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1. 만민공동회의 활동
  • 5) 황제 친유와 중추원 의관 임명

5) 황제 친유와 중추원 의관 임명

 만민공동회는 11월 23일 밤 해산하여 정부가 약속한 3개조인 ①8흉의 체포와 재판, ②보부상 혁파, ③대신의 인재 택용 등의 실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시한인 11월 25일까지 정부측의 뚜렷한 실행의 흔적이 보이지 않자, 만민들은 11월 26일 오전 10시를 기하여 다시 종로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1월 26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여 대규모의 만민공동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보부상들은 수구파의 지원을 받으면서 아직도 해산하지 않고 마포에 屯聚하고 있었고, 종로에서는 시민들의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다시 개최되었으므로,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의 대치는 11월 23일 이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되어 다시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다.

 황제는 사태가 다시 심각하게 됨을 보고 親諭에 나서서 사태를 황제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수습해 보려고 하였다.1167)≪駐韓英國領事館報告≫(Reports and Communications from the British consul in Seoul), 1898년 11월 28일, 機密報告書 第114號. 황제는 만민공동회에 대하여 오후 1시에 200명의 대표를 선정해서 정동의 경운궁 문밖에서 대기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황제는 또한 황국협회에 대해서는 오후 3시에 역시 200명의 대표를 선정하여 대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에 만민들은 만민공동회 장소를 종로로부터 정동으로 옮기어 질서정연하게 대회를 열고 대기하였다.1168)≪제국신문≫, 1898년 11월 28일, 별보 및 잡보.

 황제 고종은 수백 명의 시위대로 정동 일대를 엄중히 경비케 하고, 각부 대신 및 외국 공사·영사와 그 부인들을 조치하여 좌우에 분립시켰으며, 시위대 군인들을 양편에 정렬시킨 다음, 오후 1시에 작은 가마를 타고 돈례문(경운궁 남문)의 군막에 친림하였다.1169)鄭 喬,≪大韓季年史≫上, 351쪽. 외국 공사·영사들은 일종의 증인이 된 셈이었다.1170)≪駐韓美國領事館報告≫(Communications from the Secretary of State from U. S. Representatives in Korea:H. N. Allen), 문서번호 162, 1898년 11월 28일, Political Agitation in Korea. 황제가 직접 국민 대표들을 상면하러 대궐밖에 자리를 만든 것은 조선왕조 개창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후 2시 30분이 되자 내부대신서리가 황명을 받고 회중에 와서 만민공동회측 대표를 불렀으므로, 200명의 대표가 그를 따라 인화문 밖 황제가 친림한 탑전으로 들어가 황명을 기다리었다. 황제는 만민공동회 대표 200명에게 만민들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겠다고 친히 하교하였다.1171)≪독립신문≫, 1898년 11월 28일,<국태민안>.

 황제는 이와 함께 만민공동회에 농상공부대신 權在衡을 통하여 칙어를 전유하였다. 황제는 이 칙어에서 ①군신 상하가 信과 義를 지키며, ②현명하고 능력있는 이를 전국 안에서 구하고, ③아름다운 진언을 초야의 백성들에게서 캐어 쓰며, ④오늘 새벽까지의 일은 유죄·무죄와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모두 씻어버리고, ⑤민회와 보부상의 양민이 모두 짐의 적자이므로 서로 돕고 친해서 돌아가 각기 그 생업을 편안히 하라고 강조하였다.1172)≪皇城新聞≫, 1898년 11월 28일, 別報.

 이 칙어를 전달한 다음, 권재형은 이제는 회민이 퇴거하겠는가 아니하겠는가 응답을 요구하였다.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은 자기 의견으로서 봉답하기는 어려우므로 회원의 의견을 묻겠다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이를 허락했으므로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을 결의하여 상주하였다.

① 독립협회를 복설할 것.

② 대신들을 잘 선택하여 임명할 것.

③ 소위 보부상은 이제 태생적 폐단이 적지 않으니, 비록 칙령으로 혁파했으나 다시 명목을 바꾸어 앞서의 폐단을 답습할 염려가 있으므로 영구히 혁파할 것.

④ 법령의 규정을 실시하고 전일 헌의 6조와 조칙 5조를 반드시 실시할 것.

⑤ 조병식·유기환·이기동·김정근·민종묵·홍종우·길영수·박유진 등을 처벌할 것(鄭 喬,≪大韓季年史≫上, 352쪽).

 황제는 권재형의 상주를 통하여 만민공동회의 5개 조항의 요구 조건을 듣고, 만민공동회 회원 중 3인을 다시 선출하여 직접 면대해서 상주하도록 명령하였다. 만민공동회는 고영근·윤치호·이상재 등을 총대위원으로 선출하여 다시 면대해서 상주하게 하였다. 고영근·윤치호·이상재 등은 ①5흉의 재판, ②만민이 신임하는 대신의 임명, ③헌의 6조의 실시를 주청하고 물러나왔다.1173)The Independent, November 29, 1898, Molayo's Reports.

 황제는 이에 법부대신 한규설을 통하여 칙유하기를, ①복설하는 독립협회는 국내의 문명 진보를 토론하는 데 한정하고 정부의 정책 시행에 대한 용훼는 불허하며, ②8신 중 5신은 법에 따라 유배하라는 조칙을 이미 내렸으니 그 부처에서 조만간 거행토록 하겠고, ③홍종우 등 3신은 商民의 두령이니 어찌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④보부상 혁파는 조칙을 이미 반포했거니와 농상공부로 하여금 다시 상의해서 민폐가 없도록 조치할 것이요, ⑤헌의 6조는 차례로 실시하여 국민에게 신의를 보일 터이니, 국민들은 그리 알라고 하였다.1174)≪皇城新聞≫, 1898년 11월 28일, 別報.

 만민공동회는 이에 대하여, ①칙유하신 가운데 3신은 폐하의 의사가 그러하시니 이것은 황제의 처분에 따르겠으며, ②5신을 이제 법률과 장정을 실시하는 날을 당하여 재판하지 않고 유배하면, 그 죄를 어디에 근거하며 그 형률을 어디에 따를 것인지 모르게 되니, 반드시 재판하여 법률에 따라 처형케 해달라고 응답하였다.

 황제는 이에 탁지부대신을 통하여, 민원이 그렇다면 5신은 마땅히 재판을 받도록 하겠다고 응답하였다. 이것은 황제가 사실상 만민공동회의 요구 조건을 모두 승낙한 것이므로,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기쁨에 넘쳐 만세를 세 번 부르고 물러 나와 해산하였다.1175)鄭 喬,≪大韓季年史≫上, 353쪽.

 황제는 이날 오후 4시에 보부상 대표 200명을 불러서 역시 권재형을 통하여 칙어를 전포하였다. 이에 대해 보부상들은 홍종우·길영수·박유진 등을 총대위원으로 선정하여 다음과 같은 3개 조건을 청원하였다.

① 일찍이 商務所의 허가를 얻어서, 충성스러운 분노가 일어나 만민공동회와 쟁투를 야기했다가, 정부 대신들이 신 등의 진의를 오인하여 상무소를 혁파하였으니, 신 등의 충정을 불쌍히 살피시어 商理局과 각 지방의 任房을 복설하여 생업을 편안케 해 줄 것.

② 만민공동회는 그 이름은 다를지라도 독립협회와 일체이니 함께 혁파할 것

③ 조병식 등 8인은 무죄임을 밝히어 모두 석방할 것(鄭 喬,≪大韓季年史≫上, 354쪽).

 황제는 이에 대하여, ①원래 상리국과 농상공부는 성격이 같은 것이니 결코 허가할 수 없으나, 너희들의 생업은 편안케 하도록 농상공부로 하여금 절충 조처하도록 할 것이며, ②독립협회의 성질은 그 전과 다름을 이미 칙교로 내려 알렸고, ③8인은 마땅히 재판을 열어 그 죄의 유무에 따라 처분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고 물러가라고 하였다. 이에 보부상들은 정동 병문에 나와서 만세를 삼창하고 물러갔다.1176)≪皇城新聞≫, 1898년 11월 28일, 別報.

 이날 황제 고종의 친유에는 각국의 신사숙녀가 모두 예복을 입고 참관하여 이 광경을 보았으며, 각국 공사·영사들이 모두 정숙히 시위하고 서서 경의를 표하였다.1177)≪駐韓日本公使館記錄≫8,<機密本省往信>, 1898년 12월 13일, 機密 第56號 韓帝謁見 始末 및 敦化門 親臨의 件. 또한 시민들로서 이 광경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담을 쌓은 것과 같이 많았다. 이날의 황제 친유는 황제 고종의 입장에서는 크게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만민공동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뜻으로 중추원 관제를 실시하기 위해 11월 29일 중추원 의관 50명을 선정 지명하였다.1178)議政府 編,≪奏議≫(奎17703) 제24책, 광무 2년 11월 29일, 奏本 第252號 中樞院議官會議薦選叙任事. 이 때 지명된 중추원 의관은 계파별로 보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황제파 계열이 17명이었다. 즉 황제와 황국협회 등 수구파가 33석으로 3분의 2석을 차지하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개혁파가 17석으로 3분의 1석을 차지하도록 한 것이었다.

 개혁파(독립협회·만민공동회)와 수구파(황제파·황국협회·도약소 등) 의관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개혁파(독립협회·만민공동회):高永根·尹始炳·南宮檍·劉 猛·玄濟昶·尹夏榮·洪在箕·梁弘黙·鄭恒謨·崔廷德·申海永·李承晩·卞河璡·孫承鏞 이상 17명

수구파·왕당파(황제직계파·황국협회·도약소 계열):李敎奭·洪鍾宇·李觀濟·沈殷澤·李時宇·元世性·尹履炳·李秉膺·金炳馹·金奎弼·宋達顯·金永祐·尹始永·鄭寅穆·李德夏·崔錫彰·金東植·朴永駱·尹奭榮·兪奭濬·李挨眞·姜相驥·柳渡秀·都鎭三·朴來秉·李秉召·金相範·李圭煥·李南珪·洪鍾億·朴夏成·李琦·宋秀萬 이상 33명

 (議政府 編,≪奏本存案≫(奎 17704) 제3책, 광무 2년 11월 29일, 奏本 第252號).

 결국 황제와 수구파의 지지세력이 총 정원의 3분의 2에 달하는 33석이었다. 황제와 수구파들은 자기의 지지세력으로 하여금 중추원의 3분의 2석을 차지하도록 배정하여 중추원을 황제와 정부의 자문기관으로 개편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정부는 중추원 의관에게 월급을 30원씩 지급하도록 하고, 개원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황제와 정부의 이러한 중추원 의관 임명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황제와 수구파를 앞으로 포섭해 나가기 위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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