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1. 대한제국의 성립 배경
  • 1) 청일전쟁 이후 동아정세의 변화

1) 청일전쟁 이후 동아정세의 변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소를 옮기자(1897. 2. 20) 皇帝卽位를 요청하는 상소가 점차 조야로부터 쇄도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변경하여 나라의 위엄을 높이고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稱帝建元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해 8월에는 얼마전 일본의 위압 하에 정해져 1년간 쓰였던 建陽이란 연호를 光武로 변경하고, 10월 12일에는 마침내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어 다음날 조정에서는 조선이란 국호를 대한으로 개정하여 대한제국의 탄생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500여 년간 지속된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한국사상 최초로 황제의 나라 大韓帝國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002)이 글의 작성에는 아래의 글이 참고되었다.
宋炳基,<光武改革硏究-그 性格을 中心으로>(≪史學志≫10, 1976).
姜萬吉,<大韓帝國의 性格>(≪創作과 批評≫48, 1978).
權錫奉,<淸日戰爭以後의 韓淸關係의 硏究(1894-1899)>(≪淸日戰爭을 前後한 韓國과 列强≫,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李求鎔,<大韓帝國의 成立과 列强의 反應>(≪江原史學≫1, 1985).
李玟源,<稱帝論議의 展開와 大韓帝國의 成立>(≪淸溪史學≫5, 1988).
―――,<大韓帝國의 成立過程과 列强과의 關係>(≪韓國史硏究≫64, 1989).
―――,<大韓帝國의 改革과 그 實態-政府와 獨立協會의 皇權認識과 關聯하여>(≪韓國民族運動史硏究≫9, 1994).
月脚達彦,<大韓帝國成立前後の對外的態度>(≪東洋文化硏究≫1, 學習院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9).
奧村周司,<李朝高宗の皇帝卽位について-その卽位儀禮と世界觀->(≪朝鮮史硏究會論文集≫33, 1995).

 대한제국의 등장은 우리 나라가 事大朝貢國인 왕국에서 자주독립적인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는 데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한국사의 전통적인 흐름과 개항 이후 접목된 세계사적 흐름이 합류하여 나타난 역사적 격랑의 중요한 귀결점이다. 그것은 또한 이후에 전개된 한민족 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하다.003)宋炳基, 위의 글. 다시 말해서 대외적으로는 한국이 중국 중심의 冊封體制에서 서구 중심의 萬國公法體制로 확고히 편입했음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확인한 획기적 사건이었고, 대내적으로는 王國인 조선과 民國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이에 존재한 근대의 ‘자주독립’한 전제군주국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선포된 시기는 국내외적으로 심각하게 위기가 연출되던 때였다. 항일운동을 펼치던 전국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된 상태였고, 서울의 궁정에서는 일본의 군인과 경찰, 낭인배 등이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하여 그 시신을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자행하였는가 하면, 신변의 위협을 견디다 못한 고종이 궁녀의 가마에 숨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기막힌 사태가 불과 1∼2년전에 연출되고 있었다.

 환궁한 그해에도 고종은 신변이 불안정하였다. 국가재정은 고갈되고, 군대와 경찰은 국내치안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조직이 무너져 있었다. 그러니까 청일전쟁 이후의 한반도 상황은 그야말로 瀕死의 지경이었다.

 이렇게 나라의 운명이 급전직하로 추락해 가던 시기에 도리어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등장한 내외적 배경은 무엇인가. 멀리는 조선 후기 이래 지속된 華夷觀의 변화, 가까이는 청일전쟁 이래 전개된 동아의 국제상황 변화이다.

 황제란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전근대의 동양사회에서는 중국의 천자만이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즉 중국 중심의 화이관이 지배하던 동양권에서는 모든 나라가 천자의 제후격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서 어디까지나 중국의 일개 藩屬國이었다. 각국은 중국에 事大朝貢을 하였고, 연호도 중국의 그것을 사용하였다.004)이를 ‘天朝禮治體系’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黃枝連,≪亞洲的華夏秩序-中國與亞洲國家關係形態論≫·≪東亞的禮義世界-中國封建王朝與朝鮮半島關係形態論≫(北京: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92·1994) 등을 참조. 그 결과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대 한국의 왕조는 중국황제의 책봉을 받는 나라로서 자주국이 아니라는 인식이 일반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이러한 중국 중심의 사고가 큰 변화를 맞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이다. 17세기에 들어서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고 서학이 전래되자 조선조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변해갔다. ‘만주의 오랑캐족’이 한족왕조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하여 고도의 문물을 향유하고 있다는 현실은 물론이고, 동양 외에도 고도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서양에 존재한다는 것, 나아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도는 한 개의 위성에 불과하다는 사실 등은 조선의 유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충격이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자의식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내 나라 조선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에 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집중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우리 나라의 역사·지리·언어·사상 등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갔다. 이들에게서 발해의 역사를 신라의 그것과 함께 우리 역사의 정통으로 보아야 한다005)韓佑劤·李成茂編,≪史料로 본 韓國文化史-朝鮮後期篇≫(一志社, 1985), 531쪽.는 인식이 팽배함은 물론, 중국도 지구상의 하나의 나라이고 조선도 똑같은 하나의 나라라는 인식이 등장하였다.006)李瀷,≪星湖僿說≫,<天地門-分野>. 그러나 당시 정치권 주류측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는 小中華의식이 팽배한 가운데 대외적으로는 청국의 영향력도 상존하였다.007)宋贊植,<星湖의 새로운 史論>(李佑成·姜萬吉編,≪韓國의 歷史認識≫下, 創作과 批評社, 1976).
李萬烈,<17·8世紀의 史書와 古代史認識>(위의 책).

 이후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지식인들의 세계관은 또 한차례 변화를 맞게 된다. 개화사상가들이 등장하면서 청국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확립하자는 요구가 일부의 관료에게서나마 서서히 무르익어 갔고, 거기서 대두한 것이 왕을 황제로 높이고 연호를 독자적으로 쓰자는 주장이었다.008)李玟源, 앞의 글(1988). 그러나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거문도사건(1885) 등을 거치면서 청국이 조선에 대한 내정개입을 강화해 감에 따라서 그러한 주장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한 예로 임오군란 2개월 후 조청간에 체결된 무역장정은 마치 종속관계의 文證 같았다.009)즉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1882. 10. 4)을 말함. 이에 대해서는 金鍾圓,<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歷史學報≫32, 1966), 120∼169쪽을 참조.

 청국이 이렇게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해 간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서구 열강이나 일본이 한반도를 장악한다면 북경이 위태로워진다는 안보상의 판단 때문이었다. 脣亡齒寒의 논리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지속된 청국의 간섭은 결국 조선이 청국과는 종속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구 열강과는 근대적 조약체결을 통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대등한 국가관계를 유지해 가는 기이한 모습을 갖게 하였다. 한쪽으로는 만국공법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다른 한쪽으로는 전근대적 책봉체제의 굴레에 묶여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을 구속하던 책봉체제의 굴레는 벗겨졌다. 강화의 결과 체결된 시노모세키조약(下關條約, 1895. 4. 17)에서 ‘청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하고, 장래 조선의 청국에 대한 貢獻·典禮를 전적으로 폐지한다’고 하였다. 이후 청국의 조선에 대한 압제도 현실적으로는 사라졌다. 대한제국의 등장은 이처럼 의식상으로는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변하고, 현실적으로는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이 청국의 구속을 벗어난 상황에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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