버렸다.1084)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5일.

 또한 황제는 11월 5일(4일자 명의) 조칙을 발표하여, ①독립협회가 취당해서 방자하게 조정을 꾸짖고 대신을 핍박했으며, ②관민공동회를 열어 민중을 동원하고 고관들을 위협하여 참석시켰으니, ③독립협회를 비롯한 각종 협회는 모두 혁파하며, ④또한 대신들도 ‘헌의 6조’는 혼자 아뢰거나 상소를 올려도 될 것을 民會에 핍박당하여 ‘可’字를 썼으니 모두 파면하겠다고 발표하였다.1085)法部 編,≪起案≫(奎 17277의 1·2) 제68책, 광무 2년 11월 5일, 訓令警務廳 第44號.
≪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9월 2일, 詔.
이 칙령에 의하여 독립협회는 불법화되고 해체당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어서 조칙을 통하여, 관민공동회에 나가서 헌의 6조에 ‘可’字를 쓰고 서명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법무대신 徐正淳, 의정부 참정 李鍾健, 농상공부대신 金明圭, 탁지부대신서리 협판 高永喜, 의정부 참찬 權在衡 등을 모두 파면하였다.

 황제는 그 대신 친러수구파들인 조병식을 의정부 참정 겸 임시서리 법부대신 사무로, 閔種黙을 외부대신 겸 임시서리 내부대신 사무로, 閔泳綺를 탁지부대신으로, 南廷哲을 의정부 참찬으로, 朴齊純을 농상공부대신으로, 李鎬翼을 한성판윤으로, 김정근을 경무사로 정식 임명했으며, 한참 후에 다시 형식상 趙秉世를 의정부 의정으로 임명하였다.1086)≪承政院日記≫, 광무 2년 9월 22일, 詔.

 이에 따라 박정양을 행정수반으로 한 개혁파정부는 24일만에 붕괴되고,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친러수구파정부가 수립되었다. 이것은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 등이 1897년말∼1898년초 침략정책을 감행했을 때 야합했던 대한제국정부와 거의 동일한 친러수구파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087)≪駐韓英國領事館報告≫(Reports and Communications from the British Consul in Seoul), 1898년 11월 12일, 機密報告書 第108號.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친러수구파정부는 11월 7일 내각회의에서 독립협회의 혁파를 재확인하는 의결을 하고, 새로운 의회로서의 중추원관제와 헌의 6조를 모두 무효화하기로 결정하였다.1088)議政府 編,≪奏議≫(奎 17703), 광무 2년 11월 7일, 奏本 第27號 諸會爲名一切革罷事.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정체를 立憲代議 군주정체로 개혁하고 국정 전반에 대개혁을 단행하려 한 독립협회와 개혁파들의 사업은 성공 한 발 앞에서 무너지고, 다시 친러수구파 정권이 수립되어 독립협회와 개혁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1089)≪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89),<本省往來信>, 1898년 11월 8일, 發第75號, 獨立協會의 大臣排斥에 關한 詳報.

 이것은 황제 고종의 큰 배신이었다. 만민공동회의 헌의 6조에 대하여 조칙 5조까지 내린 황제가 의회설립 직전에 친러수구파의 모략에 현혹되어 국정개혁의 대사를 붕괴시켰을 뿐 아니라,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까지 비난하며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하는 것을 보고, 독립협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다. 황제의 독립협회에 대한 이러한 기습적 탄압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다.1090)≪駐韓日本公使館記錄≫8,<機密本省往信>, 1898년 11월 16일, 機密 第50號 獨立協會 示威運動에 關한 件.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일기에서 그의 배신감과 러시아·일본의 배후세력 흉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의 官報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정부가 친일 노예 兪箕煥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의 양자가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살찐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왜놈들!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시키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을 나는 참으로 희망한다(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5일).

 실제로<주한일본공사관보고>에서도 일본공사 대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독립협회 해산에 사전 동의했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1091)위와 같음.

 서울 시민들은 이때, 즉 1898년 11월 5일 독립관에서 실시할 동방 개벽이래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구경하기 위해 아침 식사 후 독립관으로 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또한 투표권을 가진 독립협회 회원들은 모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25명의 새 중추원(상원) 의관 선거를 위해 독립관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이 때 청천벽력과 같이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었고, 박정양의 개혁정부가 붕괴되었으며, 조병식의 친러수구파정부가 재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울분에 북받친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관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해서 항의시위를 시작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서울 시민들은 백목전 도매상가에 모여서 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경무청 문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1092)鄭 喬,≪大韓季年史≫上, 194쪽. 뒤이어 영어학교와 일어학교 학생들이 밀려왔다.1093)≪皇城新聞≫, 1898년 11월 8일, 別報<萬民共同會續錄>. 뒤이어 황국중앙총상회 회원들과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인 贊襄會 회원들도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하여 합류하였다.1094)≪독립신문≫, 1898년 11월 7일, 잡보<만민충애>. 이날(11월 5일) 오전 경무청 문 앞에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시위를 하게 되었다.1095)The Independent, November 10th, 1898, Molayo's Accounts of Recent Events in Seoul.

 경무청 문 앞에서 서울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11월 5일 만민공동회가 형성된 것이었다. 경무청 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형성한 시민들은 林炳吉 등 5명을 총대위원으로 선출하여 경무사 김정근에게 독립협회 지도자 체포를 항의하고 사건 경위의 해명을 요구하였다.1096)≪皇城新聞≫, 1898년 11월 7일, 別報. 경무사는 황제의 칙령에 따른 것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면서, 경무사와 한성판윤이 황제 칙령을 회중에게 낭독하였다.

 시민들은 분개해서 다투어 연설을 한 다음 自願就囚(체포·투옥을 자원)하기로 결의하고, 체포당한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자기들도 체포해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였다.1097)≪駐韓日本公使館記錄≫8,<本省往來信>, 1898년 11월 8일, 發第75號 獨立協會의 大臣排斥에 關한 詳報. 경무사는 당황하여 시민들은 체포대상자 명단에 없으므로 체포할 수 없으니 해산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1098)≪독립신문≫, 1898년 11월 7일, 잡보<만민충애>.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후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이제 새로이 만민공동회가 성립되어 조직적 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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