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2. 수구파 및 외세의 독립협회세력 탄압
  • 2)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강제 해산

2)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강제 해산

 만민공동회 재개 18일째인 12월 23일 드디어 군대 동원에 의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무력 탄압의 날이 왔다. 만민들은 이날 민영기의 재판을 청원하기 위해 오후 1시에 고등재판소 문 앞에 모였으나 시위대 제2대대 군인들이 一字 모양으로 총을 잡고 만민들을 포위하였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박영효의 소환 기용에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1240)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2월 27일. 이미 군대 동원의 소문이 시중에 파다하게 퍼져서 시위대와의 충돌을 꺼린 사람들도 많았으므로, 이날 모인 만민들은 그 이전처럼 많지 않았다.

 이날 시위대 제2대대 대대장 金明濟는 부하 병정들에게 각 3원씩 분급해 주고 술을 마시게 한 다음 만민공동회 해산에 동원하였다.1241)위와 같음. 술취한 병정 2명이 만민공동회 會衆에 돌입해서 임시회장 尹始炳을 부르면서 나는 일개 병졸이라도 민회의 목적을 안다고 연설하려 하자, 만민공동회·독립협회 회원인 전 육군정위 林炳吉이 나서서 그 풍색의 아름답지 못함을 보고 “군인 복장을 하고 민회에서 연설하는 것은 章程에 없는 바다”라고 외치니, 그 병정과 함께 시위대 병정들이 일제히 회민을 포위하고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들어왔다. 시위대가 마침내 무력 탄압 작전을 개시한 것이었다.1242)≪皇城新聞≫, 1898년 12월 26일, 別報<民會續登>.

 시위대의 작전이 개시되자 만민공동회 회민들은 위험을 느껴 일제히 기립해서 종로로 회중을 옮기려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 군인들이 종로로 향하는 만민공동회 회민들의 후미를 포위하여 공격했으므로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 군인들은 발포 준비를 완료한 채 계속 만민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추격하였고, 그 뒤에는 보부상들이 뒤따라오면서 “민회를 밟아라” “회원 연설자를 잡아라” “쳐라” “쫓아라” 등 고함소리를 내어 그 위협 기세가 살벌하였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만민공동회 회민들은 시위대 군인들의 총검과 보부상들의 몽둥이에 쫓기면서 종로를 향하여 밀려오다가, 비무장의 소수 만민들로는 날이 이미 어두워진 어둠속에서 시위대 군인들의 총검과 보부상들의 몽둥이에 희생이 너무 커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야시위를 하지 않기로 하여 분함을 억누르면서 일단 모두 해산하여 귀가하였다.1243)The Independent, December 27, 1898, Molayo's Reports.

 황제는 12월 24일 서울 시내를 완전히 군대의 계엄상태하에 두었다. 시위대의 주력은 종로를 엄밀하게 파수 경계케 했으며, 서울 시내 요소요소에는 총검을 든 군인들이 배치되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러 나오는 것 같은 시민이 모이면 즉각 총검으로 위협하고 힐난하면서 귀가시켜 버렸다. 이에 시민들은 도저히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날 아침부터 경무청과 군대에 의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 구금이 시작되었으므로, 회원 중 저명한 사람은 모두 도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수구파정부는 이에 발 맞추어 박영효를 천거하고 ‘可’표를 던진 중추원 의관을 색출하려고 중추원에 대하여 11인의 ‘재기가담자’ 천거의 통첩을 반송함과 동시에 12월 16일 재기가담자 천거 때 최초의 동의자가 누구이며, 박영효 천거 때 ‘가’표·‘부’표를 던진 의관들이 누구인지 구분하여 성명을 기재해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1244)議政府 編,≪各部去照存案≫(奎 17242) 제2책, 광무 2년 12월 22일, 照會中樞院. 중추원은 이에 대해 12월 16일 재기가담자를 투표 천거하자는 동의자는 최정덕이며, ‘가’·‘부’ 투표자 구별은 어렵다고 회답하였다.1245)議政府 編,≪各部去照存案≫(奎 17242) 제3책, 광무 2년 12월 23일, 照覆 第1號.

 황제는 이에 12월 23일자로 당일 동의한 의관 최정덕과 정부에 통첩한 의장대리 윤시병을 免本官하고, 당일의 임시의장 李時雨를 1개월 감봉 처분했으며, 중추원 의장 李鍾健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전직시켰다.

 1898년 12월 25일, 마침내 공식적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불법단체화와 강제 해산의 날이 왔다. 황제는 계엄상태하에서 칙어로써 만민공동회의 11개 죄목을 다음과 같이 들고, 만민공동회·독립협회를 불법화하여 강제 해산케 하였다.1246)≪駐韓日本公使館記錄≫8,<本省往來信>, 1898년 12월 27일, 發第87號 萬民共同會에의 勅語.

① 離次開會은 이미 금지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취회하여 만연히 그칠 줄을 모르니 그 죄가 하나요,

② 독립협회를 이미 준허함이 있는데 ‘만민공동’이라 하여 천단히 명목을 세웠으니 그 죄가 둘이요,

③ 칙어와 비지로써 퇴거하라고 유시했거늘 오로지 항명하여 갈수록 더욱 심하니 그 죄가 셋이요,

④ 쥐 잡으려고 그릇 깨는 것은 고인의 경계한 바이거늘 대관을 능욕함을 다반사와 같이 하니 그 죄가 넷이요,

⑤ 임금의 과오를 들어내는 것은 사람이 감히 못할 바이거늘 외국공사관에 투서하여 스스로 잘못 말하기를 도모하니 그 죄가 다섯이요,

⑥ 民이 官과 더불어 체모가 스스로 다르거늘 官人을 위협하여 억지로 會에 나오게 하니 그 죄가 여섯이요,

⑦ 府와 部의 행정은 비우는 것이 불가한 데 관청에 난입하여 喝命해서 사무를 못보게 했으니 그 죄가 일곱이요,

⑧ 재판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거늘 호소할 것이 있다 칭탁하고 무리를 이루어 끝을 붓게 하니 그 죄가 여덟이요,

⑨ 군대를 파견하여 문을 막는 것은 명령에 따라 하는 것이거늘 분을 이기지 못해 투석해서 중상을 입히기에 이르렀으니 그 죄가 아홉이요,

⑩ 누가 부름에 즉각 와서 대령할 것이거늘 妖言을 선동하여 한결같이 거역하였으니 그 죄가 열이요,

⑪ 역적은 용서치 않고 사람사람이 得誅할 것이거늘 무리 가운데 말을 열어 임용할 것을 도모하니 그 죄가 열 하나이다(≪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1월 13일, 勅語).

 황제는 이 밖에 세세한 위반은 다 지적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가로되 충군한다, 가로되 애국한다 한 것이 일찍이 不善한 것이 아니로되, 끝에 가서는 가로되 悖라 하고, 가로되 亂이라 해도 그 이름을 도피할 바가 없으니 疑懼之心이 이로 말미암아 난 바이라”1247)鄭 喬,≪大韓季年史≫上, 403쪽.고 하였다.

 또한 황제는 詔書를 내려, ①혹 벌레같은 무리가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다시 이런 습관에 따라 열씩 다섯씩 길거리에서 모여 會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파수 순검과 병정들이 철저히 규찰하여 엄금할 것이며, ②閭巷에 한산한 백성들이 방청이라 일컫고 거리에서 구경하는 자도 역시 금단하도록 하였다.1248)≪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1월 13일, 詔. 이것은 재차 만민공동회의 집회 시도와 그 구경까지도 엄금한 조치였다.

 또한 경무청은 내부훈령을 각 방곡에 고시하였다. 그 내용은 ①근일 民會가 충애한다고 거리에서 개최한 것이 처음에는 폐단을 개혁하려는 데서 나왔으나, 끝에는 외국 공관에 투서하여 본국을 비난하고 부호를 토색하며 정부 관인들을 협박 능욕하니 이것은 이미 충순이 아니며, ②중추원에서는 역적수괴 등용을 당연한 일로 동의하고 화응한 자가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박영효의 무리와 安駉壽의 당이 그 중에 혼재하여 화란을 도모한 것이므로 이 무리의 수괴는 반드시 다스릴 것이며, ③시민이 會에 참가하거나 방청하는 것을 금지하니 어기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포고하였다.1249)≪皇城新聞≫, 1898년 12월 26일, 雜報<警廳告示>.

 계엄상태 아래에서 황제와 수구파정부의 연이은 강경 조치가 취해지고, 뒤이어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중견간부들에 대한 체포구금이 시작되었다. 만민공동회 회장 高永根은 12월 28일 鄭 喬가 지은 상소를 회원 金忠燮으로 하여금 呈納시켜 황제의 폭압을 만류하려 했으나 비서원이 이를 접수하지 않았다.1250)鄭 喬,≪大韓季年史≫上, 405∼407쪽.

 ≪독립신문≫은 12월 28일<공동회에 대한 문답>이라는 논설을 게재해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적극 옹호하였다.1251)≪독립신문≫, 1898년 12월 28일,<공동회에 대한 문답>.≪황성신문≫은 독립협회가 발간한 만민공동회의 ‘헌의 6조’와 ‘조칙 5조’를 게재하여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옹호하고 황제와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려고 하였다.1252)≪皇城新聞≫, 1898년 12월 29일, 附錄.

 독립협회는 독립관내에서 모임을 가지려 했으나 이것도 황제와 정부의 탄압으로 이룰 수 없었다.1253)≪독립신문≫, 1898년 12월 29일, 잡보<통상회>. 만민공동회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도 1898년 12월 25일 황제의 군대와 경찰의 탄압을 받고 사실상 해산 상태에 들어갔으며, 지방에서도 1월초부터 칙령에 의하여 지방관이 독립협회 지회를 해산시키기 시작했고,1254)≪皇城新聞≫, 1899년 1월 6일, 雜報<支會有電>. 황제 고종은 다시 1899년 1월 15일 조칙으로서 지방관과 진위대로 하여금 독립협회 지방지회를 엄금하도록 재차 명령하였다.1255)鄭 喬,≪大韓季年史≫下, 5쪽.

 그리하여 19세기말 열강의 침략의 소용돌이속에서 자주부강한 근대국민 국가를 건설하고 국민의 민권을 신장하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려고 강렬한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전개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1898년 12월말 황제 고종 및 친러 수구파와 외세의 야합에 의해 무력 탄압을 받고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 강제 해산 후 황제와 수구파정부의 민회 간부들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황제는 1899년 1월 2일자로 중추원 의관 申海永·魚瑢善·卞河進·李承晩·洪在箕 등을 면관시켰으며, 劉 猛·鄭恒謨·洪正厚 등을 1개월 감봉에 처하였다.1256)≪官報≫, 광무 3년 1월 6일. 또한 1월 21일에는 高永根을 파면했으며, 정항모·玄濟昶·梁弘黙·李建鎬 등은 의원면직되어 독립협회 세력은 중추원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1257)鄭 喬,≪大韓季年史≫下, 15쪽.

 황제와 수구파정부가 민회 지도자들을 투옥하려 했으므로 고영근·林炳吉 등은 일본인 집에, 윤치호·윤시병·이승만 등은 미국인 집에 은신하였다.1258)鄭 喬,≪大韓季年史≫下, 2쪽. 수구파들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 간부들을 체포·처단하기 위해 30여 명의 자객단을 편성하는 형편이었다.1259)鄭 喬,≪大韓季年史≫下, 5·12쪽.≪獨立協會沿革略≫에 의하면, 이 무렵에 약 430여 명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중견간부들이 한 때 체포당하였다.1260)≪獨立協會年歷略≫중의<獨立協會>.

 수구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각종 음모를 꾸며 민회 지도자들의 대량 투옥을 획책하였다. 윤치호는 그의 부친 윤웅렬이 황제에게 청탁하여 元山監理로 임명해서 보호차 지방으로 쫓아 보내었다.1261)尹致昊,≪尹致昊日記≫5. 1899년 1월 5일. 수구파들은 박영효와 내통해서 황제 폐위와 共和制 시행 음모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소장신진파인 이승만·延弘植·延弘基·林晩容·金鳳九·趙文植을 체포 투옥했으며, 놓친 崔廷德·정항모 등에게 긴급 체포령을 내렸다.1262)法部 編,≪司法稟報(乙)≫(奎 17279) 제14책, 광무 3년 1월 11·21일, 報告書 第2·7號.

 그러나 한편으로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수구파·보부상패들에게는 사면을 시행하였다. 백령도 유배 7년 죄인 兪箕煥과 李基東에게는 특사령을 내렸고,1263)≪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1월 19일, 詔. 李容翊의 체포령을 사면했으며,1264)鄭 喬,≪大韓季年史≫下, 6∼7쪽. 趙秉式·閔種黙 등의 체포령을 사면하고 金禎根을 특별 석방하였다.1265)≪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2월 9일, 詔.

 황제와 수구파는 또한 정부내의 개혁적 관료들인 박정양·민영환·한규설·李學均·李鍾健·이상재 등을 모두 파면하고, 완전히 수구파 중심의 정부를 편성하였다.1266)尹致昊,≪尹致昊日記≫5. 1899년 1월 23일. 1899년 1월말까지 구성된 정부대신과 요직들을 보면, 沈相薰이 의정부 참정, 유기환이 법부대신, 閔泳綺가 탁지부대신, 申箕善이 학부대신, 閔丙漢이 내부대신서리, 閔丙奭이 군부대신, 洪鍾宇가 의정부 총무국장, 이기동이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李根鎔이 경무사, 李漢應이 한성판윤, 이기동이 참령, 吉泳洙가 참위에 임명되었다.1267)≪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2월 1일 및 19일, 詔. 이용익은 궁내부소관 삼정 및 광무감독에 임명되었다가 결국 典圜局長으로 복귀하였다.1268)尹致昊,≪尹致昊日記≫5. 1899년 2월 10일.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의해 규탄받던 가장 부패 무능한 사람들이 모두 권력의 자리에 복귀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현저한 변화는 보부상들의 진출이었다. 보부상 단체 간부 46명이 모두 정부의 중견 관직을 차지했으며, 길영수는 곧 농상공부 상공국장으로 영전하였고, 전국 각 군의 보부상들이 집권에 참가했다고 속속 상경하여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1269)鄭 喬,≪大韓季年史≫下, 15쪽.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뿐만 아니라, 1899년 3월 16일 칙령을 발표하여 보부상단체의 복설을 특별하고, 商務所를 商務會社라고 개칭하여 처음에는 심상훈을 都社長, 민병석을 사장, 이기동을 부사장, 길영수를 都司務, 朴有鎭·金光熙를 부사무로 임명했다가, 5월 18일에는 申箕善을 도사장, 민영기를 句管사장, 李根鎔을 도사무장에 신임하고, 칙령 제19호로써<商務社規則>을 반포하여 각종 특권을 허여하였다.1270)鄭 喬,≪大韓季年史≫下, 15∼19쪽.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수구파와 보부상들이 결탁하여 권력과 금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황제와 수구파·보부상 정부는 뿐만 아니라 1899년 5월 22일에는 중추원 관제까지 완전히 개정하여 의관을 6등으로 대폭 격하하고 전원 칙임·주임으로 하여 대기케 했으며, 조병식을 의장으로 임명하였고, 주로 수구파 퇴임관료들과 보부상들을 의관으로 임명하여 중추원을 정부 자문도 제대로 못하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1271)鄭 喬,≪大韓季年史≫下, 19쪽.

 그리하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한 민족역사상 대개혁이 요청되었던 1899년은 도리어 大反作用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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