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3.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역사적 의의
  • 2)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역사적 의의

2)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역사적 의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앞에서 열거한 몇 가지 요인들의 복합으로 당장은 실패했지만, 그것은 중장기적으로 그 후 한국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한국 민족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역사적 의의가 큰 운동이 되었다.

 첫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19세기말 열강이 이권침탈과 식민지화 정책을 본격화한 위험한 해인 1898년에 만민공동회 투쟁을 통하여 이를 역전시켜서 러시아와 일본 등 외세를 일단 한반도에서 후퇴시키고, 마침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균형’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세력균형이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만 6년간 지속되어 독립 강화와 자주 개혁을 위한 시간을 번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집권하여 이 기간에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대개혁을 단행하고 정치체제도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여 국민을 참정시켜 민권을 가진 국민의 실력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게 하려고 하였다.

 특히 1898년 4월∼1904년 2월까지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균형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성과로 쟁취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에 의하여 개화독립사상과 국민 대중이 결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열강의 침략 앞에서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 나라를 구하려면, 당시의 시대적 문제를 가장 과학적으로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상과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국민 대중의 결합이 매우 중요하였다. 19세기 한국에서는 그러한 사상은 상대적 의미에서 개화독립사상이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이러한 개화독립사상을 민중과 결합시키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 이 때의 민중은 도시 시민층과 지식인층과 청소년층이 중심이 되었지만,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의해 개화독립사상과 민중이 결합했기 때문에, 장기 동태적으로 볼 때에 이 시대 이후에는 민중에 의해 자주근대화운동이 전개되고, 민족운동의 주체와 추진력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과 정책을 갖고 역사 발전의 대세에 합치되어 전개된 것이었다.

 셋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자주독립사상을 전국민에게 널리 확산 보급시켰으며, 또한 열강의 이권침탈을 민회 존속기간에는 강력히 저지하고 독립을 강화하는 데 실제로 크게 공헌하였다.

 독립협회가 민족운동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事大’를 온건한 좋은 사상으로 생각하고 ‘독립’은 불온한 사상으로 교육받은 낡은 사고가 유생들과 국민들 사이에 많이 침전되어 있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맹렬한 민족운동을 통하여 ‘독립’을 용어마다 강조하면서, ‘사대’가 망국의 길이며 자주독립만이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올바른 사상임을 계몽하여, 전국민에게 자주독립사상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

 또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열강의 이권침탈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황제의 이권양여를 반대하여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는 강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그 결과 적어도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이권침탈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898년 12월 말 해산당할 때까지 그 존속기간에는 새로이 열강이 이권을 침탈하는 것은 실제로 막아내었다. 열강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존속기간에는 그들의 이권침탈 야망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이 시기 열강의 이권침탈을 반대하여 저지시키고 열강의 부당한 간섭정책을 비판하여 물리친 것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에 크게 공헌한 것이었다.

 넷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당시와 그 후의 한국의 개혁정책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구한말 일부의 사회문화 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기적으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우선 열강의 이권침탈을 저지시키고 독립을 강화하는 데 일시 성공하기도 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특히 교육과 문화와 산업정책 부문에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개혁안이 일부 반영되고 채택되었다. 신식학교 설립과 신교육 실시, 서양식 의학교의 설립, 상공학교의 설립, 국사와 국문의 교육과 보급, 민족문화·예술의 존중과 연구 개발, 자본주의 경제조직 해설과 회사·은행·자유 상업의 발전정책 등은 독립협회의 사상·정책·개혁안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다섯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에 의하여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사상’이 한국인의 사상으로 확립 발전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자유민권사상’ ‘민권론’ 등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사상을 널리 보급시켰다. 또한 군주제의 결함을 지적하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화주의사상을 신진청년들 사이에 널리 보급하기 시작한 것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였다. 즉 한국 역사에서 근대 민주주의 사상과 공화주의 사상이 정립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서 본격적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자주독립 사상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이르러 민주주의사상과 결합함으로써 ‘근대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여 큰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여섯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애국자들과 애국세력을 양성해 내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

 한국근대사에서 독립협회 이후의 애국운동의 주체세력을 실증적으로 고찰해 보면, 그들의 거의 모두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계몽을 받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에 참가해서 애국자·애국세력으로 형성 발전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동시에 애국세력 양성운동의 내용을 결과적으로 갖추게 된 것이었다.

 일곱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그 뒤를 이은 한말 애국계몽운동, 여성해방운동, 민족문화운동, 일부 측면의 의병운동, 항일 독립운동, 3·1운동의 원류를 이룬 것이었다.

 특히 한말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을 직접 계승한 민족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가 자매단체로서 창립을 지원한 贊襄會(順成會)는 바로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강조한 국사연구와 교육, 국어국문 연구와 교육, 민족문화·예술의 창조와 연구와 교육 등의 운동은 직접 민족문화운동으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항일 독립운동으로서의 3·1운동의 비폭력시위 방법, 만세시위 방법 등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민족운동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한말의 각종 국권회복운동과 일제하 3·1운동이 민중에 의한 애국운동으로 전개된 전통의 가장 가까운 원형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에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일부 일본인 학자 등 다수의 외국학자들은 개항 후 한국인의 사상과 운동에는 외세에 저항하는 강렬한 저항민족주의(예컨대 동학농민혁명운동)는 있었으나 새로운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근대 시민적 민족주의와 자주 근대화사상·자유민권사상과 운동이 결여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채 언젠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일본 제국주의가 선점한 것에 불과하다는 역사해석을 자주 해오고 있다.

 그러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사상과 운동은 이미 19세기말에 한국인들이 스스로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수립 발전시킬 수 있는 근대 시민적 민족주의와 그 구체적 방안을 만들어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실천을 위한 강렬한 민족운동까지 전개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이미 19세기말에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 설립까지 추진했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와 일본 등 외세가 야합하여 황제 고종과 수구파를 지원해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구국개혁운동을 탄압하고 침략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면, 한국민족은 이미 19세기말에 자기의 힘으로 자유롭고 독립된 자주 부강한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수립할 수 있었음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사상과 운동이 잘 증명해 주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愼鏞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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