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2. 수구파 및 외세의 독립협회세력 탄압
  • 1) 수구파 및 외세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탄압

1) 수구파 및 외세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탄압

 황제 고종은 수구파의 진언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해산·탄압할 경우,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떠할까를 알아보기 위해 영국·독일·러시아·미국의 공사와 영사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때 외국의 공사·영사들은 순검(경찰)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도록 권고하였다. 황제가 순검의 힘이 약하니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킴이 어떠한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것은 外臣들이 알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하면서 찬의를 나타내지 않았다.1215)鄭 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57), 390쪽.

 이때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12월 13일(1898) 일본으로부터 본국의 훈령을 갖고 귀임하여 15일과 18일에 陛見을 하게 되었다. 수구파와 궁중은 비밀리에 20만 원의 뇌물을 하사하고, 폐견 때에 “군대로 민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가토는 “외신의 나라에서도 유신의 초기에 군대의 용맹(兵勇)으로써 민회를 제압한 일이 있다”1216)위와 같음.고 응답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였다.1217)≪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89),<機密本省往信>, 1898년 12월 20일, 機密 第54號 事變에 關한 第一次 謁見의 件 및 別紙 一八九八年 十一月 十日 右件 謁見 始末. 일본공사 가토는 무려 3시간의 폐견을 하면서 민회가 처음에는 충군애국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난민의 부류에 빠져있다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규탄하였다.1218)≪駐韓日本公使館記錄≫9,<機密本省往>, 1899년 2월 27일, 機密 第5號 加藤公使 歸任後의 政況 및 民會 解散의 件.

 일본공사 가토가 노린 것은 독립협회의 해체였다. 일본측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 지배에 대항할 한국내의 저항세력이 궁극적으로 독립협회세력이라고 보고,1219)≪駐韓日本公使館記錄≫9,<機密本省往1·2·3>, 1899년 5월 17일, 機密 第36號 加藤公使在任中 事務經過大要 記述具申의 件 가운데 21번 獨立協會의 運動. 11월 5일의 독립협회 해산과 17명 독립협회 지도자 구속 때에도 배후에서 이를 지원하고 조종했으며,1220)尹致昊,≪尹致昊日記≫ 5(國史編纂委員會, 1975), 1898년 11월 5·12일. 이번에도 이 기회에 독립협회세력을 붕괴시킬 공작을 전개한 것이었다.

 일본측은 한편으로 이미 12월 12일부터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방문하여 독립협회측에서 박영효를 소환하여 서용할 것을 권고했다가 윤치호에 의해 거절되자,1221)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2월 27일. 이번에는 일본유학생 출신인 독립협회 소장 신진파들에게 박영효의 소환과 서용을 권고하여 박영효 문제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1222)≪駐韓日本公使館記錄≫8,<本省往來信>, 1898년 12월 27일, 發第88號 朴泳孝 召還의 建議에 關한 件.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일본공사 가토는 박영효의 소환 요구에 분격하고 있는 고종에게 군대 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해산과 독립협회 탄압을 적극 권고한 것이었다.1223)≪駐韓日本公使館記錄≫7,<加藤公使時代極秘書類>, 1897년 日字不明, 朴泳孝 逮捕 問題에 關한 件.

 고종은 일본공사 가토의 진언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1224)鄭 喬,≪大韓季年史≫上, 390쪽. 황제는 이미 군대 사용에 대해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1225)≪駐韓英國領事館報告≫(Reports and Communications from the British Consul in Seoul), 1898년 12월 22일, 機密報告書 第123號. 일본측의 이 같은 진언을 받고 군대 사용을 확실하게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만민공동회는 12월 18일에도 수구파 관료들의 추방과 ‘재기가담자’에 의한 개혁정부 수립을 요구하면서 대회를 계속하였다. 황제는 閔泳綺를 평안남도 관찰사로, 경무사 金永準을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있는 수구파 대신들을 지방을 내보내는 한편, 신임 경무사에는 贊政 尹雄烈을 겸임시켰다. 황제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의구심을 풀기 위하여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의 부친 윤웅렬을 특히 경무사에 임명했으나, 모두 형식에 불과하였고, 만민공동회 회원들도 역시 이를 믿지 아니 하였다.1226)≪駐韓日本公使館記錄≫8,<本省往來信>, 1898년 12월 28일, 發第89號 閣員 交迭의 件.

 만민공동회 재개 14일째인 12월 19일, 종로에서 개최된 만민공동회는 총대위원 12인을 정부에 보내어 閔丙奭의 군부대신 임명과 金明奎의 찬정 임명의 이유를 질문했으며, 총대위원을 內部에 보내어 서면으로 민영기와 김영준의 관찰사 임명을 상주하여 해임해 주도록 요구하였다.1227)≪독립신문≫, 1898년 12월 20일, 잡보.

 황제는 이날 오후 3시에 漢城 소윤과 경무사를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만민공동회가 해산하지 않으면 매우 엄중히 처벌할 것이므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적인 칙어를 내리었다.

 만민공동회는 이에 대하여, ①우리들이 누차 상소한 조목을 아직도 실시하지 아니한 고로 감히 물러가지 못하며, ②臣 등이 탄핵한 3대신이 비록 대신의 직책에서는 해임되었으나 沈相薰은 특진관이요 김명규는 찬정이며 민영기는 관찰사의 직임을 맡기니 이것은 옛 것을 갖고 壅蔽하는 것이어서 민심이 복종하기 어렵고, ③보부상배는 비록 혁파했다고는 하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암약하는 흔적이 역력하니 깊이 들어가서 뿌리를 뽑고 그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의 정서가 더욱 의구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유언비어를 종식시키지 못할 것이며, ④일전에 소명을 받고 감히 대령하지 못한 것은 간세배들의 살해 음모가 있다는 설이 낭자한 고로 두렵고 의심스러운 마음이 가득차서 대령하지 못했다고 응답하였다.1228)≪皇城新聞≫, 1898년 12월 20일, 雜報<奉答勅語>.

 만민공동회 재개 15일째인 12월 20일에도 시민들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계속하였다. 이날 이승만은 會衆에게 보부상의 주모자는 민영기이니 누구든지 그를 체포하면 은 1,000원을 지급하기로 현상금을 걸자고 동의하였다. 이 동의가 채택되어 민영기에게는 만민공동회로부터 1,000원의 상금이 걸렸다.1229)鄭 喬,≪大韓季年史≫上, 396∼397쪽. 또한 朴勝穆을 총대위원으로 선정해서 고등재판소에 보내어, 보부상들의 심문과정에서 밝혀진 보부상 배후 조종자인 전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군부대신 민병석 등 4인을 체포하여 공개재판에 부칠 것을 요구하였다.1230)法務 編,≪司法稟報(乙)≫(奎 17279) 제13책, 광무 2년 12월 21일, 報告書 第88號.

 만민공동회 재개 16일째인 12월 21일에도 시민들은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민영기 등의 체포와 재판을 계속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이날 만민공동회에는 子童義士會도 합세하여 이를 지원하였다.1231)≪독립신문≫, 1898년 12월 22일, 잡보<아동의리>. 그리고 시민들은 각부 관료들이 만민공동회를 빙자하여 사무를 게을리 할 것을 염려해서 만민공동회 장소를 고등재판소 문 앞으로부터 종로로 다시 돌아와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1232)≪독립신문≫, 1898년 12월 22일, 잡보<옳은 의론>.

 만민공동회는 이와 같이 자체의 움직임을 보였으나,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군대 동원을 내면으로 결정한 후 태도가 더욱 강경해졌다. 이날 황제는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①죄인 박영효를 임용하라고 상소한 소두 李錫烈 등 범죄자들을 조사하여 법에 따라 처벌토록 하고, ②근래 기강이 해이해져서 국사범들이 문득 망명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국체가 훼손되는 것은 돌아보지 아니하니, 국외로 도망한 자는 본죄의 경중과 주범·종범을 불문하고 난신적자가 되기는 한 가지이므로 영원히 사면은 없을 것이며, ③만일 상소를 적탁하고 관청 사무를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엄금하라고 하였다.1233)≪東亞日報≫, 1930년 1월 13일,<韓末政客의 回顧談-獨立協會長 尹致昊氏->3. 이것은 황제가 ‘박영효 천거’를 범법행위로 보고 응징할 뜻을 나타낸 불길한 것이었다.

 만민공동회 17일째인 12월 22일 마침내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황제는 정동의 대궐 근처 4곳에 대포를 수레에 실어 벌여 놓아 시민들을 공포분위기 속에 몰아넣고 위압케 하였다.1234)≪독립신문≫, 1898년 12월 24일, 잡보<인심안녕>. 또한 각부와 고등재판소 문 앞에는 군인들을 다수 배치하여 시민의 접근을 엄금하고 삼엄하게 경비토록 하였다.1235)≪독립신문≫, 1898년 12월 23일, 잡보<각부계엄>.

 만민공동회는 이날 종로에서 대회를 열었으나 만민공동회에서 ‘박영효 소환 임용’에 찬성한 사실이 알려져 시민의 지지가 크게 약화되었으므로, 이날 모인 만민의 숫자는 이전과 같이 많지 않았다.1236)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2월 27일. 이날도 일부 회원들은 민영기·민병석의 재판을 청원하기 위해 고등재판소 문 앞으로 몰려갔다. 그들이 재판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군인들의 저지로 부상자가 3명이나 발생하였다. 崔廷德 등이 마침내 재판소 정원 앞에 뛰어 들어가 만민공동회의 청원들을 속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1237)鄭 喬,≪大韓季年史≫上, 399∼400쪽.

 한편 종로의 만민공동회는 개혁정부 수립을 요청하면서 전임 만민공동회에 도발행위를 한 보부상들을 잡아 경무청에 넘겼다. 그러나 수구파의 보부상들에 대한 배후 지원이 증가했으므로, 유배 죄인 兪箕煥·李基東 등은 유배지로 가지 않고 인천에 숨어 머물다가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서울에 잠입해서 보부상들을 지휘하며 비밀리에 기회를 노렸다.1238)鄭 喬,≪大韓季年史≫上, 400쪽.

 또한 보부상 단체의 별칭인 白民會는 만민공동회에서 장정을 모집한다고 사칭하고 1인당 100냥씩으로 100명의 장정을 모집했다가, 이것이 백민회에서 모집한 것임이 탄로되어 장정들이 분개해서 돌아가는 일도 발생하였다.1239)≪皇城新聞≫, 1898년 12월 24일, 雜報<忠不可欺>. 이러한 상황과 분위기속에서 황제와 수구파의 군대 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독립협회의 탄압·강제 해산의 날이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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