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1. 만민공동회의 활동
  • 3) 독립협회 복설운동

3) 독립협회 복설운동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의 석방에 성공한 후, 이에 물러서지 않고 익명서를 조작하여 독립협회의 애국자들을 함정에 몰아넣으려던 간세배들을 조사 재판하여 충신과 역적을 판별하고 독립협회의 복설을 윤허받은 후에야 물러가기로 결의하고, 만민공동회를 종로로 옮겨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석방된 독립협회 지도자의 일원으로 玄濟昶이 회장 윤치호를 방문했을 때, 윤치호가 강력하게 ①헌의 6조의 실시, ②조병식 등의 추방, ③독립협회의 복설이 달성될 때까지 만민공동회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따른 것이었다.1136)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1월 10일.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들은 종로(운종가)로 장소를 옮기어 만민공동회 제7일째인 11월 11일에도 만민공동회 대회를 계속하였다.

 황제와 정부측은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석방하면 만민공동회가 해산되리라고 예측했다가, 만민공동회가 여전히 시위를 계속하여 익명서 조작에 간여한 수구파 인사들의 처벌을 요구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황제와 정부는 만민공동회 장소에 여러 차례 고관들을 보내어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만민들은 이를 거절하고 철야하면서, 11월 12일 韓致愈가 지은 상소를 尹吉炳을 소수로 하여 올려 ①간세배의 재판, ②헌의 6조의 실시, ③백성들이 가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에 의한 정부 재조직, ④독립협회 복설, ⑤조병식·민종묵 등 2흉의 집권 때의 대외관계문서 공람 등을 요청하였다.1137)≪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9월 29일, 前承旨尹吉炳等疏.

 황제 고종은 만민공동회가 해산하지 않고 있는 문제의 초점이 독립협회 복설에 있다고 판단하고, 독립협회 복설을 억제하는 대신 언로를 열어 대체해 주는 방안으로 칙령 제37호로서 긴급히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였다. 이 재개정된 중추원 관제는 의회의 성격을 완전히 없애고, 인민협회에 의한 민선의관 선출제도도 삭제해서 의관들을 모두 황제가 칙임하도록 만든 것이었다.1138)議政府 編,≪奏議≫(奎 17703) 제24책, 광무 2년 11월 12일, 奏本 第238號 및 中樞院官制中 改正에 關한 件.

 또한 이때 황제는 관민공동회에 출석하여 ‘可’字를 쓴 죄로 해임된 박정양·徐正淳·李鍾健·金明圭 등의 징계를 특면하고, 이종건을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하였다.1139)≪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9월 29일, 詔. 이것은 모두 만민공동회의 투쟁에 밀리어 황제와 수구파가 타협책으로서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독립협회 복설과 헌의 6조 실시와 간세배 재판이 있을 때까지 만민공동회를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만민들은 만 9일 동안 연일 철야하면서 종로에서 시위를 계속하다가, 10일째인 11월 14일에는 보부상들의 동태 보고를 듣고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高永根을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추대하고 조직을 강화하였다. 고영근은 원래 황국협회 부회장직을 맡았다가 황국협회가 보부상으로 구성된 수구파의 폭력단체임을 알고 황국협회를 탈퇴하여 만민공동회에 참가해서 적극 활동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만민공동회는 압력을 가중시키기 위해 11월 15일에는 대회장소를 종로에서 仁化門 앞으로 옮기었다. 인화문 앞에서 다시 金嘉鎭을 소수로 하여 한치유가 지은 상소를 올리었다. 그들은 이 상소에서 ①독립협회 복설, ②조병식·민종묵·유기환·이기동·김정근 등 5흉의 처벌, ③헌의 6조의 실시, ④어질고 능력있는 인물의 대신 임명 등 4개항을 실시하여 나라를 평안히 하고 국민을 안심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1140)≪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0월 2일, 議官金嘉鎭等疏. 그 사이 전국 각지에서 민중들의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와 성원은 계속 증가하여 의연금과 의연품이 계속 답지하였다.

 황제와 정부는 만민공동회가 11일째인 11월 15일에도 철야하면서 그들의 요구조건을 강경하게 주장하자 독립협회 복설이 불가피함을 알고 독립협회의 활동 범위를 한정하는 ‘酌定範圍’를 하여 독립협회 복설을 허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12일째인 11월 16일에 상소를 올려 독립협회 복설의 조건으로 독립협회 활동에 대해 작정범위하려는 것은 독립협회와 국민의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무조건의 독립협회 복설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1141)≪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0월 4일, 從二品高永根等疏.

 한편 수구파들은 이기동·길영수·유기환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의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 올리면서 황국협회 세력을 강화하여 만민공동회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기동 등은 황제에게 만민공동회가 대궐을 둘러싸고 반드시 불란서혁명과 같은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밤낮으로 모함하여 상주하였다.

 만민공동회 제13일째인 11월 18일에도 시민들은 철야시위를 계속하면서 만민공동회 요구조건의 실행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魚瑢善은, 지금 관민이 합동해서 백성과 나라의 대사를 도모하여 나아가려 하는데 백성(평민)만이 사찰과 사무원을 선정하여 주야로 노고하고 搢紳은 한사람도 참석치 아니하니, 진신으로 도사무장 1인을 정하고 사무장 15인을 정하여 사무장 1인이 사무원 9인씩을 선정하여 사무를 조직하자고 제안하였다.1142)≪皇城新聞≫, 1898년 11월 18일, 雜報<會上消息>. 이에 회중은 金宗漢를 도사무장으로 정하고 그 나머지 여러 사람으로 사무장을 정한 후에 여러 관원과 진신들에게 8백여 장의 청첩을 발송하였다. 이에 응하여 만민공동회에 나온 진신들의 수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1143)鄭 喬,≪大韓季年史≫上, 331쪽.

 이 때 만민공동회에 적극 참가한 진신의 명단을≪獨立協會沿歷略≫에 의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회장 또는 회장대리급:劉元杓·金敎獻·南宮檍·柳 瑾·金石恒·高永根 등

② 도총무부장·총무장·부총무급:劉 猛·玄 采·鄭淳萬·羅 喆 등

③ 편집부장급:張志淵·尹孝定·成樂英·方漢德 등

④ 총무부 과장 및 부장급:鄭雲復·金在豊·鄭耆朝·尹履炳·安昌浩·呂永祚 등

⑤ 재무부 과장 및 부장급:金明濬·李昇薰·徐相大·申奎植·徐相敦·許 蔿·宋秀萬 등

⑥ 선전부 과장 및 부장급:梁甸伯·尹益善·金福漢·崔東植·慶光國·吳基鎬·金寅植·李承晩·羅壽淵 등

⑦ 서무부 과장 및 부장급:李東輝·元世性·申敬植·奇宇萬·李學淳·池錫永·李晩禱·全德基·崔永年·李學在 등

⑧ 지방부 과장 및 부장급:奇山禱·安秉瓚·徐相八·梁在根·鄭應卨·李鍾臺·弘在七·沈日澤·林炳恒·李根雨 등

⑨ 내무부·문서부 서기장 및 과장·부장급:李商在·申興雨·金奎植·申采浩·李起賢 등

⑩ 간사부 과장 및 부장급:盧伯麟·李東寧·白性基·申斗熙·李熙斗·李 甲·魚 潭·李秉奎·金明煥·朴勝煥·權重錫·柳時南·玄英運·權重洛·尹致誠·李南夏 등

⑪ 조사부·외무부 과장 및 부장급:李會臣·趙匡夏·李敏軾·李敏燮·趙悳夏·朴汶圭·閔智鎬·李鎬成·李龍九·李晦九 등

⑫ 교섭 외교부 과장 및 부장급:李夏榮·尹致昊·李采淵·李漢應·申能雨·朴容萬 등

⑬ 문교부 과장 및 부장급:金允植·朴殷植·呂圭亨·李鍾永·申箕善·李道宰·李建昌 등(≪獨立協會沿歷略≫중의<獨立協會>참조).

 만민공동회가 시민들뿐만 아니라 진신들까지 간부급으로 흡수하여 조직을 정비 강화하면서 개혁운동을 전개한 것은 이 시민·민중단체가 점차 독립협회로부터 일단 분리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크게 발전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민공동회는 이렇게 강화된 조직을 갖고 인화문 앞에서 연 13일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철야 상소시위를 전개하고 있는 동안에 수구파들은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황국협회 세력을 전국에서 서울로 집결시켜 만민공동회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풍운이 바야흐로 서울 하늘에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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