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개요

개요

 청일전쟁 이후 3국간섭과 민비시해를 비롯한 일련의 정치적 격변속에서도 갑오경장과 을미개혁을 추진하던 조선왕조는 1897년 10월에 ‘大韓帝國’을 선포하여 본격적인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어 불과 14년에 걸친 단명제국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그것도 대한제국의 대내외적 ‘獨立國家의 自主權’은 1904년 러일전쟁 이전의 전반기에 겨우 유지되었고 후반기 7년 동안은 일제에 의해 자주권이 잠식되다가 한국 식민지화을 추진하던 일제 통감부의 괴뢰정부로 전락된 모습마저 보였다.

 법적으로 대한제국의 국호인 ‘大韓’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근대적 부강국가를 이룩할 목적으로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으로 전환시키고자<大韓國國制>를 제정하였다. 오랫동안 宗廟와 社稷에 제를 올리며, 형식적인 면이 크기는 하지만, 明과 그를 이은 淸에 事大之禮를 행하고 그의 ‘小邦’임을 자처하던 조선왕조는 황제가 군림하는 중국과도 동등하게 自主之邦이며 皇帝之國임을 천명하는 의례로 圜丘壇을 쌓고 그곳에서 天地에 제를 올리고 稱帝建元하고 국호를 ‘대한’이라 부르게 한 것이다. 이를 황제의 頒詔文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였다.

朕이 생각컨데 檀君과 箕子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각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서로 雄함을 다투다가 高麗에 이르러 馬韓 辰韓 弁韓을 呑倂하였으니 이것이 三韓을 統合함이다. 우리 太祖께서 용흥하는 처음에 輿圖로써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욱 넓어져 북으로 靺鞨의 界를 다함에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耽羅國을 걷움에 귤과 풍부한 여러 해산물를 貢하는지라. 폭원이 4천리에 一統의 業을 세우시며 禮義法度는 唐虞를 조술하고 산하가 공고하여 福을 우리 子孫萬世 반석의 宗에 드리셨거늘 오직 짐이 不德하여 여러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上帝께서 돌아보시어 위태함을 돌려 平安함을 갖게 하고 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의 權利를 행케하시니…금년 9월 17일에 白嶽(북악산)의 남에서 天地에 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號를 정하여 ‘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光武 元年을 삼는 것이다(≪高宗實錄≫권 35, 광무 원년 10월 11일).

 대한은 조선의 부정이나 혁명이 아니라 도리어 단기 이래의 분립, 자웅을 다투던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나아가 마한·진한·변한까지 병탄한 고려를 이은 조선의 유업을 계승,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의 권리’을 행하는 뜻에서 국호로 정하였다고 밝힌 것이다. 동시에 연호를「광무」로 고쳐 이 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성립된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로서의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자주지방’의 독립국가의 면목을 갖추고자 국정전반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광무개혁이라 부르는 이 개혁중 중요한 것만 몇 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군제개혁과 군대확충이었다. 개편방향은 강력한 황제권 행사를 위해 정권을 수호하며 주위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자주적 근대군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최고 군통수부로 元帥府를 설치하고 서울에는 왕궁숙위와 도성경비를 위하여 親衛隊·侍衛隊가 개편·증강되었다. 이들 시위대와 친위대에 대한 대우를 여타 정부부서의 관리보다 특별 우대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도 썼다. 또한 중앙군에 비례하여 지방군도 계속 증강되어 갔다. 청일전쟁 후 갑오·을미년간 지방군은 평양과 전주에 친위대가 1개 대대씩 있었을 뿐이었다. 대한제국 후 계속 증가되어 1899년에는 지방군이 2개 진위대대 및 14개 지방대대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경외를 합하면 거의 2개 사단의 병력으로까지 군비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기가 정예화되지 못하고 훈련도 부족하여 1904년 일제 러일전쟁 도발에서는 자국내에서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무소위의 군대로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연례숙원사업인 量田事業을 추진하였다. 그 방향은 ‘舊本新參’의 이념을 내세워 신구를 새롭게 절충하여 개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量田論과 土地所有權을 아울러 추구한 것이다. 1898년부터 1904년까지 7년 동안 추진된 이 양전사업은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종래 양지아문에서 양전한 것까지 합치면 218군으로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3분지 2에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셋째, 산업진흥을 위하여 식신흥업정책을 추진한 것이었다. 그를 위하여 농상공의 진흥은 물론 교통·운수·화폐·금융분야까지 확대하면서 산업진흥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의 이권경쟁과 정치적 불안이 겹쳐 소기의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근대 학계에서 光武改革論爭까지 일고 있다.

 넷째, 근대교육의 진행정책이었다. 그중에도 실용교육과 관리양성교육에 중점을 두는 교육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鑛務學校와 電務學校, 郵務學校까지 세워지고 일어·한어·영어 등의 각종 외국어 교육기관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무년간의 교육지표인 교육입국에는 질양 어느 면에서나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제는 조선말 소위 征韓論을 제기하면서 침략을 기도한 이래,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가면서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배권을 확대시켜 갔다. 일제는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명치유신’ 이래 영미 등 열강의 비호 아래 급속하고도 철저한 군국화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1894년에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국내에서 중국세력을 몰아내고, 이어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 분할 등과 같은 국제정세를 교묘히 이용, 중국에서의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는 구실로 제1·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으로부터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한편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명분을 세워 태프트-카츠라밀약에서 미국으로부터도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횡포 가운데 한국의 주권이 일제의 수중에 넘어가는 국제적 ‘양해’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일제는 한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권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재빨리 ‘주한일본군’이라는 침략군을 앞세워 한국강점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한국강점은 특히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되어, 일본은 궁극적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병합’에 착수하였다. 일제는 1894, 5년의 청일전쟁과 뒤이은 삼국간섭 이래 10년을 두고 러시아를 배제하면서 한국을 독점, 식민지화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이러한 방략은 마침내 1903년 4월 러시아의 용암포 병참기지화 착수를 계기로 1903년 8월부터 1904년초까지 일단 외교적 담판을 시도하였다. 이 담판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식민지화 대상인 한국과 만주를 놓고 각기 분할점유하자는 외교적 흥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양국 모두 군사력에 의한 식민지의 확장이라는 제국주의 야심을 포장한 까닭에 양보가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1903년말에는 39도선 분할을 운운하던 이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영일동맹의 체결과 미국의 지지를 배경삼아 무력을 통한 해결을 결정하는 한편 한국에 대한 독자적인 식민지화 방침을 굳혀 1903년 12월 30일 일본 閣議에서는 무단적인「對韓方針」을 결의하고 착수시기만을 노리게 되었다. 이 방책에는 일제는 어떠한 경우라도 한국을 식민지화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분명히 내재되어 있다. 다만 이 의지를 군사적인 실력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되 가능한 한 외형상이나마 명분이 서는 방책을 구사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침에서 수행된 일본의 첫단계 실천이 러일전쟁의 도발과 한국주둔군의 파견 및 한국의 군사적 강점, 그리고 이와 같은 군사적 위협을 발판으로 삼아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6일 러시아에 대하여 주러일본공사 栗野愼一郞를 통해 국교단절을 통보하고 征露軍과 함께 미리 편성한 한국파견군의 출동령을 내려 2월 9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군사행동은 종래 2개 중대의 일본군이 주둔하여 자국 거류민 보호를 담당하던 서울의 형세를 일거에 변화시켰다. 즉 한국파견군의 서울 침입은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한국정부는 겁에 질려 기왕에 표명하려던 중립선언을 백지화시켰다. 일본군의 서울입성이 완료되자,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당일 광무황제를 알현하여 금차 러일의 개전과 일본군의 서울입성은 “한국 황실과 국토를 보호하여 한국의 독립을 영구히 하기 위한 의거”라는 상투적인 거짓말로 광무황제를 기만하면서 排日行動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이후에도 전력 보강과 征露北軍의 증파를 구실로 서울뿐 아니라 연일 전국 도처에 들어왔다. 특히 인천·서울간은 일본군과 그들의 군수물자로 가득하였으며, 서울의 주요 건물은 일본 침략군의 병영지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처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는 일본군이 대규모로 진주하였기 때문에 궁궐·한국군 병영·학교·관청 및 민간 대저택 등을 차례로 징발 사용하였다.

 2월 23일의 한일의정서는 이와 같은 일본군의 주둔하에서 강제로 체결된 것이다. 이후에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경영을 본격화하기 위해 3월 11일자로 한국임시파견대를 ‘韓國駐箚軍’이라 개칭하고 그 사령부를 서울에 두고 제12사단 병참부에 후비병을 보충하여 영구 주둔을 차비하였으며, 육군소장 原口兼濟를 초대 주차군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후 동년 10월에는 후일 제2대 조선총독으로 악명을 떨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병력은 사령관 예하에 2개 사단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지역에 유기적으로 분산배치되었다. 이러한 한국침략 일본군은 연간 약 4백만원의 경비를 소비하면서 對韓軍事經營案에 따라 한국의 주권을 침탈해 갔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발표된 ‘한일병합에 관한 조약’001)이 조약문은 韓·日文의 原文은 서두에 조약의 명칭없이 前文과 本文만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문속에 ‘合倂條約’이라 명시되어 한일간의 ‘倂合’에 관한 조약임을 명시했다. 8월 22일 체결되었으나, 일제는 내외정세를 관망 29일 공포했다. 따라서 한국은 8월 29일을 國恥日로 하였다. 한편 이미 8월 21일 작성된 이 조약의 英文原文에는 ‘Treaty regarding the Annexation of Korea to the Empire of Japan'이라는 명칭이 있다. (이하<한일합병조약>이라 약칭).은 명실상부하게 한국의 일제 식민지 전락을 명문화한 것이다. 러일전쟁 도발과 아울러 시작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추진은 ‘주한일본군’의 군사경영을 주축으로 추진된 것이다. 러일전쟁의 수행을 구실로 서울을 비롯한 중요 도시와 전국 요충지에 진주한 주한일본군은 서울 용산에 사령부를 두고 각 주둔지에 영구 군영지를 건설하면서 한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하였다. 이후 일제는 주한일본군의 무력을 앞세워 명의만 남은 한국정부를 회유 혹은 협박 등의 갖은 수단을 다하여 무력화시켜 가면서 끝내 그들의 괴뢰정부로 전락시켰다.

 그보다 일제는 이와 같은 군사력을 앞세워 한국의 외교와 재정권을 탈취. 1905년 11월까지는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내정·경찰·사법권 등을 장악하고 철도·통신권을 접수함으로써 한국의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한국의 농업·상업·공엄 등 모든 산업까지 잠식, 끝내 한국의 식민지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지의 완성을 선언하는 1910년 8월의 한일합병조약 반포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주한일본군의 한국침략 이래 한일합병조약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경영한 식민지체제의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러일개전을 핑계로 삼아 한국을 강점한 일제 침략군이 일진회 등 현지 친일세력의 도움을 얻어 전국적 항전을 벌이던 의병을 거의 ‘진압’하였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는 의병항전이 무력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측으로서는 설사 의병활동이 계속된다 하여도 그것은 한국 식민지통치에는 별 지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한일합병’ 직전 의병의 동향을 일제는 다음과 같이 파악하면서 의병탄압을 위한 만전의 대책을 세워 놓고 있었다.

정변(한일합병)에 즈음하여 전 한국을 통해 조그마한 동요도 있은 일이 없고 평화로운 사이에 時局을 종결시킬 필요를 생각해 暴徒(義兵)의 토벌과 北關 두만강 연안의 경비, 수도에서의 응급한 준비를 위해 (1910년) 6월 중순부터 군대 배치 및 이동을 행하여 7월 9일로서 전부 완료하였다. 당시 폭도로서 다소 저명한 것은 황해도 동북부와 강원도 북부의 蔡應彦이 거느린 한 집단과 姜基東 도당이 있다. 두만강 대안에는 간도 및 두만강 하류 방향으로 北關에 침입하려고 기도하는 李範允의 도당과 노우키에프스크(煙秋) 부근의 崔都憲(才亨)과 洪範圖가 거느린 것 등도 있다(寺內正毅,<朝鮮總督報告 韓國倂合始末> 부록, 韓國倂合과 軍事上.의 關係).

 둘째, 사령부를 용산에 둔 ‘주한일본군’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와 요새지를 완전 장악하고 영구 군사시설을 건설, 군사적으로 한국 영유를 완결시켰다. 한편, 3,400명 이상으로 알려진 그들 헌병과 4천명의 헌병보조원, 그리고 경찰 등을 일본군 헌병대로 지휘체제를 일원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치안’ 경찰의 임무까지 담임시켰다.

 셋째, 주한일본군을 배경으로 통감부는 한국정부를 정치적으로 무력화시켜 한국통치에 실권이 없는 명분상의 정부로 전락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통감부의 괴뢰정부로 개편하여 식민지체제 확립의 압잡이로 만들었다. 한편, 한국정부 지휘하의 군대를 재정상의 구실 등을 내세워 계획적으로 해산시켜 위험요소를 제거하였다. 1910년 국치 전후의 한국군대는 궁중 호위와 위장용으로 1개 보병연대 및 기병연대가 있었으나 이것까지도 엄중 단속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은 일제가 그들 주한일본군을 앞세워 한국을 강점하면서 완전히 한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정부를 괴뢰화시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방면에 걸친 주권을 탈취 행사하여 실질상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명목상으로 국호와 황제가 남아 있고 정부가 존재하므로 이마저 완전 제거하여 명실상부한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 ‘한일합병’이라는 수순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한국 식민지체제의 확립이 이와 같은 상황에까지 도래하였으므로 이완용 이하 괴뢰화된 한국정부의 수괴들은 물론 모든 친일세력들은 일제에 의한 ‘한일합병’이란 조치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오직 남은 것은 ‘합병’선언 직전까지 친일에 앞장서 일제에게 ‘공로가 있는 한인’인 자기들의 차후의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즉 일제 ‘天皇의 寬仁’한 처분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것마저도 가증스럽게 ‘皇帝의 안녕을 확실히 확보’한다는 명분의 그늘에서 조금이라도 일제에게 많은 공로를 세우려고 경쟁까지 벌이는 상황이었다.

 ‘한일합병’이란 식민지화의 마지막 조치의 일제측 하수인인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통감은 마침내 본국정부에 불려가 일왕으로부터 ‘합병’을 결행하라는 ‘諭旨’를 받고 그해 7월 23일 귀임하였다. 이에 전후해 이완용·송병준 등 부일두목들은 서로 경쟁하다시피 테라우치에게 하수인이 되기를 자원하여, 결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지명되었다. 그 방법은 ‘합의적 조약’ 즉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꾸미고 형식은 한국 황제가 일본 천황에게 자진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양도’하는 것으로 하고, 그에 관한 모든 문안과 절차는 테라우치가 본국정부에서 훈령을 받은 것에 따랐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한국의 통치를 모두 짐이 가장 신뢰하는 대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할 것으로 결정하여…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대일본제국 통감 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 협정케 한다(寺內正毅,<朝鮮總督報告 韓國倂合始末>).

 위의 이완용의 신임장 내용부터 前文과 8개조의 한일합병조약과 그밖의 모든 것이 테라우치가 본국정부에서 훈령받은 ‘괴문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 억지로 한국측의 제안으로 위장 발표한 것이다.

 명목상의 주권마저 강탈해 간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이 이와 같이 일제의 하수인 테라우치와 ‘土倭의 수괴’로 불리던 이완용 사이에 한국 국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더구나 한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자의적으로 합의형식(조약)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발표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에는 국호와 정부, 황제 등 일체의 주권적 표현마저 사라지고, 대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인 통감부를 확대한 朝鮮總督府가 생겨 명실상부한 무단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민족사에 참담한 오물인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는 댓가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현 내각대신으로 그 유종의 직책(일제 괴뢰내각 대신으로서의 임무)을 다하고 원만히 시국 해결(한일합병조약 체결)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특히 달리 발탁되어 특별한 恩賞과 榮爵을 받고, 이에 더하여 평생 행복한 생활을 하기에 족한 賜金이 내려질 뿐 아니라 모두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장래 시정상의 자문을 맡고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寺內正毅,<朝鮮總督報告 韓國倂合始末>).

 그중에서도 이 조약체결의 하수인 집단의 두목인 이완용은 특히 ‘賜金’과 ‘伯爵’ 작위를 받아 一身一家의 부귀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이 일제의 자의적인 조치와 이를 추종한 괴뢰 친일 이완용내각간의 암거래였음은 조약체결중 논의된 “첫째 韓國의 국호를 朝鮮으로 고칠 것, 둘째 皇帝를 李王殿下, 大皇帝를 太王殿下, 皇太子를 王子殿下라 칭한다”라고 한 대목에서도 여실히 그 실상이 부각된다. 즉 조약체결시 한국황제가 자진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일본왕에게 양여한다는 등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를 완전히 말살하는 내용의 조약문이나 그 절차중의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는 테라우치가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고 말았다.

 단지 “국호는 의연 韓國으로 하며 皇帝에게는 王의 존칭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이견을 제시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권없는 국가 및 왕실로서는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반 인민의 감정에 미치는 바 적지 않아 일찍이 한국이 청국에 예속된 시대에도 여전히 국왕의 칭호는 존재하였던 역사가 있기에 왕호를 부여하여 그 종실의 제사를 영구히 존속시켜 인민을 융화하는 한 방편이 되어 소위 和愛協同의 정신에도 부합되는 것이다(寺內正毅,<朝鮮總督報告 韓國倂合始末>).

 그러나 이것 둘다 본질적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속임수의 내용으로 분식되어 절충·시행되었다. 그리하여 대한이란 국호는 아주 없애버리려 하였으나 인민의 동요를 우려하여 “한국의 국호를 고쳐서 지금부터는 朝鮮이라 함”이라 하여 우리 나라 국호가 ‘대한’에서 ‘조선’으로 변경하여 위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에 편입된 식민지의 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라를 없애면서 한국 민족을 잠시 현혹시켜 그들의 식민지로 경영하려는 계략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헌법에는 일본국토에 대하여 그들 종래의 “本州와 九州·四國·北海道 및 臺灣과 그 부속도서”에서 “혼슈와 큐슈·시코쿠·혹카이도 및 조선·타이완과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정리, 조선을 명백하게 일본의 ‘신영토로 편입된’ 지역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인은 조선에 사는 그들의 새로운 ‘부용인’이므로 조선총독부는 그들을 통치하는 권부로 사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일합병조약에 의하여 대한의 국명은 강제로 금지되고 조선을 우리 나라와 민족의 卑稱 내지 그들 식민지 지명으로 왜곡 강제하면서도 그를 숨기기 위하여 ‘국호개정’이란 칙령까지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일제의 이와 같은 의도와는 관련없이 조선이 유구한 국명일 뿐 아니라 민족의 자존·자립의 개념을 지닌 미칭의 국명으로 식민지통치 전 기간에 걸쳐 사용하였으며 ‘대한’이란 일제가 강제로 없앤 조국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간주, 그 부흥을 위해 민족적 항쟁을 계속하였다.

 다음으로 皇帝칭호에 대해서는 처음에 나라가 없어졌으므로 사용할 수 없으니 ‘太公’이라 하고 황태자를 ‘公’이라 할 것을 제시하였다가, 곧 인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李王·李王子로 고쳐 단지 李氏王室의 祭祀者로서의 명칭만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즉, ‘王’이란 명칭이 있다 하여도 그 위에 ‘李’를 첨가 ‘이씨왕실’의 개념만을 취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와 그들의 괴뢰 정부인 이완용의 한국정부 사이에 맺은 식민지화를 명실상부하게 확정짓는 한일합병조약의 발표 절차도 만약 한국정부가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할 경우에도 대비하여 일방적으로 병합을 단행하는 선언서까지 마련하였으나 괴뢰정부 부일배들의 자진협력으로 그것은 무용화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일제의 하수인인 테라우치통감과 그들의 괴뢰로 전락한 이완용 사이에 암거래로 맺어진 괴문서인 한일합병조약이 자주국 한국 인민의 의사와는 전혀 상반된 원천무효의 불법조약, 곧 ‘국제범죄’였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사실조차 모른 채 국내에서는 주한일본군의 대탄압을 피해 산간벽지로 숨어든 의병의 항일전만이 간간히 치뤄질 뿐 일제측 주장대로 ‘겉으로는 평온한’ 편이었다. 그러나 외신을 통하여 한일합병조약 늑결 사실을 알게 된 國外 한인들은 즉시 조약의 불법성을 성토하면서 그 무효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 가운데서도 海島間의 한인들이 聲明會를 조직, 조약의 원천무효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血戰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열강에게 보냈던 것은 그 두드러진 사례가 되고 있다.

<尹炳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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