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1. 만민공동회의 활동
  • 7) 국정개혁 요구와 중추원 의관의 인재 투표 선출

7) 국정개혁 요구와 중추원 의관의 인재 투표 선출

 만민공동회를 12월 6일 종로에서 재개한 시민들은 고영근을 소두로 하여 긴급히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었다. 그들은 이 상소에서 ①헌의 6조의 실시, ②5흉의 재판과 처벌, ③보부상 혁파의 즉각 실행을 요구하였다.1190)≪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0월 23일, 從二品高永根等疏.

 만민들은 계속 2차 상소와 3차 상소를 올리면서 황제가 친히 약속한 국정개혁의 조속한 실행을 촉구하였다. 시민들이 만민공동회를 재개하여 다시 계속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자, 조병식·민영기 등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기어이 共和政治를 실현하려 한다고 모략하였다. 황제는 이 모함을 믿고 길영수·홍종우 등에게 비밀히 명령을 내려 보부상들을 다시 소집케 했으며, 또한 민영기에는 탁지부의 은으로 보부상들의 경비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황제는 시위대 대대장에게 명하여 경운궁 전후 좌우의 길과 방곡을 더 엄중히 경비하도록 궁궐 호위를 강화하였다.1191)鄭 喬,≪大韓季年史≫上, 368쪽.

 12월 9일과, 10일에는 기독교도들도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합세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알렌(H. N. Allen)과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에게 압력을 넣어 기독교도들을 철수시켰다.1192)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舊韓國外交文書≫11(高麗大 出版部, 1967∼1973),
≪美案≫12, 문서번호 1875, 1898년 12월 12일, 負商投書에 따른 基督敎人의 抗議에 關한 解明.
알렌도 자기가 기독교들의 소요를 저지시켰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1193)≪駐韓美國公使館報告≫(Communications to the Secretary of State from U. S. Representatives in Korea:H. N. Allen), 문서번호 167, 1898년 12월 23일, On the Part Taken by Native Christians in Recent Political Agitation in Seoul. 그러나 만민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국정 개혁의 실시를 요구하며 연일 연야 완강한 철야시위를 전개하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12월 11일에는 관민공동회 때의 헌의 6조와 조칙 5조를 인쇄하여 이튿날 회원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반포하였다. 이것은 황제와 정부에 대하여 그 때 이후 관·민간에 합의한 국정개혁의 실시를 더욱 강력히 요구하는 압력을 넣고 그 조속한 실행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민공동회는 또한 12월 12일부터는 대회장소를 종로로부터 광화문의 六曹 앞 각부 문전으로 옮기어 정부에 더욱 직접적인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1194)≪皇城新聞≫, 1898년 12월 13일, 雜報<共請部官>.

 시위대 제2대대장 金明濟는 만약 만민들이 정동 근처에 이르면 처음에는 총개머리판으로 쳐서 이를 저지하다가, 물러가지 아니하면 사살해도 좋다고 발포를 승낙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병정들은 백성과 나라의 일을 성심껏 추진하는 만민들에게는 죄가 없으므로 차라리 병정을 그만두고 만민과 함께 의로움을 지켜 죽을지언정 만민을 총살할 수는 없다고 불복하였다.1195)≪독립신문≫, 1898년 12월 15일, 잡보<병정의리>. 만민공동회는 김명제의 병정들에 내린 명령을 듣고, 우리는 마땅히 죽을 땅에서 죽겠다고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대응하면서 그들의 결의를 다짐하였다.1196)鄭 喬,≪大韓季年史≫上, 378쪽.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운동이 서울에서 완강하게 지속되면서 점차 가열해짐에 맞추어 지방으로부터의 지원도 더욱 증가되었다. 각 지방에서는 독립협회에 청원하여 독립협회 지회의 설립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독립협회는 우선 12월 12일경 충청북도 沃川지회의 설립을 인가해 주는 한편, 12월 13일에는 각 군지회 설립 신청자들에게 답장을 냄과 동시에, 지회인가조례(7개조)와 지회세칙(7개조)을 鄭 喬 등 규칙개정 겸 제소위원들로 하여금 제정해서 각 지방에 발송하였다.1197)≪독립신문≫, 1898년 12월 15일, 잡보<본회답장>.

 전국 각지에서 만민공동회 재개를 지지하는 격려문과 의연금이 계속 답지했으므로, 만민들은 더욱 사기가 앙양되어 수구파 대신들의 해임과 국정개혁의 조속한 실시를 요구하면서 연일 연야 철야시위를 계속하였다.

 만민공동회는 12월 14일 광화문 앞에서 만민들을 폭행하여 충돌을 일으키려고 목봉을 감추어 침투한 보부상 간부 4명을 적발하여 침투 목적을 추궁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①윤치호·고영근·이상재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②서울시내 주요 보부상 도소 3곳에 보부상 및 몽둥이꾼 수백 명을 매복시켰다는 것, ③보부상의 경비 19만 냥이 황제의 내탕금에서 공급되었다는 것, ④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 위해 白民會가 조직되었는데 그 자금 2,000원을 탁지부 대신 민영기가 조달했다는 것 등을 자백하였다.1198)The Independent, December 20, 1898, Molayo's Reports.

 황제는 만민공동회가 해산하기는 커녕 날로 그 지지세력이 증대될 뿐 아니라 자기의 보부상 재정지원까지 공격대상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무마책으로서 12월 15일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한성판윤, 金永準을 경무사로 임명하였다.1199)≪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1월 초3일, 詔.

 만민공동회는 12월 16일 광화문 앞에서 적발한 보부상 간부 4명을 경무관에게 인도하여 그들의 음모를 조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1200)法部 編,≪起案≫(奎 17277의 1·2) 제70책, 광무 2년 12월 17일, 訓令高等裁判所第149號.

 만민공동회는 재개 12일째인 12월 17일에도 경무청 문 앞에서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만민공동회는 광화문 앞에서 적발하여 경무청에 인계한 4명의 보부상 간부들이 자백한 사실을 중심으로 황제께 상소를 올리었다. 그들은 이 상소에서 ①보부상을 혁파했다고 하지만 皇國商務協會라고 개명하여 황제의 분부를 받아 행동하고 있고, ②보부상들의 경비는 황제의 하사금과 탁지부의 지출이라 하며, ③암살의 순서는 고영근·윤치호·이상재의 순이라 하고, ④白民會는 만민공동회를 반대하기 위한 것이며 그 경비는 군부대신 민병석과 권동수가 탁지부에서 입안하여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지출했다 하니 조사해서 재판에 붙일 것이며, ⑤민영기·심상훈·김명규 등 3대신의 해임, 조병식·민종묵·김정근 등 3대신의 징계, 유기환·이기동 2흉의 재판 및 보부상들의 엄단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1201)≪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1월 12일, 從二品高永根等疏. 또한 이날 만민공동회는 총대위원 이건호·이승만을 경무사 김영준에게 파견하여 김영준의 사직을 권고하였다.1202)鄭 喬,≪大韓季年史≫上, 387쪽.

 이 때 황제는 만민공동회의운동을 해산시키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중추원을 열어 여기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요구 조건을 다루게 하고, 만민공동회는 해산케 할 것을 구상하였다.

 황제는 12월 14일 정부에 대하여 중추원 개원 준비를 명했다.1203)≪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1월 1일, 詔. 중추원 의장 李鍾健은 중추원 의관들을 소집하여 12월 15일 오후 4시에 개원해서 부의장을 선출한 결과 윤치호가 선출되었다.1204)議政府 編,≪奏議≫(奎 17703) 제24책, 광무 2년 12월 22일, 奏本 第258號 圈點多居人尹致昊依薦任命事.

 정부자문기관으로 복구된 중추원이 12월 16일 오전 11시에 다시 개원되자, 독립협회 출신 의관들을 비롯하여 다수의 의관들은 헌의 6조와 조칙 5조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출신 의관 崔廷德은 만민이 각부 문 앞에서 연일 만민공동회를 열고 있는데 중추원이 정부와 국민 사이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며, 백성들이 귀가하여 생업을 편안히 해서 살게 할 방책의 하나로 정부 대신에 임명할 만한 인재로서 물망있고 법률과 규칙을 어김없이 꼭 실시할 사람을 11명 선발하여 정부에 천거해서 정부로 하여금 황제에게 주품하여 쓰도록 하자고 동의하였다.1205)議政府 編,≪中樞院來文≫(奎 17789) 제3책, 광무 2년 12월 23일, 照覆 第1號.

 이 동의가 재청을 얻어 의제로 채택되어 정부 대신급에 임명할 11명의 材器可堪者(재주와 그릇이 대신직책을 담당할 수 있는 자)를 공천하기로 의결되었다. 중추원 의관들의 투표에 의하여 다음의 11명이 재기가담자로 뽑혀 천거되었다.

閔泳駿……18표  閔泳煥……15표  李重夏……15표  朴定陽……14표

韓圭卨……13표  尹致昊……12표  金宗漢……11표  朴泳孝……10표

徐載弼……10표  崔益鉉……10표  尹用求…… 8표

         (The Independent, December 20, 1898, The Privy Council)

 이 중에서 개혁파로는 민영환·이중하·박정양·한규설·윤치호·김종한·박영효·서재필 등 8명이 투표로 천거된 것이었고, 수구파로는 민영준·최익현·윤용구 등 3명이 천거된 것이었다.

 11명의 재기가담자 중에 수구파가 3명이나 천거된 것은 수구파 의관들의 추천에 독립협회 출신 의관들도 이 3인에 대해서는 애국적 수구파로 동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민영준은 약간 친청적 경향은 있었으나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고, 최익현과 윤용구는 일본의 침략에 극히 비판적인 인물로서, 모두 자주독립 문제에 있어서는 독립협회와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논란이 일어났던 것은 박영효와 서재필의 경우였다. 박영효는 대역죄인의 죄명을 쓰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고, 서재필은 국적이 외국인으로 되어 있었다. 정항모 등 일부 독립협회 출신 의관들은 박영효와 서재필의 천거를 명단에서 제외하자는 수정 동의안을 제출하였고 홍정후가 이를 재청하여 표결에 붙여졌다.1206)議政府 編,≪中樞院來文≫(奎 17789) 제3책, 광무 2년 12월 26일, 照覆 第2號 鄭恒謨現告書 및 洪正厚現告書. 그러나 이미 의결된 것이니, 박영효는 공개재판으로 죄의 유무 판정을 거치도록 하고, 서재필은 국적의 재입적을 거치도록 하여 공천하기로 원안이 확정되었다.1207)議政府 編,≪中樞院來文≫(奎 17789) 제3책, 광무 2년 12월 26일, 照覆 第2號 魚瑢善現告書.

 독립협회가 중추원에서 재기가담자 11명을 공천한 것은 실제로는 이 11명을 대신들로 한 개혁정부 수립을 요청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공천자 수를 11명으로 한 것은 당시의 정부 조직상의 대신급 직위의 수에 맞춘 것이었다.1208)議政府 編,≪奏議≫(奎 17703) 제2책, 광무 2년 12월 9일, 議政府會議錄. 그리고 당시의 인물들을 고찰해 보면 중추원이 천거한 이11명이 당시 생존했던 고급관료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애국적이고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립협회는 이 11명으로 강력하고 개혁적인 신정부를 수립하고, 중추원을 장차 의회로 개편해 나가면서, 사실상 전제군주체제를 입헌대의 군주체제의 방향으로 전환시켜 나감과 동시에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려고 한 것이었다.

 만일 황제 고종이 중추원에서 공천한 11명으로 신정부를 수립해서 개혁정책을 실시한다면 만민공동회는 자발적으로 해산될 뿐 아니라,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세력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나라의 자주독립과 대개혁이 추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추원의 11명 대신후보자 천거는 황제 고종에게 중요한 결단을 요청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독립협회 출신 중추원 의관들은 11명 재기가담자 투표선출 결과를 만민공동회에 공포하고 그 사후 인준을 구하였다. 이에 만민공동회는 일본에 망명해 있는 박영효를 소환하여 법부에서 그 죄의 유무를 재판해서 죄가 있으면 다스리고 죄가 없으면 징계를 면하여 서용하자고 결의하였다.1209)≪皇城新聞≫, 1898년 12월 20일, 雜報<請餘裁判>.

 중추원의 11명 재기가담자 공천 결의안은 곧 정부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그 11명중에 황제가 기피하는 인물이며 대역죄인의 죄명을 지고 있는 박영효가 들어있는 것이 트집을 잡히게 되었다.

 중추원에서 재기가담자 11명을 천거하고 있는 동안에도 만민공동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만민공동회 재개 13일째인 12월 18일은 일요일인데다가 그 동안 만민공동회가 광화문 육조 앞에서 개최되어 행정사무에 지장이 초래될 우려가 있었고, 또 관리들이 사무를 게을리 하면서 허물을 만민공동회에 돌릴 우려가 있었으므로, 이날부터는 만민공동회를 종로에서 개최하였다.1210)≪皇城新聞≫, 1898년 12월 19일, 雜報<開會鍾街>.

 황제 고종은 그간의 만민공동회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과 중추원의 재기가담자 11인의 천거에 의한 개혁정부 수립 요구에 부딪혀 대책 수립에 부심하고 있었다. 특히 중추원 천거의 11명 속에 일본에 망명해 있는 박영효가 들어 있는 사실은 황제로 하여금 결단을 요구하게 하는 상황을 조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內部 주사 李錫烈 등 33인이 연명 상소하여 박영효의 소환과 서용을 주장하였다.1211)≪駐韓日本公使館記錄≫8,<本省往來信>, 1898년 12월 27일, 發第88號 朴泳孝召喚의 建議에 關한 件. 이 때 또한 독립협회내의 소장급진파들인 이건호·玄公廉·宋寧洙·崔廷德·魚瑢善·이승만 등이 중심이 되어 박영효의 귀국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하고 있었다.1212)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2월 27일.

 황제 고종은 이 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탄압하고 개혁정책에 반대한 것이 만민공동회운동을 불러온 것이라 생각하여 후회하는 마음이 있어서, 장차 박영효를 소환하여 우선 만민공동회를 진무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할 뜻이 있었다.1213)鄭 喬,≪大韓季年史≫上, 392쪽. 즉 황제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정부 수립과 개혁정책의 실시를 고려하였다. 그러나 민영기 등이 황제를 오도하여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고 주장하였다.1214)鄭 喬,≪大韓季年史≫上, 392∼393쪽. 황제는 우선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방책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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